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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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밝고, 진실은 어두운 것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이미 그 한 문장 속에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것은 집약되어 있었다. 늙은 소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눈물을 그쳤으면 좋겠다.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나는 소풍 가는 날에도 운동회 날에도 늘 혼자였다. 나는 친구의 가족들 틈에서, 혹은 선생들 틈에서 식사를 했다. 밥을 넘길 때마다 목이 메었다. 나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알았다. 거짓은 밝고 행복하고 진실은 어둡고 불행했다.> (36쪽)

가난은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소년의 가슴을 멍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난해서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고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준태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물론 가난했다. 어느 날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집을 나갔던 배 다른 누나가 찾아와 소년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갔던 누나가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했던 할머니는 이웃에게 삼천 원을 빌릴 때도 손을 벌벌 떨었지만 옷차림이 번듯한 누나는 일억 원의 빚을 지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물넷인 누나의 집은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라는 공간은 이전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습한 기운으로 가득 찬, 곰팡이 피던 집보다 더 흉물스러웠다. 그곳에서 누나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침실에는 온갖 변태적인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돈은 고스란히 곽호 아저씨에게로 들어갔다. 곽호 아저씨는 딸 또래인 누나를 사랑했고 누나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나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누나에게 사업자금을 빌려간 후로는 사라져 버렸고, 누나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몸을 담보로 사채를 빌렸던 누나는 매음굴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곽호 아저씨였던 것이다. ‘구해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장소만 다를 뿐이지 누나가 해야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나에게는 일억 원의 빚이 있었고, 삼천 만원을 갚은 상태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산처럼 높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누나는 사랑에 빠졌다. 송봉권이라는 빵공장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가끔씩 누나를 만나러 오는 일밖에는.

곽호 아저씨의 눈을 피해 사랑을 했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누나는 외출금지를 당하게 되고 만다. 곽호 아저씨는 그에게 칠천 만원을 가지고 오면 누나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 송봉권은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늙음의 대가는 ‘인내’와 ‘절제’

열두 살 어린 나이의 소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나이에 알 필요가 없는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자신을 이미 ‘늙은 소년’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말과 믿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항상 그러려고 노력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굳이 그 스승을 지명해야 한다면 '가난‘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할머니와의 삶이 싫었다. 그녀는 도시 빈민들 중에서도 가장 극빈자에 속했다. 정부의 보조금이나 물품 따위로도 그녀의 가난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자에게는 장난감도 없었고, 그림책도 없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만화방이나 피시방에도 갈 수 없었다. 학교에서건 동네에서건 그는 외톨이였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인내를 배워야 했다. 절제도 배워야 했다. 문방구에 부착된 각종 조립 로봇들의 현란한 카피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했다.> (17쪽)

누나의 삶이 싫었지만 소년은 그 곳을 떠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누나가 가엾고 곽호 아저씨를 죽이고 싶었지만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소년은 초등학교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게 된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시립도서관에서 보내던 소년은 동급생 혜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혜주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다. 혜주의 이야기는 가진 게 없는 준태로서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고, 결국 혜주에게 언어로써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게 된다.

준태는 과도를 가슴 속에 숨기고 유일한 친구인 태호를 만나러 간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혜주에게 했던 말과 '과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과도는 곽호 아저씨를 위해 준비한 것일 게다. 소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가난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타락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타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텐데,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안쓰럽다.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체는 속도감 있게 읽혔다.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현실과 마주하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계속 읽다 보면 희망의 빛줄기가 한줄기쯤은 번져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보기 좋게 거부당한 느낌이다. 책장을 덮고도 쉬이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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