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 - 나의 가치를 발견하다 소노 아야코 컬렉션 2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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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이러한 혼란스러움, 바로 이것이 중년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한 매력이다. 지긋한 나이에 정의감만으로 세상사를 판단하게 되면 자칫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 정의 또한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규칙으로서 이용되어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말이다. 인간성의 이해란 그보다는 더욱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그러한 이해가 가능한 것도 중년의 지혜이자 안목이며 경험인 것이다.

 

p21 이상적인 가정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p22 우리들은 누구나 어릴 때 또는 청춘 시절에 불행이나 탈선 등의 영향으로 상처받으며 성장하게 되지만 그러한 아픈 상처를 스스로 없애버리고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 때가 바로 중년 이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년 이후란 출신상의 콤플렉스를 스스로 떨쳐버리는 데 성공하게 되는 멋진 시기라 할 수 있다.

 

p34 젊었을 때는 인맥이란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은 지나온 날들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고 싶어하고 믿게 된다. ... 인맥의 기본은 존경이다. ... 그렇게 되기까지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년 이후에야 비로소 인생은 무르익게 되는 법이다.

 

p42 정의란 세상 사람들이 풍문이나 평판으로서 판단하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정의란 드러나지 않는 심적 드라마와도 같다.

 

p67 나는 비관적인 성격 탓인지 중년을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시기’로 생각한 적은 없다. 중년 이후란 오히려 지금까지 손에 넣었던 모든 것과 헤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p70 (성 바울은...) 한 개인의 슬픔 따위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최악의 비극이 일어난다해도 지구 전체가 슬퍼할 비극이란 없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태연하고 조용하게 참아내면서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라고 말한다. 성 바울은 인간의 죽음이란 상실과 동시에 해방을 주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이란 죽기 전까지의 일이다. 모든 것이란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므로 우는 사람도 울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된다고 말한다.

 

p132 단지 자식이란 참 묘하게도 좋게든 나쁘게든 인생을 진하게 만든다. 기쁨도 증오심도 배가시킨다. 이것이 자식이라는 존재가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배가된 기쁨은 좋지만, 배가된 고민은 싫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도 나느 잘 이해하기 때문에 역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감히 반대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친근한 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p159 나는 ..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몇 가지 사사로운 결심을 했는데, 그중의 한 가지가 결코 재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관계 있는 조직에 너무 애착을 갖게 되면 반드시 권력을 갖고 싶게 되고, 인사에 관여하게 되고, 조직의 힘을 주위 사람에게 과시하려 하게된다. 하는 이 모든 것에 마음을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p160 여생이라는 말에 종종 떠오르는 것이 출가의 욕망이다. 쉽게 말해서 현실의 경쟁적인 생활방식에 진저리가 나게 되면 그러한 생활 방식도 있다는 것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p182 성대하게 살아왔던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서서히 수습 쪽으로 마무리해가는 모습은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진다. .. 그 어느 것이든 금방 죽는 병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일관괴게 성대와 발전을 향해 매진하는 것은 더 이상 걸맞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인생의 최후에 수습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인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하게 되었다. ... 성장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이런 수습도 근사하고 멋진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p183 지금까지는 회사나 조직에서 잘 보살펴준 한 그로 가로수였다. 혹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이 보러 올 정도의 유명한 나무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튼튼한 나무는 재목으로써도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낡은 나무란 땔감 정도의 가치뿐이다.

 

p193-194 ‘나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대체로 사람은 누구나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별볼일 없는 존재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면 운이 좋았든지 혹은 다른 사람이 우연히 도와줬기 때문일 뿐이다.

 

p222 인간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의리를 저버리고 후회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것은 젊었을 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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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들고 있으면 나이가 마흔 이상 이라는 사실이 자꾸 각인되는 것 같아 제목은 좀 맘에 안들었지만 내용은 참 좋다.

