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주식’이란 두 글자는 마약, 패가망신, 알코올 중독, 도박, 늪 등과 이음동의어였다.

 

그것을 증명할 사례들은 열 가지도 넘게 읊을 수 있다. 한 친구의 남편은 “코스닥이 뭐예요?” 시절, 묻지마 투자 열풍에 실려 7천 만 원인가 날리고서 주식에 손 씻었다고 하였다. 십여 년 전 7천 만 원이면 지방에선 집한 채 값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 지인 역시 애써 장만한 넓은 새 아파트를 겨우 일 년 살고 전세를 줘야 했다. 이유는? 역시 남편의 주식투자 실패 때문이었다.

 

크게는 집한 채, 작게는 1~2천 만 원 등 주식해서 잃었으면 잃었지 덕본사람 못 봤다. 때문에 나는 아무리 주식 값이 오르고 그것이 대세라 해도 주식엔 절대 발을 담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확고했다. 스스로 다잡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가끔 남편이 예금이자 낮은 것을 투덜거리며 ‘나도 한번 주식을?’ 하며 말을 꺼내면 손사래부터 쳤다.

 

“정 그럴 돈 있으면 땅을 사라. 땅을 사면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잊고 지낼 수 있지만 주식은 오르면 올라서 내리면 내려서 늘 마음을 써야 되니, 우직하게 땅을 사라.”

“땅 살 돈이 어디 있어?”

“땅 살 만큼의 돈도 안 되면서 그 돈으로 주식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돼. 우리 같은 새가슴, 콩알 간 들은 주식 신경 쓰다 필경 ‘위산과다’ 되기 십상이니 그냥 생긴 대로 삽시다.”

 

아무튼, 주식은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이고 ‘마약’일 뿐이니 아예 주식 근처엔 얼씬도 말자가 내 신조였다. 뿐만 아니라 누가 주식투자를 한다면 내가 아는 실패 사례들을 열거하며 하지 말 것을 권하곤 하였다.

 

 

그랬는데.... 어! 주식을 사고 보니 마음이 달라져....

 

하여간 주식의 ‘주’자만 봐도 거부감이 일던 내가 요 근래 난생 처음 주식을 사게 되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ㅅ’ 식품의 주식을 산 것이었다.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20주를 50만원주고 샀다. 막상 사고 나니 별것 아니었는데 그것을 사기까지 며칠을 고민했다.

 

‘남편에게 말할 경우, 우씨, 니도 하는데 나도 하자고 하면 어쩌지? 나는 딱 20주만 사고 만다는 전제하에서 사지만,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대로 정말 주식이 마약이라면, 20주만 사고 싶은 원래의 마음은 도망가고 내 마음이 휘리릭 변해버리면 어떡하지?’

 

기껏 20주 살 거면서 걱정은 2000주만큼을 하였다. 어쨌든, 마음을 먹었으니 50만원 없다셈치고 증권회사부터 무작정 찾아갔다. 주식을 사고 싶은데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상담해 주었다.

“통장 개설하고 통장에 돈 있으면 언제든 사고 팔수 있어요.”

“그럼 통장을 개설해야 되겠네요. 하나 만들어 주세요.”

 

말은 통장이었으나 직사각형의 종이 통장은 없고 카드만 주었다. 왜 그렇죠 물었더니 뭐라뭐라 설명하는데 다 까먹었다. ‘나만 안 주는 게 아니고 남들도 다 없다면야’(웃음)

 

통장을 개설하고 수수료를 감안에 50만원 조금 넘게 입금하니 명함을 한 장 주면서 명함에 적힌 직원에게로 가서 사라고 하였다. 직원에게 가서 ‘ㅅ’ 식품 주식 사고 싶다고 하니 그래프와 숫자들이 빽빽한 화면을 보여주며 약간의 설명 후,

 

“사시겠습니까?”

(설명을 해도 잘 못 알아들었지만 사는 게 목적이라)

“예. 20주 주세요.”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증권사 직원은 ‘도도도도’ 능숙하게 자판을 몇 번 두드렸고, 거래는 성립되었다.

