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시대 - 출판인 한기호의 열정 인생
한기호 지음 / 교양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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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을 해도 목숨 바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내 올케언니만 해도 일을 할 때 몸을 사리지 않는다.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도 아닐진대 100m 달리기하듯 일을 한다. 때문에 올케가 잠시 놀고 있으면 어느새 들었는지 연락들이 온다. '아지매, 요새 논다면서? 우리 집 일 좀 해 주이소. 내 다른 집보다 좀 많이 줄게.'

그러면 난 얼마 더 준다는 말에 혹하지 말고 얼마 덜 주어도 좋으니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데 가서 적당히 분위기 봐 가면서 남들 하는 양만큼만 하라며 귀띔하곤 하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이 되는 기라."

난 그런 올케언니를 보면서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좋은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성공한 직장여성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일에 몰입해서 남이 알아줄 정도로 열심히 하는 성실성을 늘 부러워하였다.


출판인 한기호씨의 <열정시대>(교양인)를 읽고 보니 이분 또한 올케 언니처럼 몸바쳐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분은 올케언니와도 차원이 다른 분이었다. 올케언니는 해지면 집에 들어오는데 이분은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24시간 회사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부독재의 어려운 시절 '창작과 비평사'를 물밑에서 이름없이 이끌어 온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1983년부터 1998까지 만 15년'을 '창비'의 영업담당자로 일했다니 돌이켜보면 그는 우리 출판계의 황금기였던 시기를 현장에 쭉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홍보에 실패하면 많은 독자를 만나기 어려울진대 그는 영업 담당자답게 글이 아닌 '온몸'으로 전국 구석구석의 서점을 돌면서 판매망을 구축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신실한 행동으로 지방 서점 사장님들의 마음에서 감동을 끌어냈다.

한 예로, 영업차 속초의 어느 서점(동아)에 들렀을 때, 밥 먹으러 간 직원들 대신 사장님이 혼자 계산대를 지키느라 분주한 것이 보였다.

때마침 어느 중년 여성이 20여권의 제목이 적힌 쪽지를 사장님께 보여주었는데 그는 사장님의 손이 달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18권을 후딱 찾아주었다. 이놈 봐라. 감동한 서점사장님은 횟집으로 가 한턱냄은 물론 형님 아우로 평생 동지가 되었다고. 그는 이런 신뢰 관계를 대도시, 중소도시 전국의 모든 서점들을 돌며 발품을 팔아 형성했다.

찍고 또 찍어도 동나던 베스트셀러들...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열거한 제목들은 다 한때 이름을 떨쳤는데 그러고 보니 모두 출판사가 '창비'였다. <소설 동의보감>은 400만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권만 해도 100만부, <나는 빠리의…>와 <서른, 잔치는…>은 발행 당해에 각각 30만과 39만부를 팔았다고.

요즘은 책을 내서 1~2만권만 팔아도 성공했다 소리 듣는 것 같은데, 그 당시 사람들은 웬 책을 그렇게 읽어댔는지 문득 부끄러워진다. 밤을 새워 찍고 또 찍던 시절도 있었다니, 지금 출판계 현황을 보자면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평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된 그의 글들을 보면서 참 옳은 말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에는 그렇게 옳은 말밖에 할 수 없는 그의 지난 삶이 들어있었다.

또, 제목 그대로 책을 향한 열정으로 책에다 청춘을 바친 한 사나이의 인생이 애잔하게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지지리도 가난했던 고학시절과 군부에 맞서 데모하다 고문당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15년 동안 브레이크 없이 몸 바친 '창비사랑'이 고스란이 녹아있다.

그의 마눌님은 그런 그를 일러 가장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다 0점인데 딱하나 가족들 모두 에게 책을 알게 해준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여담이지만 창비의 간부 한 분이 그의 사주를 물어서 용한(?) 분에게 의뢰했던바. 그 용한 분 왈.

"이분 교수이신가요?"
"아니오."
"그러면 글을 쓰는 문인인가요?"
"아니오."

"그러면?"
"출판사 영업부장입니다."
"거참… 글을 많이 쓰고 글로 성공할 사람인데, 그리고 이런 사람 부하로 데리고 있으면 회사가 번창하니 절대 내보내지 마씨요. 단 자기 사업하면 잘 안 되는 사람이여."

