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


별이 된 엄마

 

97이라는 숫자를 마지막으로 세며 나의 엄마는 2년 전 4월의 마지막 날, 멀고먼 또 다른 세계의 별이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어언 19년 만의 일이었다. 200480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자식들의 소원은, 혹은, 농담은 엄마가 아버지 없이 1년이라도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려 19년을 엄마는 더 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혼의 세계 따윈 있다 해도 믿고 싶지 않고 오로지 내 오관으로 생각하고 보며 이 세계를 인식하고 싶었다.

 

그런데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엄마가 돌아가니 뜬금없이 영혼의 세계 같은 보이지 것들에 관심이 가졌다. 더 이상 저작이 안 되어 밥을 끊고 21일 정도 두유와 미음과 물로 서서히 양을 줄여가다, 티 없이 맑고 따뜻하고 고요하던 4월의 마지막 날 오후, 엄마는 다른 차원으로 떠났다. 따뜻한 오후의 봄날 그 말할 수 없이 평화롭던 오후의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복이 엄마를 위해 마련한 깜짝 선물 같았다.

 

엄마는 아픈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기 마지막 일주일전까지도 엄마는 좌로 취침, 우로 취침을 스스로 했다. 그리고 복기해보니 돌아가기 며칠 전에는 크게 하품을 여러 번 했는데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세상걱정 없어 보였다. 친척 어르신은 엄마가 자리보전하며 시간을 오래 끌 것 같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였다.

 

저렇게 세상 걱정 없어 보이고 아프다 신음소리도 없는데 어떻게 빨리 가시겠나. 오래 시들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엄마와의 이별을 지금 당장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안도와 함께 한편으로는 엄마가 고생을 하며 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 우리엄마는 다를 것이다.’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엄마가 생의 마지막을 햇살 좋은 봄날의 거실에 고요히 누워서 자신의 인생 파노라마를 다 돌려보고 멋지게 갈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바람이고 내 상상이고 현실은 엄마의 상태가 장기화 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큰오빠와 큰방에서 상의하였다. 평생 효자로서 지극했던 큰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엄마의 마지막만이라도 손을 보태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얘기하다 엄마기저귀도 갈고 물과 미음도 드리려고 거실의 엄마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엄마를 안았는데 뭔가 살짝 이상했다.

 

엄마! 엄마! 물이라도 좀 듭시다.”

 

엄마의 목을 감싼 손으로 고개를 바로 해보는데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벌려보았다. 한 번도 경험이 없지만 책에서 읽은 것에 의하면 돌아가기 전에 혀가 말려들어간다고 하던데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가 싶었다. 엄마의 혀는 검붉게 굳어있었다. 서둘러 큰방의 큰오빠를 불렀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자 평생 엄마 옆의 또 다른 효자였던 청각장애인 둘째 오빠도 엄마 곁으로 다가왔다.

 

엄마의 귀밑이며 턱밑, 그리고 코끝에서 엄마의 숨결을 느껴 보려 해도 이미 우리 자식들의 감각이 혼미해져 엄마가 아직 이승을 헤매고 있는지 이미 저승을 떠났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우리는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끼며 119를 불렀다. 119는 두서없는 우리의 얘기를 듣더니 자신들이 갈 때까지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하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큰오빠와 번갈아가며 심장마사지를 하는 가운데 119 구급대가 왔다. 그들은 산소포화도 등을 말하며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았음을 확인해 주었고 심장이 멈춘 경우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올 때처럼 갈 때도 서둘러 떠났다. 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니 경찰차가 도착하였고 경찰차가 떠나자 다음 순서의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렸다.

 

산골동네에 한 시간 여 만에 서로 다른 마크의 차량이 세대나 도착하고 동네사람들의 묵묵한 시선 받으며 엄마는 그렇게 또 다른 차원으로의 단장을 떠났다. 장례식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삶과 죽음의 존재방식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 듯 명쾌하게 3일 만에 엄마를 고향선산 아버지 옆에 푸른 잔디로 감싸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야 모두들 싫어했기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면 엄마는 다르지 않는가. 엄마가 돌아갔다는 것은 온 우주가 무너지는 것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자식들인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엄마가 돌아가도 세상은 이변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은 가야 하는 길 엄마가 아프다는 신음 한마디 없이 돌아가서 너무 감사했다. 큰언니는 말하였다.

