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고서가 원주민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개인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P87

과거에 벌어진 일에 가담하지 않았던 호주인들이 개인적으로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한편, 우리나라가 과거에 했던 일과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 일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일과 부끄러운 일이모두 있다는 마땅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호주 총독, 《이제는 이들을 집으로》, 1997)

여기서 치유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치유받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둘러싼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보고서는 호주 원주민의 고통에 대해 백인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백인 국가에는 백인들만 살지 않는다. 보고서가 말하는 책임은 불균등하게 부여된다. 호주 원주민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백인 청자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력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와 같은 서사에서화해는 수치심을 드러냄으로써 과거를 청산한 백인 국가에 원주민 개개인이 포함되는 일이 되고 만다(5장 참조). - P88

이미 지적했듯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 타자의 몸(여기서는 국가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이 국가의 고통으로 전유되고 타자의 상처가 국가의 손상된 피부로 물신화되는 일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아야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배우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고통에 응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원주민이 아닌 청자는 고통을 일으킨 역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원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의 증언을 원주민에게서 빼앗아버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은 우리의 느낌에 관한 것도, 그들의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89

이들과는 가까이 있고 어떠한 이들과는 멀리 있다. 내가 어떤 세계에 있다는 것은 그 세계를 만든 역사에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우리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배웠던 곳은 보고서에 실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내가 역사에 연루됐음을 이해하는 ‘지식‘은 쉽게 다가오지도 명쾌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역사를 내가 연루된 것으로 이해하는 지식은 역사를 다르게 느낄 때, 몸과 세계의 표면을 다르게 살아낼 때 비로소 지식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 P90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는것을 알려준다. 공감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없는 고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일이 아니라 [몸, 역사, 공동체를] 다르게 살아내는 일이다. 이는 행동을 요구하고 집단적 정치를 요청한다. 고통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초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 곁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배우는 정치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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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13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다 말앗는데.. 달자님 읽을 때 같이 읽고 싶당😭😖

달자 2024-11-13 23:30   좋아요 0 | URL
근데 책이 진도가 참 안나가요 특히 서문? 부분 넘 어려워요🥲
 

상처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이 문제인 이유는 서로 다른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데 있다. 모든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가정할 때, 피해는 자격의 문제가 된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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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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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다 OOO(이)다. OOO은 유대인일 수도, 겁쟁이일 수도, 화가 난다, 일수도. 각자의 신념으로 살아간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종교일 수도, 양심일 수도 있다. 습관일 수도, 관습일 수도, 돈일 수도. 각기 다른 신념이 모인 고된 삶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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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로 소설을 쓰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언어의 모습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에 잠재하지만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언어에서 표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란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모어의 외부로 나가는것이 하나의 유효한 전략이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외국어 안에 들어가보는 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외치는 소리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은 유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뿐이다. 자기가 받고 싶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소설과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드물다. 많은 사람은 소리 지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눈만 크게 뜬 채 인간이 부서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들리지 않는 외침 속에서 죽어가기만 한다. 또 글로 쓰는 대신 정말로 소리를 질러대면 주위에서 정신병환자로 취급한다. 글이 곧 외침은 아니다. 그러나 글이 외침과 완전히 떨어져버리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글과 외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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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가 앞에서 살핀 것처럼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혹은 다른 이를 대신해서 주장하는 일은 말하기나 글쓰기와 같은 형식을 통해 반복된다. 고통의 과잉 재현과 고통의 재현 불가능성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예컨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고통스럽다는 느낌을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더라도 고통을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계속해서 떠올린다.
‘고통‘이나 ‘아픔‘이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바로 고통스럽다는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거나 옮기기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통을 의학 용어를 통해 글로 서술하든(Burns, Busby andSawchuk 1999: xii 참조) 무언가에 빗대어 비유로 표현하든(Scarry1985 참조) 고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말들은 정작 고통 앞에서는 부족해 보인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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