사주 본 사람 말대로 그는 창비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자기사업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차리자 궁해졌다. 그래서 원고료 줄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자기가 글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글을 많이 쓰고 글로 성공'한다는 말에 부합되기에 아마 자기 사업으로도 머잖아 성공할 것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뭐 하는 곳?

그는 1998년에 자신의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이 나왔을 때 그 돈으로 ‘한국 출판 마케팅 연구소’를 설립했다. 설립의 변을 들어보자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좋은 책 한 권이 학교 하나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뜻으로 나 혼자 학교를 세우는 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1만 명이 책 한 권씩을 내면 1만개의 학교가 세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연구소는 지금껏 부족하나마 모든 출판인들이 좋은 책(학교)을 세우는 데 유용한 정보를 어떻게든 생산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 -본분 162쪽

그의 출판연구소는 문을 연 지 햇수로 벌써 10년째이고 그동안 단행본만도 40여권 이상을 펴냈다고 한다. 또, 격주간지로 나온다는 소식지 <기획회의>에서는 한국 출판계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방향, 그리고 출판 활성화를 위한 그의 고민들이 녹아있는 것 같은데. 출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주장들이니 만큼 당국의 도서 문화정책에 그의 해법이 많이 반영되길 기대해 본다.

아무튼, '1만 명'이 책 한 권씩 내서 '1만개의 학교'를 세우는 그날까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잘 꾸려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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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할인행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야기라 유야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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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부모 노릇에 대해 회의 없이 그냥 적당히 자만하며 나 몰라라 살았는데 요즘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또랑또랑하다고 생각했던 큰애는 엄마가 던진 자율과 무관심의 늪에서 너무 놀아서인지 학습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늘 노는 게 남는 장사라 생각했는데, 같이 놀아줄 친구들이 제 시간에 없으니 노는 것 또한 생각만큼 남는 장사가 못 되었다. 오히려 무소속감이 주는 외로움에 그동안 아이는 나름대로 고독을 견디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때야 말로 독서나 좀 하지 하는 게 내 바람이었는데 낮에는 분위기(?)가 안 잡혀 독서 따윈 전혀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고독 그 자체를 씹든가. 그러나 아홉 살이 뭘 알겠는가.

나는 때론 아이의 어린 날을 내 어린 날에 비교하면서 내 아이는 좋은 환경이라 생각했는데 아이가 느끼는 ‘체감도’는 그렇지 않은가 보았다. 아무렴 시대가 다르니 비교자체가 어불성설일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풍요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핍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아이는 아이대로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도 없이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사랑이 ‘간절한’ 4남매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2004) 도대체 뭘 모른다는 것일까. 아이들 네 명이 햇살을 받으며 쪼르륵 앉아서 행복해 하고 있는데 무엇을 모른다는 말인지. 2004 칸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카피만 읽고 숙제하듯 빌려본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상을 타고도 남을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큰아들 아키라(야기라 유야 분)가 처연하니 어른스러운 것과는 달리 그의 엄마는 뭔가 늘 부산스럽고 바빴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아이들이 많으면 쫓겨날까봐 큰아들만 선을 보이고 셋째 ‘시게루’와 넷째 ‘유키’는 여행용 트렁크에 넣어서 데려왔다. 그런가 하면 트렁크에도 못 들어가는 둘째 ‘교코’는 역 대합실인가에서 기다리게 한 후 주변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집으로 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새 아파트 생활. 아이들은 그 전의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린 아이들답지 않게 이웃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살아주었다. 늘 바쁘고 부산한 엄마는 아키라를 학교에 보내주기는커녕 일상생활의 이런 저런 모든 것을 ‘너만 믿는다’ 이 한 마디로 때우며 맡겼다.

그쯤 되면 참다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을 법도 한데 주인공 아키라는 이미 그 단계를 초월했는지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장남이었다. 아니 화 내고 떼 쓸 조금의 ‘여지’도 없었기에 어린이다운 행동은 애초부터 차단되었다. 다만 대책 없는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의 연애 사업이 잘 되어 집안이 안정되길 빌며 하루하루 연명할 뿐이었다.

소설가 김원일의 작품들을 읽으면 없어 못 먹고 살던 시절의 얘기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김원일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마음까지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뿐이지 홀어머니와 자녀들 간의 믿음과 정은 차고 넘쳤다.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도 아이들 사이의 우애는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엄마였다. 도대체 친엄마 맞아? 대책이 없으면 아이들을 줄줄이 낳지나 말든가. 각기 씨 다른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놓고 제대로 양육도 못하면서 여전히 연애사업만은 충실하였다.