 

“앞으로 사거나 팔일이 있으시면 전화주세요. 제가 대신 매수 매도도 해드립니다.”

“그래요? 저는 직접 올게요. 아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도 주주가 되었다. 정말 주식이 마약인지 아니면 내가 주식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었는지, 뭐, 둘 다겠지만, 여하간 주주가 되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참여연대에서 삼성을 상대로 소액주주운동 할 때 뭔 소린가 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었다.

 

주식, 비호감에서 급(?)호감

 

‘이래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 되는구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주식에 몰두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식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 호감 고정관념을 깼다는 것이다. ‘주식도 건전하게 하면 좋을 수도 있구나.’ 자신의 예금에서 10분의 1이나 2정도는 주식으로 갖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식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깊은 내막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아주 기본 적인 몇 가지는 이해했다는 것이다. 즉, 나는 모든 주식의 1주가 5000원 인줄 알았다.(풋) 그런데 알고 보니 삼성전자는 1주가 66만원이 넘고, 포스코는 54만원, 현대차 7만 원대, 국민은행 6만 원대, 현대건설 7만 원대 등 해당기업의 정도에 따라 1주의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주에 5000원 이하의 주식도 있다는 것이었다. 2000원대 3000원대의 주식을 보니 견물생심. 복권 사는 셈치고 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1주에 2000원 하는 주식이라면 100주를 사도 20만원 밖에 안하니 망할 일은 없고 망해도 그만이고 조금이라도 잘되면 은행이자 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결론은, 주식은 신중히....

 

스스로 생각할 때 매사에 충동적인 사람은, 주식은 안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런 사람은 , 아니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쩌다 한 번 온 행운에 발목 잡힐 수도 있다. 돈이 좀 있어 여유 있는 사람의 경우도 투자 상담사들의 말만 믿고 홀랑 넘어갔다가 정말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

 

때문에 정녕 주식을 하려면 하기 전에 먼저 나름의 원칙을 정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시세가 좋아보여도 절대, 적금 해약하거나 남의 돈 빌려서 투자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말자 등 말이다.

 

아무튼, 향후 나의 계획은 2000원짜리 주식 100주 즉, 20만원어치 사서 푹 묻어둘 생각이다. 20만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망해도 그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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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은행에 갔다가 모처럼 조찌라시를 봤다. 읽지는 않고 그냥 둘러 봤다. 그러다 몇몇이름들에 눈이 멎었다. 정운찬, 이주향, 아 또 한 사람 누구더라? (그 분이야 말로 엄청 실망한 사람인데...) 

정운찬, 모르긴 해도 일개 경제학자인 이분, 한겨레 칼럼을 통해서 큰줄로 알고 있는데 .... 난 이런 분들이 이해 안간다.

극단의 양쪽신문에 다 발 담그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나름대로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신뢰를 거두게 된다. 이덕일도 그런 인물중 하나이다. 아무리 책소개를 통해서라지만... 아무튼, 조찌라시에 글 실은 것을 보는 순간 바로 신뢰를 접는데 오늘 따따블 실망할 사람을 발견.  그는 다름아닌, 최장집. 나는 이분의 고별강연 소식을 며칠전 한겨레에서 봤는데

고별이래서 특별히 세심히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뭔말인지 모르겠더라. 즉, 나랑 통하지 않더라는 말씀, 그래서, 잘난 사람 잘난대로 사시오. 정도에서 이분에 대한 느낌을 접었는데 오오,

이분 한겨레만이 아닌 여기저기 고별강연 소문 안낸데가 없네.  말씀도 각 신문의 입맛에 맞게 하셨는지 . 제목을 보니 어느 신문인지 알겠고녀. 그럼 즐감하시길~~

최장집의 마지막 헛기침
‘대의제가 민주주의 전부 아니다’

최장집이 고별강의를 했다. 신문들은 이런 제목을 뽑았다. ‘운동의 정치화, 현실 대안 될 수 없어’(문화일보) ‘촛불집회, 정권퇴진 요구 바람직하지 않다’(중앙일보) ‘사회 현안마다 촛불 들 수 없어’(조선일보)

‘의견 다른 타자와 타협할 수 있어야’(동아일보) ‘제도권 밖 운동보다 정당정치 복원이 중요’(한국일보) ‘민주주의는 대의제, '정권퇴진' 구호는 잘못’(오마이뉴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관심없다.

