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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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밝고, 진실은 어두운 것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이미 그 한 문장 속에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것은 집약되어 있었다. 늙은 소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눈물을 그쳤으면 좋겠다.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나는 소풍 가는 날에도 운동회 날에도 늘 혼자였다. 나는 친구의 가족들 틈에서, 혹은 선생들 틈에서 식사를 했다. 밥을 넘길 때마다 목이 메었다. 나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알았다. 거짓은 밝고 행복하고 진실은 어둡고 불행했다.> (36쪽)

가난은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소년의 가슴을 멍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난해서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고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준태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물론 가난했다. 어느 날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집을 나갔던 배 다른 누나가 찾아와 소년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갔던 누나가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했던 할머니는 이웃에게 삼천 원을 빌릴 때도 손을 벌벌 떨었지만 옷차림이 번듯한 누나는 일억 원의 빚을 지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물넷인 누나의 집은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라는 공간은 이전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습한 기운으로 가득 찬, 곰팡이 피던 집보다 더 흉물스러웠다. 그곳에서 누나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침실에는 온갖 변태적인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돈은 고스란히 곽호 아저씨에게로 들어갔다. 곽호 아저씨는 딸 또래인 누나를 사랑했고 누나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나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누나에게 사업자금을 빌려간 후로는 사라져 버렸고, 누나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몸을 담보로 사채를 빌렸던 누나는 매음굴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곽호 아저씨였던 것이다. ‘구해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장소만 다를 뿐이지 누나가 해야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나에게는 일억 원의 빚이 있었고, 삼천 만원을 갚은 상태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산처럼 높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누나는 사랑에 빠졌다. 송봉권이라는 빵공장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가끔씩 누나를 만나러 오는 일밖에는.

곽호 아저씨의 눈을 피해 사랑을 했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누나는 외출금지를 당하게 되고 만다. 곽호 아저씨는 그에게 칠천 만원을 가지고 오면 누나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 송봉권은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늙음의 대가는 ‘인내’와 ‘절제’

열두 살 어린 나이의 소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나이에 알 필요가 없는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자신을 이미 ‘늙은 소년’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말과 믿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항상 그러려고 노력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굳이 그 스승을 지명해야 한다면 '가난‘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할머니와의 삶이 싫었다. 그녀는 도시 빈민들 중에서도 가장 극빈자에 속했다. 정부의 보조금이나 물품 따위로도 그녀의 가난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자에게는 장난감도 없었고, 그림책도 없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만화방이나 피시방에도 갈 수 없었다. 학교에서건 동네에서건 그는 외톨이였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인내를 배워야 했다. 절제도 배워야 했다. 문방구에 부착된 각종 조립 로봇들의 현란한 카피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했다.> (17쪽)

누나의 삶이 싫었지만 소년은 그 곳을 떠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누나가 가엾고 곽호 아저씨를 죽이고 싶었지만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소년은 초등학교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게 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시립도서관에서 보내던 소년은 동급생 혜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혜주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다. 혜주의 이야기는 가진 게 없는 준태로서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고, 결국 혜주에게 언어로써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게 된다.

준태는 과도를 가슴 속에 숨기고 유일한 친구인 태호를 만나러 간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혜주에게 했던 말과 '과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과도는 곽호 아저씨를 위해 준비한 것일 게다. 소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가난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타락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타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텐데,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안쓰럽다.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체는 속도감 있게 읽혔다.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현실과 마주하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계속 읽다 보면 희망의 빛줄기가 한줄기쯤은 번져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보기 좋게 거부당한 느낌이다. 책장을 덮고도 쉬이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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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김우남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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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말은 유년 시절 즐겨보았던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어른이 되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 행복한 결말을 찾고 있지만 팍팍한 현실처럼 그것은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다.

어차피 행복한 결말도 주관적인 것이고 명백하게 밝혀지는 결말도 없는 마당에 그 모든 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약자를 통해 본 우리 사회의 단면

<거짓말>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선은 중학생 소녀다. 부모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외삼촌댁에 얹혀살고 있다. 이쯤 되면 주인공이 이 집에서 얼마나 ‘찬밥신세’인지 대충 가늠이 될 것이다. 외할머니는 아들내외를 의식하여 지선에게 더 혹독하게 꾸지람을 하기 일쑤다. 지선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다만 자신의 처지가 서러울 따름이었다.

용돈을 주지 않는 어른들이기에 지선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야 했다. 일제 시디플레이어나, 시디도 여러 장 사고 싶은 지선은 동네 세탁소와 반점 주인에게 몸을 허락하여 용돈을 마련한다. 겨우 중학생의 나이에 말이다.