 

어쩌면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아야!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을 수 있는공?”

언니 나도 그게 너무 신기하다. 엄마에게 아름다운 마지막 보여 달라, 엄마는 할 수 있다, 흔들릴 때마다 관세음보살 알겠제? 하면서 염주도 사주고 했지만 그리고 살짝 기대도 했지만 엄마가 이렇게 고요하게 갈 줄이야.”

 

그러게 말이다. 엄마 정말 여문 사람이었데이. 마지막 까지 정신 줄 안 놓고 고고하게 갔네.”

나도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 새삼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처럼. 삶의 마지막을 엄마처럼 맞이할 수 있다면... 맞이할 수 있을까.”

 

살아서하는 작별인사

 

무엇보다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도 자식들 모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돌아가기 보름 전에 그 말로만 듣던 생전장례식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들, , 사위, 며느리, 조카, 손자, 손녀, 친척 등 모두 엄마를 보러왔다. 엄마가 거실에 누워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들은 유쾌하게 떠들며 점심을 먹었다. 엄마의 자손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모여 유쾌하게 식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저마다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용돈도 드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역시 이름난 효자였던 사촌 오빠는 엄마 옆에 오래 앉아 엄마의 손을 쓰다듬으며 농담도 하고 그랬다.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생전 장례식을 영화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족에겐 그날이 생전 장례식이었다.

 

진짜 장례식에서, 23녀 자식들은 살짝 눈물만 비칠 뿐 슬피 울지 않았다. 유독 올케언니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례식장 도착하자마자 버선발로 엎어지듯 엎드려 슬피 울었는데 진심이 느껴졌기에 고마웠다. 그리고 뒤늦게 쉰 넘어 생의 어느 질곡에서 중국 어느 높은 산에서 신비체험을 하고 돌아와 스님이 된 올케언니의 동생 D스님이 법성게와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구성지게 읊으며 불교식 추모를 해주어 무척 감사했다. 엄마는 살아생전 절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절에 가깝다고 하였다. 스님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며칠 전부터 돌아가신 사장어른(나의 아버지)과 엄마의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가려고 정성스런 모습으로 거실에 빙 둘러 앉아있는 모습이 보여서 며칠 있으면 기별이 올 줄 알았어요.”

 

아아, 아버지를 비롯하여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간다는 말이 너무도 위로가 되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코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하던 소원이 19년이나 연장된 것은 다 아버지의 배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자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엄마가 불쌍해서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엄마가 돌아가니 아버지를 미워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내가 평생 외면함으로서 슬펐을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고 19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결론은 엄마가 돌아감으로서 나는 진실로 고아가 되었고 그리고 또 자유인이 되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어디 일주일쯤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면 혹시 내 없는 사이 엄마가 돌아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임종을 못 보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때문에 친정에 가면 늘 마지막인 듯 고마움의 말을 했지만 진짜 마지막과 마지막일지 모르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늘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 큰오빠에게 할 말을 잊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또한 감사했다. 마당에서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리는 순간 아차! 깜빡할 뻔 했던 말을 오빠에게 하였다.

 

오라버니, 오랫동안 엄마를 효심으로 모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제

오라버니는 대 자유를 얻었으니 이 세상 모든 행복 다 누리며 사시길 빕니다. 엄마가 원하는 것 또한 오라버니의 행복과 기쁨일 것입니다.”

 

여행도 독립이 필요해

 

그렇게 큰오빠의 삶이 좀 더 신나고 행복하게 달라지길 바라며 나의 삶 또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달라지고 싶었다. 마음으로 품었던 것들도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말로만 읊조렸던 세계 자유여행, 정말 큰 마음먹고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 호수, 몽골 내륙, 차마고도, 실크로드, 네팔, 이집트, 사하라사막, 우유니 소금호수, 파타고니아 그리고 패키지가 아닌 단독으로 서유럽 동유럽 도시들을 일주일씩 체류 해 보기 등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미국, 캐나다, 남미와 아프리카, 호주, 터키, 그리스, 북유럽, 동남아... 아 세계는 어찌 이리 넓은가. 이 유쾌한 숙제들을 나는 과연 다 할 수 있을까. 그동안 1년에 2~35~10일 사이의 짧은 패키지여행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괜찮았으나 여행도 독립이 필요했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 스스로 해야 하듯이 나도 여행 독립이 필요 했다.

