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해마다 봄이 되고, 그리하여 오고 가는 길섶에서 새싹이 돋고 자라서 작은 꽃망울들을 피우면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이 그냥 그 자체로 좋았다. 내 너의 이름은 모르나 그냥 좋다. '그냥 좋아하면 되었지 귀에 익숙지 않은 너의 이름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하며 꽃들에게 무언의 인사를 건네곤 하였다. 그러나 이름이 어렵기로 말하자면 원산지가 대부분 서양인 서양화초들의 이름이 더 어려웠다. 다른 나라 화초들의 익숙지 않는 이름들을 외우다보니 우리 나라 꽃 이름을 외우는 일은 훨씬 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꽃 책을 샀다.
김태정 박사의 계절별로 나뉘어 놓은 <쉽게 찾는 우리 꽃-현암사> 3권은 한 손에 잡고도 펼칠 수 있게 책의 가로 길이가 좁다. 때문에 들이나 길섶에서 왼손에는 책을 펼쳐들고 오른손으로는 풀이나 꽃을 살피고 하면서 보기에 딱 좋다.
보다 보니,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눈에 익숙한 꽃들이 많았다. 어릴 때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며 수도 없이 본 꽃들. 그러나 한번도 그 이름을 알고자 애썼던 기억은 없다. 다만 아련하게 참 예쁘구나 생각했던 기억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남아있다. 그러한 추억의 꽃들을 이제는 그 이름 하나하나 여유있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패랭이꽃'이라는 꽃 이름을 맨 처음 알게 된 것은 도종환 시인의 시에서였다. 무슨 시였는지는 잊어버렸는데, 암튼 그 시를 읽고 나서 패랭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그 날이 온 것이다. 책을 펼쳐 패랭이꽃을 찾아보니 과연 패랭이꽃은 시인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예뻤다.
'며느리밑씻개'는 내가 며느리다 보니 그리고 그 이름이 하도 웃기기에 평소 궁금해하던 풀이었는데, 아, 그것은 웃고 넘어갈 풀이 아니었다.
분포지를 보니 '각 곳의 산과 들, 낮은 곳 집 근처 울타리나 길가 풀밭'이라고 되어있었다. 그 옛날 들과 산에서 일하다가 끄응 신호가 오면 급한 김에 쓸 수도 있는 풀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 아니었다.
며느리 밑씻개는 삼각형의 잎에 꽃은 메밀꽃 모양인데 잎 가장자리와 줄기에는 작은 가시들이 촘촘히 나 있었다. 그것으로 뒤처리를 하다가는 정말이지 피 보는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며느리가 얼마나 미웠으면.
뭉뚱그려 들국화라 생각했던 것들도 알고 보니 잎과 색, 꽃 모양에 따라 다들 저마다 이름이 있었다.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 해국, 개망초라고. 그러나 또 세분되어서 구절초도 모양과 분포지에 따라 '낙동구절초'와 '바위구절초'로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쑥부쟁이 또한 '가는 쑥부쟁이'와 '개 쑥부쟁이' 갯 쑥부쟁이' 그리고 개미취도 '벌 개미취'라는 게 별도로 있었다. 그 옛날의 조상들은 먹고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냥 들국화라고만 하지 저마다 특징을 살려서 이름을 지어 주다니 그 정성이 놀라웠다.
보고, 또, 봐도 책을 덮으면 그만 어떤 것이 쑥부쟁이였고 어떤 것이 구절초였는지 가물가물해졌다. 천상 가을이 되어 들로 산으로 그들이 지천을 이룰 때 그 때 그들의 몸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면서 관찰해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찾는 우리 꽃>은 전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책이 한 손에 들어가기 알맞게 좁다. 봄, 여름이 각각 한 권이고 가을 겨울이 합쳐서 한 권이다.
지금은 봄이니 '봄' 권을 들고 들이나 공원으로 나가면 어렵지 않게 '아하, 이것이 냉이꽃이로군' '냉이로 된장국은 끓여먹어 봤어도 냉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감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비꽃, 봄맞이꽃, 괭이밥, 별꽃, 씀바귀, 꽃다지, 민들레 등등 무심히 보아왔던 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은이 김태정 박사의 열정이 놀랍다. 그는 아무래도 고산 김정호의 피(?)를 이어 받았지 싶다. 학창시절, 국사 책에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라고만 외워서 시험문제를 맞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양반이 지도를 그리려고 삼천리를 단 '두발'로 누비고, 또, 누볐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런 인물은 역사책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김태정 박사야말로 살아있는 김정호다. 제도권 박사 하나도 부럽지 않고 박사라는 말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백가지> <쉽게 찾는 우리나물> <쉽게 찾는 우리약초>등도 책꽂이에 꽃아 두면 두고 두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소설이나 에세이 등은 한번 읽고 나서 책꽂이에 꽂아두면 바로 관속으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로 두 번 보기가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김태정 박사의 꽃 시리즈는 두고두고 다시 넘기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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