엄마가 지어준 별명 ‘햇님’은 왠지 지선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험한 세상의 이치를 다 경험하게 되는 아이, 시간만 나면 게임랜드에 달려가 게임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지선이 가엾다.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의 천안댁도 가엾기는 마찬가지. 아이가 어려서 남편은 바람이 나 집을 나가고 혼자서 아들 하나를 근근이 키워왔다. 간병인 노릇을 하며 지금껏 지하와 반지하를 전전하며 살아온 한평생이 생각하면 눈물겹다.

이번 환자는 돈깨나 입는 집 양반이어서 꼼짝 못하는 노인네 신세지만 아들이나 며느리가 영감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환자는 천안댁만 찾아댔다. 천안댁이 환자를 열심히 돌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친척들은 천안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행여 재산이라도 노리고 노인네 곁에 철썩 들러붙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처음에 천안댁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죽기 전에 한번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다가 가고 싶은 마음도 오롯이 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들이 벌이가 시원찮아 임신한 며느리가 유산을 해 목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잘만하면 노인네가 귀찮은 아들과 며느리가 제발 영감을 돌봐달라고 한몫 챙겨주며 노인네를 떠맡기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혼자 해보기도 했다.

여하튼 기름값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겨울을 난다는 게 너무 끔찍해 천안댁은 어떻게든 난방이 기가 막힌 병원에서 겨울을 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있는 특실을 기웃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천안댁은 할일없이 12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영감이 잠을 자거나 하는 틈을 타 잘 꾸며진 특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안댁은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찰나 12층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고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천안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떳떳한 천안댁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기로 했다.

점점 영감의 건강은 호전되었고 며느리가 통근치료를 의사와 상의해보겠다는 이야기를 천안댁에게 흘리자 천안댁은 두려웠다. 당장 간병인 노릇을 그만두면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가야 하며 일자리를 잃으면 아들에게 약속한 돈도 마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영감을 보았을 때만큼만 안 좋은 상태로 돌리기 위해 침대에서 영감을 밀어버린다. 그러나 왠일인가. 영감은 곧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만다. 자신의 욕심이 지나쳐 일을 그르치게 된 천안댁은 그만 아연해졌다.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남모를 폭력

<비너스의 꽃바구니>에서는 가정 폭력을 다루고 있다. 천사표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런데 왜 그토록 착한 천사표 언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허우대 멀쩡한 형부란 작자는 일 년에 반은 언니를 구타했다.

그 세월동안 언니는 왜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을까. 친정 식구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서라고 했지만, 그것이 결국은 잘못된 판단임을 깨닫게 된 때에는 이미 심신이 황폐해진 다음이었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도 마찬가지. 어린 나이에 이모부에게 성폭력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상처를 꾹꾹 눌러 기억을 압사시켜버리려 했던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머니에게 이미 고인이 된 몹쓸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다소 식상한 감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거짓말>,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는 자본주의의 그늘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비참한 상황들은 몇 겹씩 겹쳐 나타나고 아무도 그 현실을 타계해줄 수 없다는 사실만 번번히 확인하게 된다. 이 외에도 <문수산 가는 길>, <내가 만난 어린왕자>와 <파워 게임> 역시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비루한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김우남의 첫 소설집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는 사회적 약자의 고단한 삶을 내밀하게 그린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소외된 자들의 삶을 통해, 야비한 권력이 판치는 세상을 통해 저자는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들에게 생각의 골을 깊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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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
문용린 지음 / 갤리온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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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사교육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중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까지 아이들은 밤늦은 시간이 되도록 방과 후 학습을 하느라 힘이 든다.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나이지만 아이들은 양치기에 몰리는 양처럼, 부모에게 등 떠밀려 사교육의 현장으로 투입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이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기에 주저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초등학교 3~4학년의 나이에 벌써 특목고를 준비하는가 하면, 유치원생도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현실은 얼마나 우리의 교육열이 높은가를 반증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학벌지상주의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류대 유명학과를 나와야만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늘도 아이들은 학습에 시달린다.

100명의 아이들에게는 100가지 학습법 있고, 100명의 아이들에게는 100가지 재능이 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획일된 교육 방법으로 아이들을 재단하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아이를 닦달한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상처받고 부모와의 골이 깊어지는 수순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공부 못하는 것보다 꿈이 없는 게 훨씬 위험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제 삼자를 통해서 풀려고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과외 선생님과 상의하고 담임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과의 상담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와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조언했다.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부터 아는 게 순서라고.

아이가 공부를 좀 못한다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공부를 좀 잘한다고 우쭐할 이유도 없다. 모름지기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진로를 선택한 아이들은 무엇을 해도 열정적이다. 그런 열정을 안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분명 부모들이 바라는 것보다 더 크게 성공할 것이다. 열정보다 확실한 성공의 비결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26쪽)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아이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아이의 재능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면 충분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많은 책을 선물하고,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수학을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물론 공부를 잘하면 좋겠지만, 다른 곳에 재능이 있다면 기꺼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바람은 접을 수 있는 것이 좋은 부모의 모습일 것이다.

