아버지의 미소 - 김소진 유작산문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여름 후배의 집에 갔을 때 처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소박한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은 후배에게는 매우 소중한 책인 듯했다. 그 날 후배에게서 나는 '김소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나보다 독서량이 현저히 많은 후배였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숱한 인물들의 이름을 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같은 과 학생으로서 필히 알아야 할 인물을 모르는 것 같아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 나는 <아버지의 미소>를 먼저 읽어보고 싶었다. 소설보다는 산문집에서 그 사람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절판된 책이어서 서점에서 구입할 수는 없었고, 시간을 내어 집 부근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 반납하는 일이 번거로워 비디오든 책이든 빌려볼 수 없던 나는 이 날 이후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느꼈던 책 냄새를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내부의 따뜻한 공기와 조우하는 것도 반가웠고, 감당할 수없이 많은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또한 두어 정류장 정도 걸어야 하는 곳에 도서관이 있으니, 운동도 되고 일석삼조였다.

이 책은 단행본으로 출판된 그의 소설들을 제외하고 그가 남긴 거의 모든 장르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처음에는 수필 같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겠거니 하고 읽어나갔는데, 그 뒤에는 습작한 소설과 시, 책에 대한 글, 인물에 대한 글, 대담글이 이어져있었다.

책을 읽기 전, 제목이 왜 <아버지의 미소>였을까, 의아했던 나는 이내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이 바로 여러 가지 소제목 중 하나인 <아버지의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해왔던 자신의 아픔을 면밀히 풀어내는 작가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연거푸 3번에 걸쳐 눈물과 콧물을 풀어내고야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아픔의 강도야 다르겠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슬픈 가족사에 다시금 마음이 먹먹해졌다.

김소진 어머니 표현에 따르자면, 아버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곤궁하게 바람처럼 날아온 사람"이었고, 김소진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랑과 미움, 또는 자부심과 콤플렉스라는 두 가지 상반된 정서가 한데 뒤섞인 모순된 감정을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또 다르게는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천 길 나락의 끝에 입을 벌리고 있는 깜깜한 지옥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에 부모와 처, 자식을 남겨두고 홀로 내려와 평생을 가슴에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묻고 지내신 분이었다. 이렇듯 분단의 아픔은 곳곳에 남겨져 그 아들 세대에까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아로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부정했지만, 결국 "법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세 있는 사람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평범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 아들 김소진은 매우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만다.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만을 남겨둔 채로….

책의 마지막 부분 지인들과 함께 한 사진 가운데, 지면으로만 만나왔던 한겨레신문 구본권 기자를 보고서는 반가운 마음이 오롯이 들기도 했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책, <아버지의 미소>는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책이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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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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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날이 맑으면 눈부시게 떠나고, 흐리면 촉촉이 젖어 떠난다. 숲은 늘 조용하지만 살아있는 생명들로 늘 분주하다. 들어 갈수록 깊어져, 몸과 마음이 낮아지고 발걸음은 푹신해진다. 반짝이는 나뭇잎 하나, 쌓이는 솔잎 한 잎으로 그늘은 향기롭다.…>

언제인가 신문에서 '숲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테마로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숲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운치 있는 사찰과 수목원을 둘러 볼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에게 무엇보다 반가운 기사였다.

그렇게 여행에 관심은 많지만, 쉬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나는 얼마 전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을 읽게 되었다. 책 중간 중간에 여행지의 풍경을 담아 놓은 사진이 있어 더 좋은 책이었다. 글로 읽어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려온 풍경이 사진을 통해 시야로 들어오면서 지금 당장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나에게는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낮 동안에는 시간이 어찌 가는지 힘든 줄 모르고 다니지만, 저녁에는 한순간에 피로가 밀려왔다. 낮에 보고 느꼈던 풍경들로 마음은 행복하지만, 몸은 그 반대로 하향곡선을 그리곤 했는데, '걷기 여행'이라니 나는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타는 듯한 아스팔트 위를 걷기도 하고,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걷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저자는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상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또 다른 자아를 만났을 것 같기도 하고. 여행지 곳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특히 따뜻하게 숙소를 제공해주었던 할머니들이 저자에게는 소중하고 고마운 분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같았다.

책 속의 여행지 중에는 내가 가 본 곳도 있었고, 지인들에게 익히 들어왔던 곳도 있었는데, '문경새재 넘어가는 흙 길'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이 좋은 흙길을 신발을 신고 걷는다는 건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저자는 양말을 벗고 걸었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 길이기에 양말을 벗고 흙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마치 흙길을 걷는 것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또한 보성 차밭으로 오르는 길에 있던 삼나무 숲길은 저자의 말처럼 사랑하는 이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싶을 만큼 환상적인 곳으로 비춰졌다. 나는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다울 것 같은 이곳이 보성 차밭보다 더 보고 싶어졌다.