“이번에 만나는 사람과 잘 되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나름대로 ‘봉’ 잡을 자신이 있는 듯 말했으나 아무리 천하의 호인이라도 아이 넷 딸린 여인을 영혼에 스미도록 사랑하지는 못 할 터. 그렇게 불가능한 꿈을 꾸며 밖으로 나도는 엄마를 기다리다 아이들은 점점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갔다.

배고픔은 도벽의 충동을 느끼게도 하였고 바야흐로 사춘기 소년은 또래친구에 대한 목마름으로 한없이 더 고독해졌다. 이 영화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저 매일매일 집에만 들어와도, 그 하나만으로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것 같은데 영화 속 엄마는 ‘그 하나’를 못하였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면 사회복지 시스템에 도움을 청해도 될 터인데 왜 그런 생각은 못하고 방치만 했는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니 더더욱 딱했다. 아무튼 이 영화는 나에게 ‘너는 부모노릇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져 주었다.

대답은, 아키라의 엄마와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나 역시 무지막지한 엄마였다. 이해심이라고는 도무지 없고 칭찬을 쉽게 잘해준다는 빌미로 그 못지않게 언제든 비난도 서슴지 않는 폭군이었다. 또, 아이 곁을 지키고 삼시 세 끼 더운밥 해주는 것 외에는 다 함량미달 임에랴.

영화 마지막 노래로 전해지던 아키라의 고백...

영화의 마지막은 (편의점 누나로 나온 다테 다카코가 애절히 부른) ‘보석’이라는 노래가 흐르면서 끝이 났는데 그 노래는 영화 내내 무표정과 처연한 침묵으로 삭이던 아키라의 슬픈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보석(아키라)은 보석인데 악취가 나는 보석이라니.

한밤중에 하늘에 물어보아도/ 별들만 반짝일 뿐/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이/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 다시 한 번 천사는 나를 돌아볼까/ 내 마음속에서 물놀이를 할까/ 겨울바람에 눈물이 흔들리고/ 어둠속으로 날 인도하네./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는 점차 커가고/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보석

눈물을 쏙 빼주던 이 노래는 며칠이 지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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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전혜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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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고홍주씨가 클린턴 정부 인권차관보가 되었다고 하였을 때 나는 고홍주씨도 대단하지만 그 어머니 전혜성 박사에 더 호기심이 갔다. 어찌 그리 훌륭한 아들을 두었을까. 나도 그랬듯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 화려한 출세의 비결(?)이 자못 궁금했으리라.

그런데 전혜성 박사의 교육비결은 우리네 상상과 다소 달랐다. 즉, 그는 자식들에게 '지가 덕을 넘지 않는 삶',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특히 '지가 덕을 넘으면 안 된다'는 전 박사의 가르침은 너무나 와 닿아 책 한 권 내시지 않나하며 은근히 기다리던 차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랜덤 하우스)를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부모가 먼저 스스로 자신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고, 자녀를 섬기며, 더 나아가 남을 섬기고 사회를 섬겨야 한다. 덕은 나만의 이익과 요구보다는 남도 같이 생각하면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덕은 많은 사람들을 이끈다. 그것이 바로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만드는 비결이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로 키울 수 있는 길이다. 남을 돕고 베푸는 과정에서 아이 스스로 오히려 힘과 지혜를 얻게 된다. 부모가 먼저 남을 배려하고 봉사한다면 아이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바르고 훌륭하게 자라날 것이다. - 책 맨 앞쪽에서

그가 말하는 덕은 책의 숲을 거닐다가 쌓이는 덕도 덕이지만 그에 앞서 먼저 봉사하는 삶 속에서 길러지는 인류애와 지혜를 말함이었다. 봉사라니. 자기가 사먹은 과자봉지 하나도 제대로 못 버리는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라니. '봉사하는 삶을 살면 저절로 지혜와 힘을 얻게' 된다니 말은 좋지만 과연 가능할까 회의하는 부모들이 많으리라.