중년 이후에만 느낄 수 있는 통찰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정말 이런 것들은 이,삼십대에는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흐르는 시간에는... 그런 것, 겪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정의에 대한 태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그저 이 책을 붙들고 주저앉고 싶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년에 회사에서 어떤 일에 연루 되어 결국 안좋은 결말을 보게 되었다. 안좋은 결말을 결정지는 사람들과 나는 모두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몇 다리만 건너면 어쩌면 서로 다른 경로로 알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직장에 힘든 일이 있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무척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잘 해결이 되길 바란다.'로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을 것이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은채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다.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발담그고 사는 이상 '정의로운 내가 누군가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로운 가치를 지향해야 하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삶에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물흐르는 것처럼, 조금 여유있게, 때로는 멍때리기도 하면서,

언제 또 높아질지 모르는 파고에 마음을 낮추며

...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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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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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 연약하기 그지없다.

 

백석은 일제시대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다녔고,

독지가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그후 경성에서 조선일보 등을 중심으로 편집, 창작을 했고

20대 중반에 함경남도에서 교사로 잠시 근무하다 곧 만주로 향했다.

해방 이후 신의주에 거주하면서 분단과 함께 북녘의 시인으로 남았다.

 

천재적인 문학성을 타고 났지만 일제 치하의 불운한 시대였다.

해방, 분단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한국사가 걸쳐진 삶이 안타깝고 애틋하다.

 

나는 평전을 읽는 가운데 나타난 시이어서 그랬는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첫 시집 <사슴>에 대한 당대의 반응과

뒤늦게 발견된 보석같은 시인이라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찬사를 보면 천재적인 시인이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천재적인 시인이 불운한 시대를 타고 나서 부득이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생을 보냈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말이다.

 

백석은 분단 이후 북한의 정치적노선을 찬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면서 어느새 그의 시에도 당에 대한 찬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당이 원하는 작품을 써나간다.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슬프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분단이 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초연한 시인의 이미지로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기야 인간은 원래 이처럼 말라버린 꽃 같고 시드는 풀같은 존재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연약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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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장왕록 지음, 장영희 엮음 / 샘터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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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록 박사는 서울대에서 34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문학자이자,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인 장영희 박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분이다. 장영희 박사는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안고도 학문적 성취와 학생들과 교감하는 교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결정으로 세 차례의 암투병을 하면서도 수필과 칼럼 등을 통해 세상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고 2009년 작고 전까지 「내 생애 단 한번」,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등의 에세이를 출간해 이목을 끈 학자이다.

 

몇 년전 친구에게 선물받은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장영희 박사를 알게 되었고 글을 통해 아버지인 장왕록 박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도 읽었는데 오래전이라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화려한 표지 이미지가 기억에 남았다. 그녀가 ‘기적’으로 해석한 ‘삶’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이미지였다.

장영희 박사의 책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밝고 긍정적일 뿐 아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온기와 통찰이 있었다.

 

그녀의 에세이에 생후 1년만에 찾아온 소아마비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서 학교를 다녔고 화장실 가는 일 때문에 일정 시간 간격으로 학교를 꾸준히 드나드신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1952년도에 소아마비 1급 장애를 가지고 신체적, 정서적으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기까지, 그녀가 그리지 않은 부분에 얼마나 많은 엄마의 헌신과 수고가 있었을까 차마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책들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어디에도 그 위대한 엄마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왕록, 장영희 부녀는 영문학계 부녀 학자로 이름나 있었지만 장왕록 박사가 성실하게 교수직을 감당할 수 있고, 장영희 박사를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워낸 일등공신인 그녀의 엄마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쎄 당시 꼼꼼하게 읽지 않아 혹시 스쳐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책장을 덮고 난 후 그녀의 엄마의 이름은 무엇일까 물음표가 그려졌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장왕록 박사의 책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장왕록 박사 작고 이후 장영희 박사가 아버지의 글과 아버지를 추모하는 몇 분들의 글을 모아 출간한 책이라 머리말, 에필로그 등이 없었다.

책 내용은 장왕록 박사의 문학 연구 여정에서의 에세이들을 모은 글이다. 이 책에서 신기한 것은 심한 장애를 가진 딸을 둔 아버지로서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장영희 박사의 어머니가 철저하게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하여 아버지가 깊이 느낄 기회가 없었거나 장영희 박사가 워낙 의연하게 살아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 대학에서 박사과정 진학을 거절당할만큼 당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제한이 심했을텐데 아버지는 어떻게 이렇게 초연한 문학의 길을 가셨을까.