내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라

나는 부모에게 매번 강조한다.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오타쿠’가 되라고. 오타쿠란 마니아의 수준을 넘어 한 분야에 대해 득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한다.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오타쿠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자기 아이가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교육 전문가보다 더 잘 알아야 하고, 자기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자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철저하게 아이를 안 이후에 성적이든, 성격이든, 생활 태도든 아이의 어떤 변화를 꾀해도 늦지 않다. (149쪽)

'내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라'는 말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와 연애하듯 대화하라는 부분에서 부모들은 느끼는 바가 많을 것 같다.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호통을 치지는 않았는지, 훈육을 목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언어폭력’으로 들리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참 어려워 보인다. 아이를 기르며 '희생을 통한 자기 성장을 도모'하는 부모는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좋은 부모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아이의 성장 발달에 맞는 ‘적기교육’을 시켜라

저자는 발달단계에 맞게 적절한 교육을 시켜야 그 효과를 크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영아기(태어나서 한 살까지)에는 그저 스킨십이 최고의 교육이라고 한다. 어떤 교구보다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주는 것이 이시기 최고의 교육이라고.

유아 전기(두 살부터 네 살까지)에는 간단한 미술 교육이 지적 자극으로 이어지는 시기라 할 수 있고, 유아 후기(5~6세)에는 인성 교육을 시작할 때라고. 종이접기나 색칠하기 등의 놀이가 성장 발달을 돕고 피아노, 바이올린, 수영 등의 교육이 정서와 신체 발달에 효과적인 시기라고 했다.

국어, 영어, 수학 등을 가르치려면 아동기(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이 시기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골격이 단단해지는 시기이므로 발레 등의 신체 운동을 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문용린의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에는 좋은 내용들이 가득하다. 부모 뿐 아니라 아이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서다.

우리의 미래가 아이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파행적인 교육행태를 묵과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저마다의 재능을 발현해서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곧 모두를 위한 길이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만큼, 결국 이 책은 부모들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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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
김윤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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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인물들이라면 애초에 주인공으로 발탁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윤영의 두 번째 소설집 <타잔>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설 속에 투입되어 무명배우 자격으로 소설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타잔>에 실린 8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두 작품은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와 <검사와 여선생>이었다.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

캐나다로 이민을 간 부부가 등장한다. 이곳에서도 괜찮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존경받는 사람이었는데 타국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갈수록 남편은 힘이 들었던 것이다. 불만은 쌓여갔고 그것은 몸무게가 느는 일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비해 아내는 점점 능력을 발휘하여 좀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직장을 옮기게 될 만큼 만족스런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급기야 남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아내는 그러기 싫었다. 캐나다 이민도 남편의 뜻이었고 재이민도 남편의 뜻이다. 아내에게 더없이 좋은 남편이었지만 이제 남편은 예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결과만 통보하는 남편을 아내는 이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비만인 남편의 돌연사로 보았는데 결국 아내는 남편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면밀한 아내의 심리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그 사실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

이민생활이 아무리 만족스럽다할지라도 이건 너무했다 싶지만, 남편과의 남은 생이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는 마당에 아내는 극단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재이민 결정만 없었더라도 그냥저냥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들 부부의 문제를 한 가지로 집약하기에는 어렵다. 저자는 살인사건을 평온한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고 있음이 섬뜩했다.

'검사와 여선생'

잘나가는 마담뚜를 엄마로 둔 주인공은 넉 달마다 한 번씩 남자를 갈아치우는 집에서는 망나니로 통하는 인물이다. 아빠는 땅 장사, 엄마는 중매질로 돈을 불려 살림은 넉넉했다. 사촌 언니 지인은 교사로 애들을 수시로 불러 거둬 먹이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애들 공납금을 대신 내주기도 하는 보기 드물게 착한 교사였다.

하나 밖에 없는 언니의 외동딸인 지인을 엄마는 끔찍이 위했다. 이북이 고향인 엄마는 언니와 둘이 내려와 자매애가 각별한 이유도 있었지만 일찍 엄마를 여윈 지인이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좋은 상대를 조카에게 찾아주고 싶었던 엄마는 열심히 상대를 찾아 지인에게 맞선을 주선해주었다. 지인은 이모의 성의를 생각해 마지못해 한두번 만나다가는 번번이 상대에게 퇴짜를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자리라며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지만 지인은 사람을 보는 나름의 안목이 있었던 것인지 좋은 자리들을 다 마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망에 검사가 올랐다. 엄마는 이때다 하고 지인에게 소개 시켜줬고 웬일인지 지인은 석 달간 강 검사를 만났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인은 강 검사를 데리고 이모의 집을 방문하기까지 하여 주인공은 그날 코에 큰 점이 있는 강 검사를 보게 되었다.