그는 촛불을 위하여 쓸모있는 말 한 마디를 던져주지 못했다. 막힌 것을 뚫고, 새 길을 열고, 가득한 안개 걷힌 후 찬란한 태양을 드러내게 하는 속시원한 한 마디를 그는 끝내 던져주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중학생도 아는 거다. 교과서적인 발언이다. 모범답안이다. 과연 범생이다. 그러나 ‘그래도 최장집이 뒤에 버티고 있어주니까 촛불이 폭주하지는 않겠지.’ 하는 정도로 국민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했다.

그렇다. 그 역시 역할극에 사로잡힌 한 명의 먹물에 불과했다. 그에게서 지성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잘 생긴 얼굴 외에는 봐줄만한 대목이 없다. 이 땅에서 단 한 명의 진짜 스승을 발견하지 못한 나의 슬픔은 그대로다.

그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기 역할 정도는 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들이 사회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원로가 하는 역할이다. 그 역시 원로가 된 것이다. 갈등이 첨예해졌을 때 중재자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 초라하다.

과연 최장집이 자칭원로 김동길, 김수환, 박홍들 보다 나을까? 기네스북의 김동길, 명동성당의 김수환, 막걸리 박홍들.. 지금은 똥이 되었지만 그들도 한 때는 전성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 꽤 잘나갔다.

최 장집은 인터넷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지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을 믿을 수 있어야 지성인이다. 그에게 민중은 여전히 계몽의 대상이다. 백범에게 있고 노무현에게 있는 그 무엇이 그에게는 없다.

진보란 무엇인가? 나는 역사의 발전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물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보는 지식의 지배다. 자기네들이 해먹는 것이 진보다. 문제는 그들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데 있다.

전공분야를 알 뿐 시시각각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무지하다. 인터넷 혁명에 대해 무지하다. 냉전붕괴 이후 일어난 산업사회의 재편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의 전술에는 단지 방어가 있을 뿐 공격이 없다.

변화하는 국제경제환경에서 최고의 전략은 선점이다. 그들은 인터넷에 대해서도 글로벌 경제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선점의 전략이 없다. 노무현에게는 그것이 있는데 먹물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나는 지식의 지배를 반대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성의 정치다. 지성의 정치는 한 마디로 개입의 최소화다. 나는 천상 자유주의자다.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개인이 각자 깨어날 때 지식의 개입은 최소화 될 수 있다.

오늘날 지식의 병폐는 전방위로 개입하려는데 있다. 시시콜콜 잔소리 하는데 있다. 성매매나 환경문제를 비롯한 정당한 개입도 있고 사업가 심형래씨의 개인적인 돈벌이에 딴죽을 거는 과도한 개입도 있다.

먹물들이 심형래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보고 대중은 지식이 시민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로 삼는다. 그 지점에서 진중권들은 딴나라당에 백 만표를 몰아준 것이다. 과도한 개입이다. 지들이 왜 나서냐고?

지성과 지식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지식은 조직을 위주로 계몽하고 학습하려 한다. 그렇게 길들여서 개인을 약하게 만든다. 지성은 개인을 위주로 각성시키려 한다. 자각하게 한다. 개인이 강해지게 한다.

지성은 지식의 개입없이 저절로 돌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목적을 둔다. 지식은 자기네들이 시시콜콜 코치하며 군림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밤중에 남의 침실까지 엿보고 ‘어허! 그건 그렇게 하는게 아녀!’ 하고 훈수두려 한다.

