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는 흔히들 말하는 지하철 빈자리 먼저 차지하기에서도 구분 되지만 커피 한 잔에서도 패가 갈린다. 물론 요즘 아줌마들은 옛날 아줌마들과 달리 애만 옆에 붙이고 있지 않으면 과년한 비혼인지 아줌마인지 분간이 안 가기도 하나, 나는 여러모로 아줌마다. 
 
그러나 마음은 내가 아줌마라는 것을 잊고 사는데 얼마 전 간만에 내가 '아짐'임을 절실히 느꼈다. 오랜만에 젊은 조카들과 조조영화를 보고 난 후, 배가 고파 근처 분식집에서 요기를 하였다. 좀 더 걸어서 밥도 먹고 후식도 주는데 갔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 나 말고 두 젊은 처자들이 배고프다고 난리여서 가까운 데로 간 것이 사단이었다.

마침 우리가 간 분식집에서는 주말이라 그런지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밥을 먹고는 곧장 일어나야 했다. 하여, 그곳을 나와서 푹신한 의자를 떠올리며 인근의 한 커피 점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커피숍에 와본지 그 얼마만이냐. 분위기 좋고, 음악 좋고, 커피 맛 좋을 것이고….'

"뭐 마시지?"

"음, 나는 카페라테."

"나도 카페라테."

 

"그냥 커피가 아니고?"

"요샌 그냥 커피 안 마신다."

"왜?"

"카페라테가 맛있거든. 함 먹어봐."

"달면 싫은데…."

"싫을 정도로 달지는 않아."

"그래, 그러면 나도 같은 걸로."

그리하여 슈퍼에서 파는 것이 아닌, '수제' 카페라테를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는 찰나였다. 그런데 가격표를 보고 놀랐다. 

"뭣이라? 한잔에 3500원?"

"참내, 누가 아줌마 아니랄까봐. 요새 커피 값 다 이렇게 해. 4000원 하는데도 있어."

"하긴, 커피 값이랑 자장면 값이랑 예전부터 같았지만 오랜만에 보니 놀라워서 진정이 안 되네."

앞으로는 반드시 밥도 주고 후식도 주는 그런 데서 먹기로 합의(?)를 하고 비싼 카페라테를 먹었다. 그런데 고것이 비싼 값을 하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혀끝에 그 달콤함이 맴돌았다. 내가 함 만들어봐? 

마침 냉장고에 우유가 잔뜩 밀려있기에 내친김에 실험정신을 발휘해 보기로 하였다. 우유 한 팩을 냄비에 붓고 끓이면서 설탕과 커피는 간(맛)을 봐가며 조금씩 더 넣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우유200ml +커피와 설탕 각각 두 찻숟가락을 넣고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까지 거품기로 저어준다. 이때 거품기를 빠르게 많이 저을수록 찻잔에 담아도 거품이 쉬이 꺼지지 않는다'이다.

 







  
우유 한 팩에 커피와 설탕을 각각 두 숟가락 씩 넣는다.
 
카페라테







  
천천히 젓다가 우유 가장 자리에 보글보글 기포가 생기면 빨리 휘젓는다.
 
커피







  
넘치기 직전에 불을 끈다.^^
 
커피







  
완성된 카페라테
 
커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요즘은 카페라테 만들어 먹느라 우유가 남아 돌 새가 없다. 이전엔 우유가 밀리면 떠먹는 요구르트를 만들곤 했는데 요새는 카페라테 때문에 떠먹는 요구르트 제조기는 당분간 푹 쉬어야 될 것 같다.(웃음)

우유가 자꾸 밀리는데 달리 소비 방법이 없다면 카페라테에 한번 도전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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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주 화초에 미쳤던 적이 있었다. 꽃집이란 꽃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구경을 했고 이름 모를 화초를 발견하면 집에 와서 책을 뒤졌다. 책에도 없으면 사진을 찍어 꽃에 관한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 문의하기까지 하였다.

