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포구기행>이라는 책 이름이 주는 어감이 신선하기만 하다. 재생지를 사용한 탓인지 책이 아주 가벼워서 마음에 들었고, 중간 중간 제법 많은 사진들이 서면을 메우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전시회에 출품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진 사진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바다 사진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에 굶주려 있던 내게 허기를 채워준 이 책은 서정적인 내용만큼이나 사진을 통해서도 깊은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저자는 하루 이틀이 소요되는 여행이 아니라 포구를 중심으로, 책을 동무 삼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 그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상들을 카메라에 담고, 바다를 벗삼아 해가 지기 전까지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지면에 옮겨가면서 그 역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역시 시인은 보통의 사람들과 이런 이유에서 다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그토록 순수한 마음으로 내력을 읽어내려 갈 수 있음에 감탄한다. 그런 감수성이 시를 창작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회진 장터 한 귀에 자리하고 있는 팥죽 집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에서 활짝 웃으시는 김준임 할머니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 웃는 모습만큼이나 인정도 많아서 이천 원짜리 팥죽 한 그릇에 따라나오는 밑반찬의 가짓수만 여섯 개란다. 게장, 갈치창젓, 반지락젓 무침, 고구마순 무침, 열무 물김치, 김치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팥죽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천원짜리 식사치고는 너무 후한 대접인 것 같아서 나도 한 번 받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김준임 할머니는 장날 할머니들에게는 천 원씩 팔고, 돈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아예 돈을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천 원짜리 팥죽이라니 도무지 이익이라고는 남지 않을 것 같은 음식값이지만, 그래도 팥죽 집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는 할머니가 세상의 이기에 밝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백꽃이 땅 위에 떨어져 있는 사진이었는데, 대구에 살면서 동백꽃을 볼 일도 별로 없었던 내게 붉은 그 꽃은 너무 아름답게만 보였다. 장승포항에서 배로 20분 정도 걸리는 "땅의 마음"이라는 뜻의 지심도를 이쪽 사람들은 동백섬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온 섬이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는 탓인데, 남해의 푸른 바람과 싱싱한 햇살을 머금은 동백꽃들이 나무 숲 가득 피어 있는 모습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자에게 아름다움이란 먼 곳의 불빛이 아니라 살아 가까이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빛과 체온이라는 느낌을 지니게 한다고. 동백꽃은 하늘의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땅 위에 떨어져 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고 했는데, 글귀로는 막연하게만 여겨지던 것이 사진을 보고 나니, 그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흥군의 조산인 천관산이 남해의 물살과 만나는 자락에 뿌려놓은 포구인 회진은 저자가 스물 둘에서 셋까지의 2년 동안을 해안초소 경계병으로 생활했던 곳이라 한다. 그 시절 저자의 기억으로 꼭 한 군데의 찻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은 건화 다방이었다.

눈보라가 펄펄 날리는 겨울날 건화 다방에는 톱밥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갯벌 일을 끝낸 사내들이 톱밥난로 주위에 모여들어 불을 쬐었다고 한다. 화력이 좋은 톱밥난로는 그들의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었고 따뜻한 피가 도는 그 손으로 커피가 아닌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사평역에서>에 나타나는 톱밥난로는 회진의 이 건화 다방에 놓여 있던 톱밥 난로를 슬쩍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시의 재료는 이렇게 얻어지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여행을 하면서 순간 순간의 생각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지면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능력을 타고난다는데, 많은 능력들 가운데 오로지 작가들의 능력이 나는 부럽다. 좋은 책을 많이 읽다보면, 그 능력에 닮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행복한 꿈을 꾸면서 <사평역에서>를 옮겨본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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