그러나 전혜성 박사의 자녀들을 보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의 4남 2녀 모두 우리한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하버드, 예일 등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에다 의사, 학장, 장관, 변호사 등의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자녀들은 세속적인 출세보다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자 변호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고 보니 이미 난 병 고쳐주는 것보다 그런 병 안 걸리게 미리 예방하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예방의학'이라는 전혀 돈 안 되는 분야를 공부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보니 아예 매사추세츠 주에서 보건 후생성 장관(큰아들 경주)을 맡아서 주(州) 민 모두의 건강을 위해 힘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법을 배운 셋째 홍주씨는 예일대 석좌교수시절, 추방위기에 놓인,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억류되어 있던 '아이티 난민 310명'을 돕는 일에 선뜻 응했다. 그것은 클린턴 정부에 소송을 거는 것이었는데 정치적, 법률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리 뜻이 옳다고 해도 막강한 행정부를 상대로 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송에서 지면 벌금 1000만 달러를 내야 할 판이었다.

홍주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봐야 100만 달러도 안 되었는데 1000만 달러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아이티 난민들이 미국에 남을 수 있게 18개월 동안 수많은 봉사자들과 함께'목숨을 걸고'일했다. 결과는 홍주씨 승.

이일을 계기로 클린턴은 그에게 인권차관보 자리를 맡겼다고 하였다. 이 웬수(?)가 자신의 행정부에 모욕에 주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인권위상을 높여주었기에 그리 하였다나.

남을 돕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

아이들이 직접 봉사 활동을 할 때 거둘 수 있는 효과는 상당하다.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은 일단 기쁨을 느낀다. 자긍심도 갖게 된다. 그런 뿌듯한 감정을 오래 그리고 자주 느끼려면 정말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각오도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하게 된다. 이것은 부모의 강요로 공부하거나 자식의 공부를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방법이다. - 본문 43쪽

돌아가신 울 아버지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된다'며 취중이나마 선한 삶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막상 애를 키워보니 그런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한 삶을 살라고 했다가 제 몫도 안 남기고 다 퍼줘 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쉬이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대신 적당히 물 타기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거나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곤 하였다. 그랬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남을 돕는 삶을 살아라'고 적극적으로 얘기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봉사의 기쁨이 어떤지 나 자신도 조금은 경험했으면서 자식에게는 왜 그러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인색했는지. 이제부터는 진짜 적극적으로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되는 이유를 설명해줘야겠다. 아니, 설명하기 전에 내 먼저 그러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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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다이아몬드 SE (2disc) - 할인행사
에드워드 즈윅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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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려했으나 보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동네 비됴가게에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다이아 몬드에 슬픈 사연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잔혹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줄을 꿈에도....

올해 아카데미 상은 이 영화에 주어야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레오의 연기도 디파티드보다 이 영화에서 훨씬 와 닿았습니다.

매순간 촬영이 힘들었을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총든 병사들의 야성이 그러한 곳이 아닌 다른 쪽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역동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헬기로 반란군을 쓸어버리는 백인아자씨들의 무자비함도 갑갑했습니다.

 

그렇게 피로 물든 다이아 몬드가 신사의 거리 영국에서는 피냄새를 완전히 세탁한채

백치처럼 (아니 지 나름대로는 백조처럼 인가요? 아무튼 )진열되어있더군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 관대...ㅉㅉㅉ...

저는 보석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보석에 미치는 사람이 이해할수 없습니다만.

보석을 좋아하더라도 이 영화 한번 보면 다이아몬드 만큼은 그만 끼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제니퍼코넬리도 너무 좋았고요. 솔로몬 반디 어빠의 목숨건 부성애도 멋졌어요.

이 영화 정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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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1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참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가슴도 먹먹했구요.

폭설 2007-05-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그랬군요.^^ 디카프리오는 갈수록 연기에 깊이를 더 하는 것 같아요. ㅋㅋ.. 유위강 감독의 '상성'을 디파티드 제작진들이 다시 한번더 리메이크 한다고 했는데 디카프리오도 출연계획이라더군요. 왠지 기대가 되요.
 