강 검사의 코에 있는 점마저 ‘나 소심해요’하고 외치는 듯하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전형적으로 소심해 보이는 강 검사에게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걸까. 이모에게 강 검사를 소개시키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지인은 강 검사를 그만 만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해왔다. 일이 잘 되어 결혼하나 싶었는데 엄마는 앓아누울 지경이 되었다.

그 후 검사는 뚱뚱하고 괴팍한 성격의 홍 선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검사가 밑지는 결혼이었는데 남녀의 일은 실로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 후 두 달이 지나자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홍 선생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제발 이혼해달라고 애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검사가 성도착자라는 것이다. 그런 내밀한 정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인이 귀띔해준 것이었다.

이럴 수가. 강 검사가 취향이 독특하다고 치부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둘은 이혼하지 않고 살아가고 지인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홀아비 학교 선생과 결혼을 선언했다. 이번에 엄마는 진짜로 앓아누웠다. 행복하냐는 사촌 동생의 물음에 지인은 사람들이 다 날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조건에 맞추어 결혼을 한다고 해서 그 조건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조건은 단지 조건일 뿐이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결혼도 불행할 수 있고,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결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마음이다. 세상의 잣대에 맞추어 남들 눈을 의식해 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단편마다 굵직한 주인공들..

표제작 <타잔>의 주인공인 마장동 김씨는 파산한 뒤 태국의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오랜 세월 소의 목을 따며 번 돈으로 아끼고 또 아끼고 살았지만 아내로 맞아들인 여자의 허영과 낭비벽이 한 사람을 쇠락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의 수지는 입양아로 자라 아이를 입양하게 되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해외입양에 대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며 넘을 수 없는 인종 문제나 사회와 문화의 이질성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었다. 나머지 단편들도 주인공을 통해 하나 같이 우울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소설이 읽히는 계절이 왔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는 독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독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김윤영의 <타잔>이 마음 속 깊이 각인되는 것은. 그러나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장편보다는 단편을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 책에 실린 단편 모두 오래 기억될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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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1disc) - 디지팩
제프 버터워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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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나 은행에서 성실하게 일해 온 존은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그의 삶이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 사랑하는 아내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러시아 여인과의 동거가 가능할까. 주인공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결국 그녀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미 작정하고 들어온 나디아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 미인은 자신의 외모로 상대를 휘두를 수 있는 일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법, 존은 나디아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었고 사랑으로 언어의 장벽 따위는 눈감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평화로운 그들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디아의 생일에 난데없이 그녀의 사촌오빠라는 인물과 일행이 찾아왔고 점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촌오빠와 일행은 사기꾼이었다.

결혼을 빙자하여 남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아주 졸렬한 사기꾼, 사촌오빠라 불렸던 남자는 주인공에게 그동안 나디아가 몇 차례 사기 친 남자들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그를 우롱한다. 존은 일생에 다시없을 모멸감을 한순간에 경험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부정되었을 때 다른 어떤 일보다도 상처가 크게 마련일 것이다. 

그의 성실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보아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의 주인공이 왜 자신이어야만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존을 꽁꽁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그들은 어찌된 일인지 나디아와 함께 떠나지 않고 존과 함께 나디아를 버려두고 떠난다. 가까스로 줄에서 몸을 풀고 존은 수돗물로 허기를 잠시 달래고는 나디아를 경찰에 넘기려 했지만 나디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던 중 사기꾼들이 마음을 바꾸어 한번 더 나디아를 이용하려고 나디아를 찾아왔으나 결국 존과 나디아는 사기꾼들을 따돌리고 출국에 성공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랑 뿐

나디아에게 미처 전해주지 못한 짧은 메모를 발견한 후로 나디아는 존을 신뢰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로 자신의 마음을 함축해 놓은 것을 보고 나디아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어쩌면 나디아도 그간의 생활이 지긋지긋 했을테고, 다만 수렁에서 헤어날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간 나디아의 남편이 될 뻔한 인물들도 그만그만한 멍청이에 불과했을 뿐, 나디아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설파하지 못했고 억울하게 피해자라는 오명만 쓰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존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디아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나디아 쪽에서 보자면 처음엔 사기였지만 사랑으로 바뀐 셈이고, 존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줄곧 사랑을 지켜낸 셈이 된다.

결국 사랑은 한 사람을 수렁에서 건져내었고, 평온하지만 지루한 일상을 탈출할 수 없었던 무료하기 짝이 없던 사람을 구해주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다소 진부한 내용이지만 니콜 키드먼과 벤 채플린이라는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빈한한 시나리오가 빛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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