곧게 뻗은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찍은 선암사 편백나무 숲의 사진도 인상적이었는데, 곧은 나무들을 올려다보노라면 굽은 마음도 다 펴질 것만 같다던 저자의 말에 앉은 자세를 바로 고치며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기도 했다.

책 중간 즈음에는 국토종단을 위한 짐 꾸리기부터 소요 기간, 비용과 숙소, 먹을거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여행마니아인 저자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노하우를 친근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를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칭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용기 있고 대범한 여성이다. 혼자 떠날 수 있는 저자의 용기가 부럽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 같아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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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살려쓰기 하나 - 사람을 살리는 글쓰기
이오덕 지음 / 아리랑나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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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다 보면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가끔 보게 된다. 그래서 무슨 의미인가하고 사전을 찾아보기도 하고, 문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기도 한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나 선생님의 글에서 보는 낯선 단어들도 마찬가지.

그 후 뜻을 알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동안 내가 몰라서 쓰지 않은 말들이지만, 왠지 그런 말을 쓰다 보면 그들처럼 훌륭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은 잘못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친구 한 사람은 내게 이런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다 좋은데, 글을 너무 재미없게 써."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운 한자말이 많아 뜻을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읽고 나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은 읽는 사람의 지식이 얕아서이기도 하지만, 글 쓴 사람의 잘못인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두루 읽게 하려면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쉽게 써서 누가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글로 써야 좋은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문글자 쓰기를 주장하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선전을 하고 있는 그 유명한 인사들과 학자란 사람들의 머릿속이 이렇게 텅 비어 있고, 무지하고 어리석은가 새삼 놀라게 된다. 쉬운 말을 하면 내용도 없고 유치한 것이고, 어려운 말로 하면 아는 것이 많고 뜻이 깊은 말이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이론은 어디서 배운 '높은 수준의 말'인가? 또 글을 쉽게 쓰면 초등학생 수준밖에 안 되고, 어려운 한자말로 써야 수준 높은 지식을 나타낸 글이 된다니, 동서고금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 이런 괴상한 문장론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던가?" - <우리말 살려쓰기 1> 본문 중에서

<우리말 살려쓰기 1>은 쉬운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려는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책이다.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는 '뚜렷하게'로, '근본적인'은 '근본이 되는'으로 '잔해'는 '부스러기'로, '호우'가 아니라 '큰비'로, '인내심'보다는 '참을성'으로 쓰면 좋을 것이다. 덧붙여 '필자'라는 말보다는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고, '-에 의한', '-에 의해'보다는 '-으로는' 이나 '-에는'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우리 말로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떤 말이 일본식 한자말인지, 한자말을 대신할 우리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힘들고, 귀찮아서 그냥 쓰는 경우가 많다.

