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사이트를 둘러보다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4월의 유혹>.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출간하는 책들은 구성이 좋아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편이다.
특히 각 시즌 별로 컨셉을 달리 해서 출간하는 세계 문학 시리즈가 흥미롭다.
<4월의 유혹>은 알라딘 서재 팔로워 분들이 왕왕 읽고 후기를 남겨주셨던 책, <불쌍한 캐럴라인>과도 함께, 휴머니스트 세계 문학 시즌 5 -할머니라는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
일단 표지에 눈길이 갔다.테이블 뒤로 펼쳐진 눈부신 푸른빛의 바다 해안선을 바라보는 한 여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복숭아, 자두로 보이는 제철 과일. 아침으로 먹는 과일인지, 아니면 점심 식사 후 후식으로 먹는 과일인지 햇빛과 그늘의 각도만으로는 바다를 모르는 나는 알 수 없다. 표지를 보자마자 작년 여름에 놀러갔던 이태리의 바닷가가 떠올랐고 그 즉시 사무실을 벅차고 바닷가로 떠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미리읽기를 눌러 처음 앞 페이지 열장을 읽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스넛 부인이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뭔가를 묻듯 바라보는 바람에 윌킨스 부인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일이 되려면 그런 식이어야 했다. 혼자서는, 윌킨스 부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고, 설사 감당할 수 있다 해도 혼자 그곳에 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둘이서 함께라면...
윌킨스 부인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우리 가서 알아보기나 할까요?"
아버스넛 부인의 눈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알아
-미리보기 완료-
알아?? 그 다음에 뭐요??? 아니 적어도 뱉기 시작한 문장은 끝마치게 해 주시고 끊어야 하지 않나요???ㅠㅠㅠㅠㅠ
하아.... 그 뒤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탈리아의 중세식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준다는 신문광고에 속수무책으로 붙들려버린, 그러니까 가정, 남편, 지나친 관심, 늙음이란 질척대는 현실을 떠나 천국에 당도해버린 네 여자의 마법 같은 이야기.'
보아하니 윌킨스 부인이 잘 알지도 모르는 아버스넛 부인에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본인도 알 수 없는 용기로 뜬금없이 이탈리아 중세식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수 있다는 이 공고에 연락해 보자고 말을 꺼낸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아버스넛 부인의 대답이 너무 궁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0장의 미리보기만으로도 아버스넛 부인이 어떤 캐릭터인지 파악하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런던의 중상류층 부르주아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필을 가진 그녀는 고고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지만 사람을 10초 내에 첫인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몇개의 카테고리로 상대를 분류한 다음 계산된 언행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스넛 부인이, 소위 자신보다 가난하고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시혜적인 태도로 (본인의 사회적 평판을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자연적인 일종의 연민 의식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는) 윌킨스 부인을 처음엔 대하다가 윌킨스 부인이 자꾸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 오자 '어 이 여자 뭐지 이 여자는 어떤 카테고리에 분류를 해야 하지' 하면서 출력값에 오류를 보일 찰라 윌킨스 부인이 같이 알아보러 가자고 마지막 어퍼컷을 날리고...!! 아버스넛 부인의 대답 "알아 .......
알아, 다음에 뭐요 뭐???!!!
사무실에서 몰래 미리보기를 읽다가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속이 탄 나는 화장실 가서 볼일 보다 도중에 끊고 나온 사람처럼 (더러운 비유 죄송합니다) 찜찜하게 있었다. 전자책으로는 출간이 안됐고.. 한국에 다음주에 가긴 하지만 다음주까지 기다리기엔 뭔가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인데... 이곳 서점에선 한국책을 구할 수도 없고... 하다가 든 생각.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다면???
구글에 이 책의 영어원서 제목인 'The Enchanted April'을 쳐보았다. 빙고. 불어판 제목은 원서 제목을 그대로 불어로 번역한 'Avril Enchanté'. FNAC (프랑스의 교보문고, 라고 보시면 되겠다)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니, 회사 근처에 있는 FNAC매장에 문고본 재고가 1권이 있다고 뜨는 것이다!! 좋았어!! 점심 시간에 FNAC에 가서 불어판을 사 오는 거야!!
https://www.fnac.com/a17817581/Inga-Vesper-Un-long-si-long-apres-midi
그렇게 점심 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길을 나섰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서점에 갈 수 있다니.. 감격.. 예전 직장에선 꿈도 못꿀 일이었지..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 2시간 걸리던 저 멀리 산업 물류단지 외딴 곳에 있었던 전 직장 다녔을 때를 떠올려보면 도심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얼마나 큰 복지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프낙에 도착, 영미소설 코너에서 작가 이니셜 별로 꽂힌 서가를 하나씩 살펴보는데도 도저히 내가 찾는 이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서점 직원에게 물어봐서 둘이서 같이 찾았는데도, 혹시 몰라 다른 서가를 뒤졌는데도 결국 찾지 못했다... 작가의 이름은 Elizabeth Von Arnim. 엘리자베스는 이름이니까 성씨의 알파벳 순으로 보통 정렬을 하는 프랑스 서가의 V 책장을 직원가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점원이 원하면 지금 주문하고 다음주에 찾으로 오면 된다고 했는데, 사실 나에겐 지금 이 점심시간에 이 책을 사서 바로 뒷장을 펼치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고맙지만 내가 혼자서 더 찾아보고 아니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점원에게 말하고 아쉬운 마음에 V로 시작하는 작가의 서가를 다시 한번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한 책을 집어 들었다.