최장집의 결론은 결국 ‘정당정치에 맡겨라’ 이거다. 나는 믿지 않는다. 한국은 서구와 다르다. 한국의 통불교 전통만 해도 그렇다. 정혜쌍수에 교관겸수다. 항상 양자를 겸하고 쌍으로 간다. 승자의 독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인은 천상 유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한국에서 서구식 정당정치는 실패다. 일본만 해도 그렇다. 정당이 역할하고 있는가? 정권교체가 되고 있는가?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중국만 해도 그렇다. 세계 도처에서 사라진 사회주의가 중국과 북한에서 왜 건재한가? 그것은 바탕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유교주의이기 때문이다. 내걸은 이름이 사회주의일 뿐 시스템의 본질은 유교정서다.

후진따오는 아빠다. 원자바오는 엄마다. 엄마니까 운다. 지진이 일어난 쓰촨성을 찾아가서 운다. 울면 된다. 한 방으로 즉효다. 마술도 이런 마술이 없다. 서구의 사회과학이론으로 중국사회의 변혁을 논해봤자 실패다. 맞지 않는다.

미국이 특히 유럽과 달리 이념적 색채가 약한 중도정당의 지배로 된 것은 미국이 섬처럼 고립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고립되면 중도화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백프로 독점은 없다. 독식하려다가는 부시 꼴 난다.

일본도 그렇다. 자민당이 우파정권이지만 특히 농민과 하층민의 지지를 얻는데 힘썼다. 분배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다. 일본은 시골마을에도 거대한 체육관이 있다고 한다. 개인의 사유재산보다 국가의 공유자산을 중요시 한다.

미국과 일본의 이러한 사정은 서구의 사회과학이론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딱 갈라지지 않고 역할분담으로 간다. 한국에서 문화분야는 진보, 경제분야는 중도로 가는 정책이 적절한 역할분담이 된다.

DJ와 노무현의 10년은 연합정권이었다. 좌우합작을 한 것이다. DJ는 자민련과 합작했고 노무현도 이헌재, 진대제 등 보수인물들에게 경제를 맡겼다. 이상적인 조합은 아니지만 고립된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다.

나는 한국의 정당정치가 백년 후에도 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년 후에도 바른 대통령이 나오면 여당을 식물화 시켜놓고 대통령이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노무현의 방법을 쓸 것이다.

백년 후에도 명박스런 대통령이 나오면 여야가 단체로 식물화 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시민과 직접 대치하는 꼴사나운 상태가 재연될 것이다. 시민은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발언할 것이다. 나는 일관되게 시민을 옹호한다.

나는 열린우리당이 해체된 데 대해 실망하지 않는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적절히 치고 빠졌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의 개혁당도 마찬가지다. 집권이 목표라면 실패지만 대한민국을 바꾸는게 목표라면 실패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공백이 이번에 촛불의 성공으로 불타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인가? 가장 격렬한 이명박 반대자는 대선과정에서 가장 크게 상처입은 사람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좌파도 민주당도 상처입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5년간 조중동의 포격권 밖에 있었다. 그들은 당해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분노가 없다. 가장 많이 공격당하고 가슴 밑바닥에 한을 품은 자들이 누구인가?

결론은 노무현 패러다임과 이명박 패러다임의 충돌이다. 가치관의 충돌이다. 대선 때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이 발언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촛불의 핵심이다. 이들이 산개해 있다가 결정적 시기에 인물을 중심으로 응집할 것이다.

그 인물은 지성인이어야 한다. 민중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이 가진 역량의 최대한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당정치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의정치의 비중은 감소한다. 변화는 시작되었다.

www.drkim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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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서 벌써 대통령이 다섯 명이나 나왔다. 어쩌면 경상도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고 나름대로 개기고 있는 것은 다 다섯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역시 나름대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아가 별 이익이 없어도 대통령은 계속 자기네들 땅에서 배출되야 한다는 기득권적  욕구도 있고.... 꼴통이래도 쪽수로 우세하니

뻔뻔스러운 가운데서도 당당할수도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동네 사람들의 눈에서 볼때는

기가차지만... ㅉ ㅉ ..