지금껏 비판의식 없이 써오던 오염된 말들을 완벽하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려면 한 문장을 쓰는 일도 어려운 일이 될 터이니. 그러나 되도록이면 우리 말을 쓰자는 생각을 안고 글을 쓴다면, 그냥 머리 속에서 뛰쳐나오는 말을 쓸 때보다는 분명 좋아질 것 같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하겠다. 그렇게 글을 쓰려면 너무 어려울 것 같으니까. 다음의 글은 우리를 참 부끄럽게 만드는 글이다. 어찌 배운 사람이 덜 배운 사람보다 오염된 말을 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교과서를 비롯해 신문이나 공문서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들보다 중고등학생들이 더 어렵고 잘못된 말을 쓴다. 중고등학생보다 대학생들이 더 유식한 글말을 쓴다. 어쩌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과 글은 학교 공부를 많이 할수록 더 오염되어 있다. 가장 깨끗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 학교에도 가지 않은 아이들과, 학교 공부를 하지 않아서 책을 읽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란 사실을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 두고 싶다." -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에 쓴 일기나 글짓기한 글들을 보면 참 어린이다운 글이다 싶다가도 그 순수한 마음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가 많다. 그런 걸 보면 좋은 글의 요건에 어려운 말로 쓰라는 법은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우리말 살려쓰기1>은 쉬운 우리말, 살아있는 우리말로 글을 쓰기 위해서 한번쯤 아니, 곁에 두고 여러 번 읽으면 더 좋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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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포구기행>이라는 책 이름이 주는 어감이 신선하기만 하다. 재생지를 사용한 탓인지 책이 아주 가벼워서 마음에 들었고, 중간 중간 제법 많은 사진들이 서면을 메우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전시회에 출품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진 사진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바다 사진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에 굶주려 있던 내게 허기를 채워준 이 책은 서정적인 내용만큼이나 사진을 통해서도 깊은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저자는 하루 이틀이 소요되는 여행이 아니라 포구를 중심으로, 책을 동무 삼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 그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상들을 카메라에 담고, 바다를 벗삼아 해가 지기 전까지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지면에 옮겨가면서 그 역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역시 시인은 보통의 사람들과 이런 이유에서 다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그토록 순수한 마음으로 내력을 읽어내려 갈 수 있음에 감탄한다. 그런 감수성이 시를 창작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회진 장터 한 귀에 자리하고 있는 팥죽 집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에서 활짝 웃으시는 김준임 할머니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 웃는 모습만큼이나 인정도 많아서 이천 원짜리 팥죽 한 그릇에 따라나오는 밑반찬의 가짓수만 여섯 개란다. 게장, 갈치창젓, 반지락젓 무침, 고구마순 무침, 열무 물김치, 김치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팥죽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천원짜리 식사치고는 너무 후한 대접인 것 같아서 나도 한 번 받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김준임 할머니는 장날 할머니들에게는 천 원씩 팔고, 돈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아예 돈을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천 원짜리 팥죽이라니 도무지 이익이라고는 남지 않을 것 같은 음식값이지만, 그래도 팥죽 집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는 할머니가 세상의 이기에 밝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백꽃이 땅 위에 떨어져 있는 사진이었는데, 대구에 살면서 동백꽃을 볼 일도 별로 없었던 내게 붉은 그 꽃은 너무 아름답게만 보였다. 장승포항에서 배로 20분 정도 걸리는 "땅의 마음"이라는 뜻의 지심도를 이쪽 사람들은 동백섬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온 섬이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는 탓인데, 남해의 푸른 바람과 싱싱한 햇살을 머금은 동백꽃들이 나무 숲 가득 피어 있는 모습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자에게 아름다움이란 먼 곳의 불빛이 아니라 살아 가까이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빛과 체온이라는 느낌을 지니게 한다고. 동백꽃은 하늘의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땅 위에 떨어져 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고 했는데, 글귀로는 막연하게만 여겨지던 것이 사진을 보고 나니, 그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흥군의 조산인 천관산이 남해의 물살과 만나는 자락에 뿌려놓은 포구인 회진은 저자가 스물 둘에서 셋까지의 2년 동안을 해안초소 경계병으로 생활했던 곳이라 한다. 그 시절 저자의 기억으로 꼭 한 군데의 찻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은 건화 다방이었다.

눈보라가 펄펄 날리는 겨울날 건화 다방에는 톱밥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갯벌 일을 끝낸 사내들이 톱밥난로 주위에 모여들어 불을 쬐었다고 한다. 화력이 좋은 톱밥난로는 그들의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었고 따뜻한 피가 도는 그 손으로 커피가 아닌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사평역에서>에 나타나는 톱밥난로는 회진의 이 건화 다방에 놓여 있던 톱밥 난로를 슬쩍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시의 재료는 이렇게 얻어지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여행을 하면서 순간 순간의 생각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지면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능력을 타고난다는데, 많은 능력들 가운데 오로지 작가들의 능력이 나는 부럽다. 좋은 책을 많이 읽다보면, 그 능력에 닮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행복한 꿈을 꾸면서 <사평역에서>를 옮겨본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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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먹고 잘사는 법
박정훈 지음 / 김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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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知人)의 소개로 한 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잘먹고 잘사는 법>이었는데, 이 책에는 지금껏 내가 믿어 의심치 않은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학설이 맞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다가도 뭐든지 적당량 취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 상식을 엎는 내용은 바로 우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우유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좋은 식품이라는 일방 통행식 정보만이 전달되었는데, 이 책에는 우유가 골다공증에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뼈를 약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그 밖에도 우리가 익히 듣지 못했던 우유 반대론자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우유 같은 동물성 식품의 과량 섭취로 인해 우리 어린이들의 외향이 커지는 것에 비해 신체 내부의 장기는 몇 천년이 지나야 그 성장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불균형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지적되어 있었다.

우리가 식품첨가물을 1년에 4Kg나 먹고 있다는 내용의 인스턴트 식품 문제와 미국식으로 먹으면 수명이 단축된다는 이야기들, 가축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되고 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간 우리가 사소하게 여겨왔던 일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갖게 했다.

서양의 식생활을 닮게 된 결과 우리 아이들은 십 년 전에 비해 훨씬 큰 키와 체중을 가진 외형을 가지게 되었지만, 소아 비만이나 소아 당뇨 같은 예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병을 가지게 되고, 이같은 병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고스란히 따라간다면 어찌 행복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다소 맛이 없더라도 우리 나라의 전통 음식을 먹고, 인스턴트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줄이고, 섬유질이 많은 채소와 과일류를 즐기라는 것이다. 그간 우리가 많이 들어온 너무 진부한 이야기인 것 같으나 실생활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일이다.

잘먹고 잘사는 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냉장고 문을 열어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와 인스턴트 식품 등을 몰아내고, 된장이나 멸치, 해조류 등과 같은 전통음식으로 채워 우리 식탁을 개혁해 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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