 

그런데 일본이나 대만이라면 모를까, 나의 간담으로는 단독으로 비행기타고 멀리 날아가는 것은 엄두가 안 났다. 시절친구를 만나 같이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타협을 하였다. ‘지금은 아직 60세 전이니 패키지에 의지하고 60세 넘으면 그땐 정말 용기를 내어보자.’

 

60이 지나면 한두 달 집을 비운다한들 남편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 용기 없어 못하는 여행 독립을 가족들 눈치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었다. 60전에도 못내는 용기, 60 지난다고 낼 수 있을까. 살짝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그렇게 미루며 시간을 벌어 우선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앞으로 4~5년 남았으니 그동안 용기를 장착할 수 있으리라. , 나는 할 수 있다. 여행 독립의 그 첫 발걸음은 그 어디 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떼고 싶었다. 가고는 싶으나 아직 엄두가 안 나는 그 길을 나는 과연 60세가 되면 떠날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일이란 때론 뜻하지 않게 급물살을 타기도 하는바 그 엄두가 안나 던 산티아고 순례를 60세 전에 하게 되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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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기쁨 - 그날 이후 열 달, 몸-책-영화의 기록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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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짐작은 되지만 물어보지 않았던 무심한 나를 발견했다. 한사람의 세계는 사라지는게 아니라 남은 사람의 세계로 이어지고, 새로이 태어난다.˝.......물어보지 못한
일인추가, 회한의 눈물 추가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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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기쁨 - 그날 이후 열 달, 몸-책-영화의 기록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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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랄까. 책 전체가 다채로운 무늬로 꿰매어진 '아름다운' 퀼트같았다.~


2. 현실(골절의 아픔)과 환상(정신적 자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액자영화 같기도.


3. 고통(오 나의 뼈)의 깊이와 환희(책과 영화가 주는)의 크기는 뫼비우스띠처럼 

얽혀있어 결국은 '쓴맛'이 사는맛이고 고통과 고독은 또 기쁨이 되는 '찰나'일지니.


4. 헉! 그런데....... 소개된 책과 영화중에 내가 보고 읽은 것은 열손가락 이하.

이럴수가.....ㅠㅠ 허허~~

덕분에 유툽과 블로그 검색으로 영화의 장면과 책의 상황을

바로바로 확인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5. 확인을 거듭하며 영화에 대한 작가의 꼼꼼, 적확한 문장과 담담하고 차분한 호흡에

감탄 엔드 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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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스침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이 여행지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다 슈퍼에서 레몬이 수북 쌓인 것을 볼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5년여 전 관광객인 나에게 자신의 텃밭 정원에서 레몬을 따 건네준 이탈리아 할아버지이다. 카페에서 지인들을 만날 때 커피 아닌 다른 것을 마시고 싶을 때면 나는 종종 레몬에이드나 레몬차를 선택하곤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난 여행에서 보았던 레몬나무와 레몬할아버지가 떠올라 폰의 사진함을 뒤적이곤 했다. 사진 속 레몬나무와 할아버지를 뵈면 그곳 친쾌테레(Cinqueterre) 앞바다의 파도가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그 바다는 파도가 유독 거칠다고 당시 가이드는 말했다. 그 옛날 포에니 전쟁에서 구사일생 이기고 돌아오던 병사들이 정작 친쾌테레 앞바다의 파도 앞에서 무너졌다고. 파도가 너무 거세어서 고향땅을 눈앞에 뻔히 보며 죽어갔다고.
 
우리들이 바라보았던 그날도 바다는 흐렸고 파도가 거세었다. 슬픈 얘기에 그 옛날 병사들을 생각하다가도 이내 현실로 돌아와 우리들은 저마다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에 나는 보다 위쪽의 언덕마을로 올라갔다.
 
 


   


 

풀들이 싱그럽게 뻗어 나온 돌담 벽 길을 지나 어느 집 담장에서 슈퍼나 사진에서가 아닌 실제 레몬나무에 달린 레몬을 처음 보았다. 사르르 한기가 돌던 1월 중순의 겨울이었는데 레몬은 춥지도 않은지 그 바닷가 언덕에서 노랗게 탐스럽게 열려있었다
 
나는 너무 신기하여 레몬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다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그때 인기척이 났고 문을 나서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소를 띠며 낮은 담장 너머로 인사를 하였다.
 