우좌간,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노무현 다음으로 여러모로 : 지역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국정경험으로 보나, 이해찬이 적격이라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나쁜 의미의 지역색은

없어져야 되겠지만 어쨌든 없어질때 없어지더라도 한바퀴 돌고 없어져야 ... 그런의미에서

충청도에서도 대통령이 한사람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해찬을 너무 싫어했다.

"아니, 왜 싫어?"

"싸가지 없고, 너무 까칠하고, 직선적이고....."

등등 다들 비호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믿음이 있다. 아무리 뒤져봐도 이해찬 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은데,,,

총리도 이해찬이 제일 똑 소리 나게 잘했던것 같은데...

그가 경선에서만 통과하면 이명박은 한방에 날릴줄 알았는데 경선도 통과 못하고 국회의원까지

떨어진 이 시점.

문득생각하니 , 그가 대통령이 될수 없었던 것은 위의,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왜곡된  비호감도 비호감이지만 무엇보다 그가 한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 패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8년 스타 의원에다, 한번도 떨어지지 않은 6선의원, 최연소 교육부 장관, 두번씩이나 대통령을

만든 정책의 의장(?)등 그는 실패가 없었다.

위와 같이 생각하니 지금 그의 와신상담이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느끼듯 다른 사람들도 강태공 불러내듯 다시 그를 불러낼수 있는 날이 왔으면... 머, 또 어찌 생각하면 정치인 때려치고 욕 얻어먹은 김에 계속 골프나 치면서 여생을 여유롭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후로 계속 휴식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그에 대한 선입견만은

털어주었으면...

아래 펌글은 이해찬이 왜 그토록 국민들에게 비호감이 되었는지 하나의 증거가 될 글과 도표이기에 퍼왔다. 즐감하시길~~~ 아울러 찌라시가 그를 얼마나 교묘하게 '따'시키고 오사카씨를

얼마나 감싸주었는지 확인 하시길. 새삼 이 도표를 보니 방송 3사도 정말 해도해도너무 했네.

정말 바른 언론을 가지는 일은 밥보다 더 중요한것 같다.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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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85개를 5일 만에 뚝딱!

 

어린 시절, 과일을 좋아했던 나는 과수원집 딸들이 무척 부러웠다. 중학시절엔 과수원 하는 친구의 집에 갔다가 굵기가 작은 홍옥 여러 소쿠리 분량이 소여물 옆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아니, 먹는 과일이 왜 저기 있지.' 좀 작아도 사람이 먹기엔 충분했는데 소먹이로 주는 것을 보고는 그 소가 어찌나 부럽던지. 소를 주느니 나를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쑥스러워서 못했다.

 

친구 집에서는 작은 홍옥은 사과 축에도 들지 못했고 처치 곤란이라 소가 어서 먹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친구에게 그때 얘기를 하면 친구는 내 부러움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하였는데, 듣고 보니 과수원집 딸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내 사과를 안 먹고 말지. 가을에 사과 딸 때마다 무거운 사과 바구니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 일 안 시키지만 우리 때는 본전 빼고도 남게 시켜 먹었잖니? 내게 사과는 맛있는 과일이 아닌 '노동'으로 기억된다."

"아무리 그래도 내겐 니 노동이란 말이 사치로 들린다. 일 많이 해도 좋으니 사과 많이 먹고 자랐더라면…."

 

아무튼, 과일에 대한 내 여한이 자식들에게도 유전되었는지 두 아이 다 과일을 무척 좋아한다. 요즘은 과일이 철도 없이 일 년 내내 쏟아지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과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우리 가족은 나의 옛날과 다름없이 없어서 못 먹어 안달이다.

 

얼마나 과일을 많이 먹어대나 하면 참외를 15kg들이 큰 상자로 하나 사면 5일을 못 버틴다. 15kg 큰상자일 경우 보통 주먹만 한 크기의 참외가 한 85개 정도 들어있는데 우리 식구는 그것을 4~5일에 다 먹어 없앤다.