지금은? 내게 언제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게 화초에 덤덤하다. 화초 이름도 반절은 까먹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지난 겨울엔 베란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화초들에게 아무런 ‘방한복’도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통고하였다.

“너희들, 이번 겨울에 알아서 살아남으면 내년 봄에도 거둬주고 스스로 못 살아남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여. 알겄냐?”

화초고 사람이고 강하게 키워야 살아남는지, 한 해 더 전에는 보온을 해줘도 죽더니만 지난 겨울에는 아무런 조치를 해주지 않아도 다들 살아주어서 보호자로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화초에 대한 이즈음의 내 마음은 그냥 10년 묵은 친구처럼 새로울 것은 없고 그저 덤덤하였다. 없으면 안 되나 떨림 증상은 전혀 없었다. 그랬는데, 아이들 방에 놓을 화초가 없어 간만에 꽃집엘 들렀다가 다시금 내 마음에 불을 댕기는 풀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 스파티 필름 잎이 얼마나 넓은지 우아하기 이를데 없어...^^
 
스파티 필름

아, 바람(?)이 이렇게 해서 나는 것일까? ‘더 이상의 떨림은 없어’ 마음이 확고했는데, 눈앞에서 너울거리는 넓고 푸른 잎을 가진, 같은 화초 수십 개를 동시에 바라보자니 '쌔앵~' 잠자던 바람기가 확 도졌다.

자세히 보니 신품종 ‘스파티 필름’이었다. 기존에 봐 왔던 스파티 필름은 잎이 좁았고 좀  넓은 것이 있기는 했으나 이처럼 넓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 봄 꽃집의 여왕이라면 단연 이 스파티 필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 눈에만 그런가?

 


  
▲ 스파티 필름 가격은 7천원이었다.^^
 
스파티필름

하여간 이 스파티 필름 덕분에 스파티 필름 뿐 만 아니라 다른 화초들까지 다시금 좋아졌다. 해서 수시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주고받는다. ‘어여, 내 마음이 느껴지니?’ 하면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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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우리 시대와 나눈 삶, 노동, 희망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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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한길로만 쭉 걸은 사람이 있다. 음악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연극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 상담을 하면서 30년을 한 결 같이 달려온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하 종강. 나는 이분의 이름을 떠올리면 먼저 이유 없이 믿음이 간다. 그리고 이분의 글을 읽으면 매번 짠했고 때론 단 한 문장으로도 눈물이 났다.

 지난 두해, 신문을 읽다가 가끔 눈물이 쑥 빠질 때가 있었는데 그 원인제공자의 8할은 하종강 이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노동자를 향한 그의 마음 씀과, 그가 소개하는 노동자들의 사연이 애 닳아 마음만 찡한 게 아니라 눈물까지 흘러내리고는 했었다. 

 그는 왜 문화 예술처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에 30년 동안이나 열정을 바쳤을까. (때문에 과로가 쌓이고 쌓이다 결국 두 달 동안 꼼짝없이 드러눕는 바람에 이 책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 출판)가 나오게 되었다지만.)

<고백 하건데, 나를 지켜준 사람들은 상담소에 찾아오는 노동자들이었다. ‘내가 오늘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하룻밤을 새면, 해고당하거나 몸 다친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그 혹독한 시기에 나를 구원했다.>-본문 352쪽


그랬다. 그는 참치 잡이 외항선원의 억울한 사연을 접하고 몇 시간에 걸쳐 정성껏 서류를 다 작성한 후 마지막으로 출력하려던 순간. 그 외항선원이 뒤늦게 아주 결정적인 증언을 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서류를 작성하였는데, 그런 수고쯤은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새벽 첫 차를 타고 갔다가 심야버스를 타고 오기도 하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토막잠을 자가며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이 책에 나오는, 저자가 만난 많은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들 또한 자신들의 안일한 삶보다 잘못된 노사관계를 바로잡고 노동자가 웃으며 사는 세상을 위하여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모진 탄압과 해고 속에서 때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아직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하고 있었다.  