백범일지 범우 사르비아 총서 101
김구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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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0만원권 새 지폐의 초상을 누구로 할 것이냐에 관심이 뜨겁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그거야 물어볼 것도 뭐도 없이 당연 김구 선생 아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도 압도적으로 김구 선생인 듯했다. 지폐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만약 김구 선생이 아니라면 김구 선생 선호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그나저나, 김구 선생 이분은 박사도 뭐도 아니고 다만 '선생'일 뿐인데 사람들은 왜 이리 오래도록 존경하는 것일까. '선생님' 소리도 못 들으면서 그냥 다들 '김구 선생'이라고만 칭하면서 존경들은 왜 그리 해대 쌌는지.(웃음)

애석하게 가시긴 했어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일 뿐인데 다른 분들은 다 과거의 인물로, 역사 속 인물로 존경할 뿐인데. 어째 김구 선생만은 우리 곁에 늘 살아있으면서 우리의 정신을 다독여 주는 기분이 든다.

정치인들도 '뻑'하면 김구 선생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네. 칼럼을 쓰는 사람들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김구선생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 선생은 어찌 그 먹고살기 어렵고 나라도 빼앗겼던 시절에 부강한 나라가 아닌 '문화'가 우월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지 하면서 감탄할 때면 좀 고만들 우려먹으시지 하며 다소 식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랬는데 <백범일지>(범우사)를 읽고 보니 선생의 말씀은 유통기한이 따로 없고 세세 연연 우려먹어도 세대차이가 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서 대신 쓴 고백록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일러 유서 대용으로 쓴 글이라 하였다. 어려운 망명정부를 이끌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이 암담한 상해시절, 고국의 두 아들에게 '아비의 삶'을 들려주고자 상권을 썼다. 그리고 하권은 임시정부에 도움을 많이 준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동포들에게 '민족 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밝힘과 아울러 자신의 과오를 되밟지 말기를 바라는 노파심에서 쓴 글이었다.

아무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유년시절의 선생은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개구쟁이였다. 강물에 물감을 풀어서 노는가 하면 떡 사먹는다며 부모님 몰래 돈들 들고 장터를 가다 혼쭐이 나기도 하였다. 청년 시절엔 동학의 평등주의에 매료되어 동학교도가 되었다. 동학교도가 되어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기를 소망하였고 자연스레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의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울분으로 '쓰치다' 중위를 찌른 후 인천 감옥에 갇혔을 때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크게 호령하며 그 정당성을 주장했기에 선생은 영락없는 사형감이었다. 그러나 감옥 밖 백성들은 날이면 날마다 사식을 넣어주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고 '김주경'이라는 부호는 가산을 탕진하며 선생이 사형을 면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런저런 노력 덕에 선생은 사형 직전에 극적으로 그것을 면했고 잡범들과 함께 기약 없는 옥살이를 하였다.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감옥에 든 죄수들이 열에 아홉은 까막눈임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한 곳이 감옥인지라 먼저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죄수 중 몇몇이 '선생님 글만 가르쳐 주지 마시고 탈옥(?)도 좀 시켜 달라'는 말에 '뭐 탈옥?'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놈의 감옥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여 감옥을 나가면 새사람이 되겠다는 죄수 4명과 함께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고 탈옥은 성공하였다.

탈옥은 성공하였지만 바로 해주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동학하면서 만난 벗 등 아는 이들의 집을 찾아 혹은 무작정 인연이 닿는 대로 삼천리를 방랑하였다. 그런 와중 공주 마곡사에서는 중이 되고자 머리를 깎기도 하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무전여행'일진대 선생은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한편,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세우고,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신민회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독립된 나라의 감옥 상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면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게 만들 것을 생각하였다.

3.1운동 후,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경무국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최고수반인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 시절의 얘기에는 독립운동을 선두 지휘하면서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고뇌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그 자체로 재미이자 감동이었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 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본문 261쪽

레닌의 말 한마디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청년들에게 고하는 선생의 올곧고 편견 없는 위의 일침은 시원 청량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도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옛날의 청년들이 레닌에 경도되었다면 오늘날의 글깨나 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서구사상에 함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교육'이 서야...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 본문 311쪽

이 책의 마지막에 부연된 '정치이념'이라는 그의 정치와 교육에 대한 사유는 명쾌하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교육이 서야한다는 그의 교육철학은 오늘날의 우리 교육에 절실히 필요한 명제다. 교육이 생활의 기술로,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날 우리 교육의 실태를 선생이 하늘에서 보신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아무튼, <백범일지>를 읽고 보니 김구 선생 같은 '서민' 출신이 일찍이 대한민국의 대표가 된 전례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신선했다. 그리고 나도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 그 첫 번째로 김구선생을 꼽을 것이다. 선생의 시대를 앞지르는 혜안과 이상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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