어쩌면 문학이기에 그 아픔을 다 품고 승화시킬만한 여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학이 숲이고 문학이 예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이 책에도 없는 장영희 박사의 어머니의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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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희망
김기석 지음 / 꽃자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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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희망이라... 희망을 꿈꿀만하지 않는 상황에서 위태롭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환경이 이토록 오염되었으니 저 힘없는 들꽃 정도는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데도 정직하게 원리에 따라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들꽃의 이야기같다. 희망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보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하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듣고 기록한 묵상들이 바닥을 기는 내 마음을 울린다.

 

오랜만에 카페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필 바로 옆에 앉은 두 여인들은 초등 고학년인듯한 자녀들의 교육과 친구 관계 문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 같고, 아이가 둘 씩이고, 그중 한 사람의 아이는 얼마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유학, 이사, 전학 그리고 그들의 적절한 시기, 그리고 친구 관계에 상처를 받은 듯한 다른 한 사람의 자녀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읽는 내내 이건 무슨 책 속의 세계가 실제로 구현된 듯이 사립초 주변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고 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아슬아슬한 집중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읽으려고 오늘 또 다른 카페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 바로 옆에 앉은 남녀의 이야기 주제는 아파트, 상가 등 부동산이었다. 제법 넓은 이 카페에 왜 하필 난 이들 옆에 자리를 잡았을까, 운운하는 금액의 크기답게 목소리에도 박력이 넘친다며 후회하고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집중하려고 했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그림을 보고, 귀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집중하며 다른 결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무척 치열한 것도 같으면서 인간의 유한함을 생각하여 자신하지는 말고 치우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목사님도 이렇게 바닥을 기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 영성이 뛰어나면 이처럼 바닥을 기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걸까?

 

결혼한지 30년 만에 아내의 병환으로 살림을 하게 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30년쯤 지나면 삶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있을까? 일상, 권태라는 단어가 자주는 나오지는 않지만 난 아직도 그런 단어에 시선이 꽂힌다. ‘권태와 어울릴 수 있는 일상’, 이런 단어는 언제쯤 내 삶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p.29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모두가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대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굳게 붙잡고 있던 욕망의 바위를 놓고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순천順天의 사람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주역이다.

 

p.67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과제이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저항과 연대와 연민을 통해 역사의 봄을 선구한다.

 

p.100 에드먼드 버크는 악이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익은 것들을 감추기 위해 잘 익은 견본이 사용될 때 언제라도 바구니를 둘러 엎는 사람이 있다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p.101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때 인간의 존엄은 스러지고 만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돈의 전능함이라는 허구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유와 진리에의 열정이 회복되는 순간, 우리를 휘몰아가던 그 돈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은 잦아들게 된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맞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돈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고 믿으면서 그 믿음에 걸맞는 행동은 무엇인지 모르고, 돈을 신봉하지 않는 다른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돈에 대해서 맹목적인 열정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이웃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삶이다. 삶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나를 자른 사람들도 매주 예배당을 찾아 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고 자신과 자녀들을 앞날을 위해서 기도한다. 믿음을 나누는 지체들과 삶을 나눈다. 고달픈 직장생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격려와 위로를 받는다, 유난히 힘든 일이 있어, 하루하루 힘든 날들을 버티어 살았음을 나눈다, 이런 믿음과 고백, 위로의 과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먹고 사는 문제를 최우선에 두지 않고, 돈의 전능함이란 허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는가, 자유와 진리에의 열정이 회복되어 이웃의 얼굴을 보고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참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함인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는가. 이렇게 살다가 천국을 만날 수 있는 건가. 의문이다. 진실로 의문이다. 이렇게 본질을 잃고 살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p.115-116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그리스인들은 앎 그 자체를 위해 배웠고, 히브리인들은 경외하기 위해 배웠지만 현대인들은 써먹기 위해 배운다고 말했다. ... 적들을 향해 불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던 눈마저 뽑힌 그(삼손), 조롱하는 적들 앞에서 맷돌을 돌려야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망각한 자의 비극이다. 들릴라는 오늘도 성공 혹은 행복이라는 환상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자기 무릎 위에 눕히려 한다. 저항하지 힘든 유혹이다. 들릴라의 손짓을 오연하게 뿌리칠 수는 없을까? 자기 삶의 주체로 바로 설 때 가능하다.