Inga Vesper,<Un long, si long après-midi>
(영어 원서 제목은 The Long, Long Afternoon)
사무실에 다시 돌아가 보내야 할, 보나마나 길게 느껴질 그 날의 오후 때문에 제목이 끌렸던건지, 아니면 책등의 옥색과 노란색의 색감, 그리고 그 위에 새빨간 색으로 쓰인 책제목의 색감이 끌렸던 건지, 아니면 그 둘다에 끌렸던건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어찌해서 난 이 책을 꺼내 뽑아 들었고 책 표지는 옥색 주방 붙박이장, 그리고 창밖에는 빨간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는 샛노란 주방이었다. 옥색 주방 붙박이장 가구를 보자마자 아주 옛날 어릴적 외할머니댁의 공사 전 주방이 떠올랐다. 딱 이런 옥색의 주방이었는데. 엄마가 없는 어느날 오후에 할머니가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면서 그 옥색 주방에서 간식으로 만들어주던 프렌치 토스트가 떠올랐다. 할머니를 돕는답시고 할머니 옆에서 깨금발로 간신히 주방 상판에 손을 올려 야무진 손으로 달걀을 깨서 볼에 넣으면, 할머니는 식빵이 흐물해져 부서질 정도로 계란물에 푹 담갔다가 마가린을 듬뿍 넣어 녹인 후라이팬에 식빵을 올려 마치 전처럼 식빵을 부쳤다. 노릇노릇 익은 식빵을 접시에 담고 할머니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고 윙크를 하며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가고선 '쉿' 하며 흰설탕을 수저로 듬뿍 퍼서 식빵 위에 솔솔솔 뿌려 주셨다.
책표지만 봤을 뿐인데 벌써 입에선 뜨겁고 폭신하고 달큰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할머니의 프렌치토스트의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책표지 밑에 써 있는 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Hier, j'ai embrassé mon mari pour la dernière fois.. Il ne le sait pas, bien sûr. Pas encore."
(어제,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아직은.)
뭐지? 가정스릴러물인가? 하고 책의 첫번째 페이지를 펼쳤는데 다시 이 문장이 써 있었다. 그러니까 책 표지에 쓰여진 이 문장은 이 책의 첫문장이기도 한 것이다. 책을 뒤집어 뒷면에 쓰여진 책 설명을 읽었다.
캘리포니아의 햇빛이 쏟아지는 주방, 조이스는 창밖에 서서 꿈을 꾼다. 그녀는 백인이고 부자이다. 가정주부인 그녀의 시야는 그러나 곧, 잘 다듬어진 정원의 덤불에 막히고 만다.
루비, 조이스의 집에서 가정주부로 일하는 그녀는 인생을 바꿀 꿈을 꾼다. 하지만 때는 1959, 미국 사회는 가난하고 젊은 흑인 여성에겐 내어줄 것 하나 없어 보인다.
조이스의 실종과 함께 가식과 위선으로 덧칠된 미국의 꿈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한다.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이지만, 이 멋진 두 여주인공은 이미 자신들의 외침을 들려주고 있다. 자유에 불타는 희망의 외침을.
부자 백인 가정주부? 그리고 흑인 가정부? 1959년 미국?
이 교차하는 여러 정체성이 추리소설에서 어떻게 풀어질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차피 찾지 못한 <4월의 유혹> 불어판 대신 이 책을 구입하고 서점을 나섰다. 서점에선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네 그렇습니다... 아직도 프랑스에선... 실내 매장에 들어가면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답니다.....) 이 책이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와 검색을 해 보니 아직 한국에선 소개가 되지 않은 작가라고 한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언행이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곤 하는 추리소설 장르 특성상 이를 외국어로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놓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모국어로 읽는 것보다 읽을 때의 긴박감이 떨어져서 재미가 줄진 않을까 생각해서 추리소설을 불어로 읽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근데 오호라 이 책, 엄청 잘 읽히는데? 책이 쉬운 것인가 (맞음) 아니면 내 불어 실력이 늘은 것인가(아님)
다 읽고 나면 후기를 남기겠음!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출간해도 좋을만큼 재밌는 책인가, 아닌가..! 내 마음에 든다면 내가 번역 제안서를 함 출판사에 보내봐...? (어떻게 하는지 모름...)
그나저나... <4월의 유혹> 불어판은 그래서 며칠전 중고책방에서 샀다.
작가 이름이 Elizabeth Von Arnim이라서 저번에 Fnac 서점에 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여지없이 V 서가에서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또 없는거야... 그래서 중고책방의 서점 직원에게 결국 또 도움을 요청했는데, Von 의 V 말고 Arnim의 A로 정리되어 있으니까 A서가에 가야한다며 손가락으로 책장으 쓱 훑더니 단박에 책을 찾아주셨다. 암튼, 원래 읽고 싶었던 <4월의 유혹> 불어 문고본을 사긴 했는데 저 <Un long, si long après-midi>(긴긴 어느 오후날) 을 먼저 다 읽고 싶어서 미루고 있다. 그래서 아마 시간상 <4월의 유혹>은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낄낄. 아 얼른 한국어로 쓰인 종이책 읽고 싶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이니 슬슬 알라딘 장바구니를 훑어서 책을 주문해 놔야겠다. 도착했을 때 이미 내가 주문했던 책이 나를 기다릴 수 있도록~~ 요즘 알라딘 사은품 뭐가 있나 함 봐야겠다.
그나저나 혹시 아시는 분 질문, 번역제안서라는 건 어떻게 써서 어떻게 출판사에 보내나요...? 그 관례라는 게 궁금함.
그럼 이만 총총..
어제,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아직은.(불어판 원문을 내가 번역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