 

6월 들어 벌써 두 상자를 먹었다. 아니, 5월 말일 전후에 한 상자 먹고 아직은 참외 값이 좀 비싼 듯해서 중간에 토마토 두 상자를 끼워 먹고 다시 참외 한 상자를 먹었다. 토마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 이웃들은 기겁을 한다.

 









  
과일상자. 버려도 늘 쌓인다.^^ 과일 값을 모두 합하면 78000원. 싸지요?
 
과일상자

 

"아니, 한 상자도 아니고, 토마토를 어째 한꺼번에 두 상자씩이나 살 수 있어요?"

"한 상자는 말이 상자지 너무 헤퍼서 며칠 못 가기도 하고 또 토마토 가격이 쌀 때는 달랑 한 상자 배달해 달라기 뭣해서 사는 김에 두 상자 삽니다."

"우리는 봉지로 사먹어야지 상자로 사먹으면 반도 못 먹고 결국은 버리게 돼요."

"우리는 없어서 못 먹어요."(웃음)

 

아무튼 요즘은 참외와 토마토가 당기는 계절이지만 조금 있으면 수박과 포도가 여름날의 열기를 식혀준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은 풋사과 '아오리'가 신고식을 하기에 두어 상자 먹어 줘야 하고, 아오리를 먹고 나면 감과 빨간 사과가 나온다. 찬바람이 불면 남도의 귤이 또 우리네 미각을 꼬드기고 삼동엔 이 귤과 시원한 배와 사과를 번갈아가며 한 상자씩 비워야 한다. 일조량 적은 겨울철이라지만 우울할 새가 없다.

 

그러다 봄이 오고 대지가 꿈틀거리는 4월이면 딸기가 또 옆구리를 찔러댄다. 딸기를 얼추 먹고 나면 토마토가 나오고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 번갈아 먹고 나면 아아,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노란 참외가 지나치려는 내 발길을 붙든다.

 

사실, 오늘 점심부로 참외가 똑 떨어졌는데 사러갈까 말까하다 참아보자며 참고 있는데 갈증도 아닌 것이 배고픔도 아닌 것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데 아마도 과일이 고파서 생긴 금단 증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금단 증상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라도 하면서 침이라도 삼키고자, 상상으로라도 좀 먹고 싶어서 말이다.(웃음)

 

참으로 고마운 과일가게 사장님 부부

 







  
단골 과일가게의 현증택 사장님. 1남 1녀 자녀들이 다 성장하여 그런지 부부가 다 인상이 여유롭다.
 
과일

 

과일을 상자째로 그것도 일주일도 안 돼서 한 상자씩 비운다면 비용이 상당하리라 짐작할 것이다. 물론 과일값으로 지출이 많다.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고기를 잘 안 먹고 외식도 거의 안 하니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호사스럽게 과일을 사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좋은 과일가게를 만났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한 2년 정도 되었을까. 동네 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인 이웃 아파트 후문에 어느날부터인가 노점 과일 가게가 들어섰다.

 

해서, 시장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다 과일을 빼먹었으면 한번씩 들르곤 하였다.  그런데 한번 두번 차츰 그곳에서 과일을 사다보니 이번엔 두 분의 후덕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착한 사람 밀어주고픈 게 인지상정. '이왕이면 이곳에서'하다 보니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자째로 과일을 살 때면 동네의 여느 과일 집보다 많이 쌌다. 그것은 과일을 많이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여간 생광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특별히 싸게 파는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번 참에 여쭤보니 떼 오는 가격은 대동소이한데 '박리다매'를 한다고 하였다.

 

'박리다매? 아마, 과일장사로 나선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특별히 손님 사로잡을 자신이 없어서 더 싸게 파는 것으로 전략을?'이라고 순간 생각했는데,

 

"과일장사 한 지가 그러고 보니 27년째네요."

"어머, 그렇게 오래요?"

"여기는 집사람이 하고 저는 또 다른 데 가서 합니다."