 

p.149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의 행장은 단출해야 한다. 어쩌면 순례란 잃어버린 단순함을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누리며 살던 모든 것을 가지고서는 순례를 떠날 수 없다. 그렇기에 순례는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90세의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이 반핵시위 도중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티쉬 쿠마르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흔 살 노인도 인류를 위해 감옥에 가는데, 젊은 우리는 지금 무얼 하는건가?”

 

p.172 전도서 기자는 너무 의롭게도 살지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며,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라고 충고했다. 또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고 말했다.(전도서 7:16-18 원문: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높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어중간한 위치에 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말일 것이다.

 

p.188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잊어도 신은 잊지 않는다. 신은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지은 죄를 당신이 받는 모욕으로 간주하신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04-205 친절한 자본주의는 당장 돈이 없더라도 소비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고안해냈다. 신용카드가 그것이다. 없는 것을 담보로 하여 돈을 만들어냈던 메피스토텔레스의 마법처럼 신용카드는 욕망을 굳이 유보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소비사회의 신민이 된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는 이미 새로운 결제수단이 아니라 행복의 문을 여는 티켓이다. ...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의 국정 과제로 삼은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웠다. 아무리 사세가 급하게 돌아간다고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경제적 이득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 설사 그런 것을 정밀하게 계산해 보는 것이 정치인들의 과제라 해도 차마 들어내지 않아야 할 것도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경제문제로 환원하는 순간,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는 순간 세상은 천박해진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예수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생의 문제를 경제 문제로 환원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p.225 ‘지당한 말씀은 사람들에게 경청되지 않는다. ‘여백이 없는 삶은 사람들을 변화로 이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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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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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 소설이다. 스위프트는 영국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고 직업은 성직자였다. 당시 유럽의 성직자는 지금 우리나라의 안정적인 공무원 정도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업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어렸을 때 동화 전집에서 한번쯤은 접하고 읽어봤던 책이고 만화로 제작된 것을 본 기억도 있다. 동화나 만화 모두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것 같다. 소인국의 나라, 거인국의 나라라는 소재만큼 유년기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적절한 소재는 없다고 판단된 이유에서이었을 것이다.

p.382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신중하고 심오하고 암울한’ 풍자인 <걸리버 여행기>의 잔인한 재치가 지워진 채 아동용 도서가 되는 아이러니다.” 번역을 했던 평론가의 표현처럼 읽고 보니 정말로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걸리버가 소인국,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들의 나라, 그리고 말들의 나라를 약 16,7년간 여행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영국과 유럽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말들의 나라 여행기 중 걸리버가 살던 당시 사회를 말들에게 설명하는 대목 중 한 부분이다.
p. 317 “주인은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 어떻게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가에 대해 몸시 궁금해했다. 그는 법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했으며 법을 시행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영국의 실정에 맞추어 물어보았다. 만약 우리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이성은 이미 우리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충분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 원세훈 국정원장 선거법 무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무죄 선고’ 등등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법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을 풍자한 듯한 이 표현이 17세기 유럽 사회의 법률가에 대한 표현이었다니,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인간의 이기심과 악에 대한 각성과 동시에 기대감도 약간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판결하고 변론하는 사람들,, 정권 뒤나 봐주는 이런 일 하려고 청춘을 바쳐서 고시공부하고 사법시험 봤나.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서 공부한 목표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불의에 영합해서 안정적 지위와 기름진 생활을 보장받는 것에 정말 만족할 수 있는가. 하루 하루 조금씩 죽여왔던 양심이 이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양심은 숨을 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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