노사관계, 학교에서 가르치자.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제도권 교육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으로 노동문제를 가르친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정규 수업에서부터 노사관계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모의 노사교섭이 일상화한 특별활동으로 잡혀 있어 일 년에 여섯 차례 정도 모의 노사교섭의 경험을 쌓는다. 교과서에는 노사관계를 ‘인간이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과정 이전에 노동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학습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는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몇 달 동안이나 학습하고 토론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로 평생활동해도 배우지 못할 만큼을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깨친다.>  -본문 317쪽 

위의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고등학생도 아닌, 초, 중등학생들에게도 미리부터 노사관계에 대해서 가르친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교육을 안 시키니 대학생이 되어도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일단 드는 생각이, 시민들 불편하게 하고 나라경제 말아먹는다만 떠오를 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었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것을 보도하는 신문, 방송 기자들도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였네. 뿐인가, 자칭 모 일류기업은 아직 노조, 하다못해 어용노조 조차도 없는데, 이게 다 무식해서 용감하다 못해 우리사회의 ‘거악’이 되어버렸구나.

정말 갈 길이 멀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30년 동안 노동법 우려먹고 산 저자와 같은 전문가의 말을 듣고 좀 쉽게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해주고 노동자 복지를 향상시켜주면 안되는지. 노동자의 피나는 투쟁과 희생이 있고 난 다음에야 겨우 한 발작 움직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아무튼 이 책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또 노동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짠하게 녹아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좀처럼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노동자가 살만한 세상을 위하여 위에 언급된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초, 중등에서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정당의, 제대로 된 국회의원부터 뽑았어야 되었는데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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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2008-05-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종강입니다. 제 책보다 서평이 더 감동적입니다. 고맙습니다.

폭설 2008-05-05 22:27   좋아요 0 | URL
어머나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저도 고맙습니다.^^
 
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가 본 곳은 앞부분에 나온 일본 뿐이라 일본에 대한 부분은 감이 오는데

다른 도시들은 정말 그럴까이? 의문만 생겼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이야?

나는 언제쯤 그러한 도시들을 훨훨 한번 날아보나?, 한번 밟아보나?

 

이런 여행담을 읽으면 내 신세가 꼭 세장속에 같혀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다 용기가 없어서 못가는 것일텐데 나는 용기아닌 현실이 내 발목을

잡는 다고 생각한다. ... 하긴 현실도 한 몫하겠지만..

 

고종석. 쌍팔년도 한겨레 기자시절에 글잘 쓴다고 친구가 그 이름석자를

내게 알려주기에 그런가? 하며 유독 그 이름을 기억하는데...

세월이 지나니 또 고종석, 우리말을 잘 아름답게 살려쓴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역시, 옛날의 명성이 세월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구나 했는데...

 

이책을 읽고보니 어째 이제는 그 약발도 다 된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글쎄.... 이 책의 글은 어느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묶었나 본데... 글의 내용이 일기같다.

정제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번도 퇴고없이 그냥 생각나는대로 그대로 적은 듯하다.

왕년의 기자답게 문장을 좀 다듬고 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책을 읽고서는 이분이 우리말을 아름답게 쓴다고 칭찬받는 그분 맞나 싶어진다.

저으기 실망스럽다. 