"본 조르노~."
"본 조르노~."
"소노 꼬레아나."(한국 사람입니다.)
"수드?"(남쪽?)
"씨!"(네!)
 
할아버지는 '아~'하시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레몬나무를 가리키며 리모네(limone,레몬)가 예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하나 줄까?'하는 느낌의 말씀을 하며 따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얼른 '그라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당시 90은 족히 넘어 보이던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레몬나무에 가더니 레몬을 하나 땄다. 다시 몇 걸음 더 천천히 걸어 철문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에게 레몬을 주셨다. 나무에서 금방 따서 그런지 레몬은 아주 단단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힘겨운 걸음이 죄송해서 몇 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돌아섰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 귀한 레몬을 한국에 가져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농산물은 검역에 걸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가지고 온다는 생각은 이내 접었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 '어디, 눈 딱 감고 비타민C를 다량으로 한번 섭취해볼까.'하며 레몬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레몬이 너무 딱딱하여 도무지 이로 깨물어지지 않았다. 뭔가 뾰쪽한 것이 있어 뚫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도 없었고 사과처럼 두 쪽을 내려고 힘을 써 봐도 까딱도 안했다.
 
그래서 며칠을 가지고 다니며 감상을 하고 향기를 맡다가 최종적으로는 호텔방 전화기 옆에 티슈하나 깔고 고이 올려두고 나왔다. 나름 그것은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그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레몬하나는 그 후 내 마음 속에서 별것이 되었고 이따금씩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그럴 때면 레몬나무와 바다는 지금도 변함이 없겠지만 할아버지는 그 후로 안녕하신지 그 안부가 궁금해지곤 한다. 부디 레몬나무와 함께 보다 오래사시기를 비는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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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토지>,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몇 질을 읽으며 책읽기의 기쁨에 빠진 언니는 독서하다 보니 독서와 관련한 한 가지 답답함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토지>를 읽고도 눈물이 나고 <아리랑>을 읽고도 눈물이 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잘 표현할 수가 없어. 말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렵다. 이렇게 저렇게 내 느낌을 줄줄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답답하다, 체한 것처럼."

"아 그래, 그렇지? 그런데 책을 자꾸 읽다 보면 저절로 그 감상을 표현하는 것도 늘지 싶다.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을 잘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막막함이야. 일단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 자체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데이~ㅎㅎ"

언니에게 천자문을 추천

나는 언니의 '표현이 어렵다'는 말에 꽂혀 어떻게 하면 표현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천자문이 번쩍 떠올랐다.


"언니 어휘력도 어휘력이지만 겸사겸사 일단 천자문을 배워보는 게 어떨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에는 대부분 한자가 있고 그 한자가 이렇게 저렇게 생겼다는 걸 알면 재미있지 않을까. 중·고등 검정고시 같은 걸 도전해 볼 수도 있지만 이미 독서의 감을 알았으니 차라리 언니의 경우는 한자 공부를 겸하는 게 더 좋을 듯해."

"그래?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끈기 하나는 있거든. 회사 다닐 때도 늘 지각 한 번 안 했다. 그래도 한자라니.... 한자 써본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

"사실 나도 천자문 다 몰라. 천자, 아니 500자도 모르지 싶다. 나는 천자문 배워보려고 시도하다가 늘 중도에 그만 두었는데 언니는 되지 싶다. 혹시 아나? 언니가 하는 걸 보면 나도 후끈 달아오를지?ㅎㅎ 한번 도전해볼래? 요샌 뭐든 유튜브에 다 있어. 꼭 천자문이 아니더라도 한자라고 생긴 것을 공책에 쓰다 보면 뭔가 배움의 기쁨이란 게 느껴지지 않을까?"

나는 생각난 김에 스마트폰을 열고 천자문을 검색했다. 유튜브 세상에는 천자문쯤이야 매일 꾸준히 한다면 몇 달 만에 뚝딱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듯한, 상세한 안내들이 즐비했다. 언니에게 천자문 독송과 풀이 및 획순을 가르쳐주는 채널 하나를 알려주었다.