 










  
과일 옆에 따로 자리잡은 매실과 완두콩. 완두콩은 이즈음 왕창 먹어줘야. 매실을 보니 매실농축액을 담글까 말까.^^
 
매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그곳을 지나 칠 때면 아주머니 혼자 계실 때가 많았다. 그리고 과일이 쌌지만 상자째로 사도 하자를 별로 발견할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다 '27년' 경험이 녹아 있어 그런 것이었다.

 

아무튼, 이 단골 과일가게를 드나들면서, 이렇게 이문을 적게 보며 과일을 싸게 파는 것도 일종의 선업을 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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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6월 6일) 금요일 12시 처음 방송된, XTM의 토론 프로그램 <끝장토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끝장토론’이래서 여차하면 밤새도록, 어떤 결론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하는 밤샘 토론인줄 알았다. 그런데 제목만 그렇고 토론시간은 달랑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토론의 진행방식과 카메라의 빙글빙글 춤추며 돌아가는 상황은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꼭 무도장에 온 것처럼 카메라가 상하, 종횡무진 춤을 출 때마다 내 심장도 덩달아 흥분이 되었다.

 

‘이런 걸 두고 발상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암만.’

 

기존의 <백분토론>이나 한국방송 <시청자 토론>의 경우 토론자들을 잘 섭외하면 볼 만하고 유익하다. 반면, 토론자들이 초보이거나 말을 매끄럽게 잘하지 못하고 한마디로, 철학도 없이 죽을 쑤면, 재미는 고사하고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지겹다 뿐인가. 토론이 끝나도 알맹이 없는 토론을 지켜본 시간이 아까워 울화통이 터질 때도 있다. 

 

<백분토론>의 경우 객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시민논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긴 하지만 토론의 전반부 내내 그들이 하는 일이란 지루한 듯, 답답한 듯 토론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이다. 이 때문에 그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때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끝장토론>의 경우, 앞에 앉은 주 토론자들보다 뒤에 앉은 ‘시민토론단’ 토론자들이 더 난리였다. 지난 첫 방송의 경우 노회찬, 진중권은 물론 제성호(뉴라이트 공동대표)김정호(자유기업원원장)도 시비는 ‘몰라’도 말발에서는 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시민토론단의 거침없는 토로에 비하자면 때론 한 수 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중간에 두 번인가 전국의 민심을 찾아가 직접 마이크를 들이대고 날것 그대로의 민심을 보여주었는데. 이 부분 또한 격한 토론의 열기를 잠시 식히는 의미는 물론 바닥 민심의 ‘직설’이 토론자들 못지않게 개운했다.

 

사회자의 여유 있는 진행도 돋보여 

 

무엇보다 사회자 백지연씨의 여유만만 우아 능숙한 진행 또한 시장바닥 같은 토론장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함으로 순간순간 전환해주는 데 한몫 하였다. 다만 곁가지기는 하나, 우아함까지는 좋았는데 높은 굽의 구두가 괜히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하였다. 마치 드라마에서 운전 중인 사람이 앞은 보지 않고 자꾸 옆 사람만 보고 이야기할 때처럼 말이다.

 

마냥 앉아서 하는 토론이라면 짧은 치마든 굽 높은 신발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토론의 경우 카메라가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카메라와 사회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카메라에 걸려 후다닥 넘어질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이 나만의 착시라면 상관없겠지만 혹 다른 시청자들도 그러한 불안을 느꼈다면 높은 굽, 멋진 의상을 떠나 과감하게 청바지에 단화를 신고 나와도 되지 않을까. 미스코리아 뺨치는 늘씬한 외모에는 뭐를 입어도 손색없을 것이다.

 

아무튼 첫 회 첫 토론을 단 한번 봤을 뿐이지만 노회찬 전 의원 말마따나 <끝장토론>은 단번에 ‘대박예감’이 들었다. 토론 내내 너무 많이 흥분하고 너무 많이 웃어서 그런지 토론이 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아쉽다 뿐인가. 잠까지 확 달아나게 만들었다.

 

오늘(12일) 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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