그렇기는 해도, 

죽기전에 남의나라, 남의 도시들을 될수있는한 댕겨보도록 노력하면서

살어야지 하는 꿈은 꾸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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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한 때의 이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고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홍세화. 누군가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하고 친숙한 이름이지만 짐작컨대 이 이름을 두고 아직도 '듣느니 처음이오'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방끈 짧은 오십대 우리 언니 세대의 아짐들이 홍세화란 이름을 생소해 한다면 이해하겠다. 가방끈도 남들만큼은 되고 먹고 사는 일도 나름 풍족하기에 도통 세상사 관심 없고 나 한 몸 때 빼고 광내고 살면 그만이라는 젊은 세대라면 홍세화를 몰라도 또,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적어도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홍세화' 이름 석 자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것도 초자 선생님도 아니고 '일급 정교사' 연수 자격을 가진 선생님들이라면 말이다. 다음은 초등교사인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십대 후반인 지인은 지난해 교직경력 만 4년을 넘어, 겨울 방학을 맞아 '일급 정교사'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 일정표의 맨 마지막에는 ‘교원단체’에 대해 배우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은 교원단체에서 직접 나와 자기들 교원단체의 현황과 하는 일 등을 교사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는데 알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전교조’와 ‘한국교총’이라는 굵직한 두 개의 교원단체가 있다.

 

아무튼, 이 두 교원 단체 중 한국교총에서는 교총의 상근 선생님이 일일 강사로 나와서 교총에서 하는 일 등을 홍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교조에서는 상근선생님 대신 외부 인사를 초빙해서 강사로 내 보냈는데, 그 초빙강사가 다름 아닌 홍세화씨였다고 한다.

 

평소 홍세화씨를 좋아하고 그의 책도 사보곤 하던 지인은 ‘살다보니 이런 행운이!’ 하며  홍세화씨의 강연을 기대했다고 한다. 지인은 내심 홍세화씨가 연단에 오르면 ‘와아!’ 함성이 터지지 않을까, 여차하면 자신도 휘파람을 불고 손바닥이 불이 나게 박수를 쳐야지 하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지인의 상상은 단지 상상 이었을 뿐, 막상 홍세화씨가 연단에 올랐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아무도 ‘오늘의 강사’ 이상으로 홍세화씨를 보는 선생님들이 없었다고 한다.

 

지인은 괜히 미안해서 열심히 듣고 받아 적으며 귀 기울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너무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에, 모두들 다음날 있을 일급 연수 최종 시험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건성으로 홍세화씨의 강연을 듣는 척 하면서 무릎위에는 죄다 내일 칠 시험의 최종 정리 본을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았겠지만 지인의 주변은 모두).

 

강연하는 사람은 청중과 소통이 됨을 느껴야 강연을 해도 신바람이 나고 하고자 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아닌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책임지는 선생님들이 ‘니는 지껄여라’ 우리는 내일 보는 시험이 더 중요하다는 뜻을 온몸으로 보여줬으니 홍세화씨는 그 강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인은 동료교사들을 대신해 일당백으로 열심히 듣고, 적고, 강연이 끝났을 때는 강연 잘 들었다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사인도 받고 팔짱끼고 사진도 찍는 등 갖은 호들갑을 떨며 나름의 사과의 몸짓을 날렸다고 하였다. 지인처럼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사인을 받으려 몰려든 교사는 여남은 명 정도 되었다고 하였다.

 

그날, 홍세화씨의 강연을 들은 교사는 족히 3~4백 명은 되었다는데 친필 사인을 받고자 연단 앞으로 모여든 교사는 겨우 여남은 명 뿐이었던 것이다. 맥이 빠졌던 홍세화씨는 그나마 수백명중 여남은 명이라도 자신이 말한 교육에 관한 여러 문제의식들을 공감해주니 다행이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 강연의 절정을 장식한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다름 아닌 지인 친구 교사들의 반응이었다.

 

“니 저사람 아나? 왜 그리 친한 척 하는데?”

“저 분, 홍세화씨고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와 <빨간 신호등>의 저자인데 들어본 적 없나?”

“모르겠는데.... 그런 책도 있었나?”

“그래...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야. 후후.”

 

결론은, 홍세화씨의 강연시간에도 굳세게 공부했던 지인의 친구들은 다음날 일급 정교사 자격시험에서 만점이거나 한 개 틀리는 선에서, 무사히, 우수한 성적으로 일급정교사 연수를 마쳤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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