언니에게 권하면서 나도 견물생심 호기심이 당겼다. 이번에야말로 나도 천자문을 뗄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30~40대엔 한자보다 다른 외국어들이 당겼다. 늘 작심 며칠 혹은 몇 달로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을 홀로 배웠는데 지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결혼 초기 30대를 지날 때는 유교문화가 주는 압박이 싫어 공자님도 싫어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성년을 넘기고 여러모로 해방되니 다시 고전적인 유산들이 좋아졌다. 나도 죽기 전에 사서삼경 원문으로 한번 읽어보자. 읽지 못하면 쓰기라도 한번 해보자 하는 갈망이 일었다. <열하일기>며 <북학의> 혹은 퇴계며 다산의 책들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그러나 아직 어디까지나 마음만이다).

언니에게 천자문을 권하고 한 일주일쯤 후였나. 언니는 한자를 쓴 공책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나 한자 공부 시작했다!"
"와아~ 벌써?"


사진 속에는 언니가 꾹꾹 눌러쓴 한자들이 빼곡했다. 언니의 독서 입문 뚝심을 보았기에 한자 공부 또한 꾸준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힘들었던 삶도 이제는 추억

언니는 나이 오십 초반에 이불 누비는 일을 배웠다. '오십'을 확실히 기억하는 이유는 어느 명절엔가 친정에서 만났을 때 언니가 신세 한탄을 하면서 읊조렸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오십에 이불 기술이 무슨 말이고? 나이 오십에 먹고 살려고 기술을 배워야 되는 신세라니..."
"언니 배운다고 다 되나? 미용사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미싱도 그 분야에 소질이 있어야 되는 거 아이가?"
"일단 해봐야지 뭐. 내가 엄마 바느질 솜씨 닮았으면 될 것도 같다."


그렇게 언니는 이불 누비는 기술을 계속 배워 나갔다. 어느 명절에 만나면 '어려워 죽겠다.' 또 어느 날 만나면 '내 인제 기술 많이 늘었데이~' 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한 3년 지났을 때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나 이제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다. 무슨 이불이든 갖다주면 입맛대로 박아낼 수 있다."
"무엇이 제일 어렵노?"
"침대 커버 한 번에 매끈하게 좌르르 박아 내는 게 어려웠다. 침대 커버는 이불처럼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잖아? 그 네 모서리 깔끔하게 박아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이제는 그것도 문제없어."     
"언니 대단하다. 확실히 엄마 손끝이 언니에게 유전되었네~"


언니는 그렇게 배운 기술을 65세 무렵까지 잘 써먹었다. 이불 누비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언니의 아이들이 직장을 잡기 전이었고 형부마저 별 도움을 주지 못할 시기였다. 혼자 벌어서 세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서인지 지금은 자식들도 안정을 찾았고 무엇보다 형부와는 뒤늦게 잉꼬부부가 되었다. 일이 힘들어도 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언니는 주말마다 등산 가는 것을 즐겼다. 등산은 언니가 65세쯤 어깨에 무리가 와서 일을 놓을 때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해준 인생의 취미였다.

부지런하고 평생 일을 하던 사람들은 쉬고 싶네 하다가도 막상 일을 놓으면 심심해서라도 다시 일을 찾게 되는데 언니는 백수생활을 일인 듯 열심히 하였다. 무엇보다 산을 좋아했기에 혼자서도 가고 여럿이도 가며 즐겁게 지냈다. 언젠가 '이산 저산 다 가 봐도 팔공산이 제일이다'고 해서 물어보았다.

"언니 팔공산 일 년에 몇 번 가노?"
"글쎄, 일 년에 한 40번은 넘지 싶다.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 일 년이면 52번이잖아? 못 갈 때도 있지만 처음 놀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자주 갔거든."


그랬던 언니가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등산을 많이 못 가고 자중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 미처 소비하지 못했던 응축된 열정이 곱게 풀려 독서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한자 공부마저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 배움에 빠져드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지 싶다. 갈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와 육체적 쇠락 속에서 소외된 마음으로 말년을 보내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럴 때야말로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인 것 같다. 낮아진 체력으로 오롯이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인생에 대한 회고와 사색, 독서 그리고 공부가 제일인 거 같다. 공부하며 늙어간다면 노년은 다시금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자문은 사자성어가 250구, 합이 천자이다. 250구의 사자성어들이 다 각각 저마다 하나의 문장을 이루기에 글씨 공부이면서 동시에 독서의 느낌도 있다. 나도 언니 덕에 이참에 천자문을 떼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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