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뜬금없이 고추장을 만들고 싶었다.
하루종일 비는 우중충 내리고 .... 투표는 했으되 희망은 안 보이는 듯하고  에라, 고추장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

실은, 몇년 째 묵힌, 호박을 고아서 엿처럼 만든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봄에는
기필코 처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얼마전 부터 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 된 것이었다.

해서, 호박엿을 붓고 역시 몇년전에 담가서 두고두고 먹고있는 매실액을 넣고
푹 저어가며 끓였다. 8부 능선쯤으로 서서히 끓어오를때 아이들이 뭔가를 부탁해서
얼른 민원해결하고 와보니 글쎄 그새 넘어서 가스렌지 밑을 다 적시고 가스 구멍을 막아서
불도 제대로 안 켜지고....

하여, 이것은 가스렌지 청소 한번 화끈하게 하라는 주문인갑다 생각하고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빨래널고 빨래개고 하다가  졸려서 한숨자고 나니
끓인물이 다 식어있었다.

미리 빻아두었던 고운 고춧가루를 붓고 큰애에게 저으라고 하였다.
고추장 만드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니도 나중에 담아먹어라 해가면서...

고춧가루가 썩이자 너무 뻑뻑해서 역시 먹어줄일이 막연하던 매실주를
두통이나 들이 부었다. 그러자 저을 만했다. 간을 위하여 굵은 소금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몇줌인지 헤아리지도 않고 그냥 뿌려댔다.

그냥 뿌려대도 간이 맞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주부생활 10년에 어느 정도 득도를 한것인가.ㅋㅋㅋ

조청이며 메주가루, 찹쌀가루등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싱숭생숭한 고추장 이었지만
고추장에는 고춧가루가 주인이니  달콤하기만 하면 그 무엇을 넣어도 맛에는 별 상관이 없으렸다.^^

물론 맛이 이전 고추장과는 조금 다르긴 해도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신선하기도 하였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고추장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예전, 일본에서,  월급을 타면 커다란 고추장 한통을 샀다.
크다고 해도 3킬로그램이 아닐까 싶은데...이나라가 물가가 비싸다보니 아마 우리돈으로 치면 3만원은
주었던것 같다.

'아이고오, 고추장 한통에 3만원 씩이나 하다니 간이 떨려서 원~ '하면서도 너무 맛있었기에
다른 날은 못 사먹어도 월급날은 꼭 사서 먹었다.

어떻게 먹었냐하면 밥에 비려서 그냥 먹었다.
밥솥에서 금방 푼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나는 밥에다 고추장 한숟가락을 넣고 비벼먹으면
꿀맛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다른것은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아침도 저녁도 고추장 통의 바닥이 보일때까지 며칠을 그렇게 비벼 먹었다.

최종적으로 고추장 통에다 밥을 한숟가락 넣어 싹 비벼먹고 나면
'흐미, 내일부터는 또 무슨 낙으로 살꼬? 다음 월급날은 도대체 언제여? '하며 청승을 떨었다.

3만원 씩이나 하는 고추장이었기에,
한번은 통크게 사먹어도 두번은 사먹을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기에.

아무튼 그때 느낀 내 소감은 한국사람은 고추장과 쌀만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학창시절에 한국사람은 김치와 쌀만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

......

하여간 고추장은 맛있었고, 맛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맛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봄에 고추장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살짝 알려주자면,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돈나물에 비비는 것이 제일 맛있다.

비빔그릇에 밥을 조금 담고, 돈나물을 밥보다 더 많이 그 위에 얹고,
돈나물 위에 고추장을 크게 한숟가락 떠 얹어서 비벼 먹으면?
봄날의 행복은 그속에 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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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8-04-0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재미있어서 늘 그냥 읽고만 가다가 오늘은 인사 남깁니다.
저는 주부 생활 19년차라도 아직 고추장을 친정과 시댁에서 얻어 먹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늘 읽으면서 미소가 머금어지는 글, 참 좋아요.
님의 글을 읽으니 나도 고추장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네요.
글 잘 읽고 미소까지 얻어갑니다.^^

폭설 2008-04-10 18:2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번 담가 보세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조상들의 슬기 이런것들도 생각나구요.

된장, 간장도 담고 보면 아주 쉬워요.^^
요샌 인터넷이 선생이기도 하구요.

 

올해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만 4년이 지났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 제사를 4번 지낸 것이다. 난 그 4번의 제사에 다 참석했는가? 1번밖에 안 갔다. 아버지 첫 제사 때 간 것이 전부다. 그때는 첫 제사다 보니 아버지로 인해 세상 빛을 본 자식들이 모두 모였고 시끌벅적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제사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회포나 회한이라든가 하는 감정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듯 다들 유쾌했다. 아버지가 워낙 '문제' 아버지셨으니 그립거나 아쉬울 틈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

그럼 두 번째 제사는? 까먹었다.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기일은 잘 기억되지 않았다. 이 날인가, 저 날인가 점을 치다 엄마에게 다시 물어봐야지 하다가, 또 며칠 지나고 나니 아버지 기일은 이미 지난 상태였다.

 

매번 깜빡깜빡하는 아버지 기일, 난 불효자?

 
"세상에 지 아부지 제삿날을 우째 잊어묵노? 돌아간 지 5년이 된 것도 10년이 된 것도 아닌데, 쯧쯧."

"양력으로 돌아가신 그날(2004년 2월 4일 입춘)을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다 보니 음력은 자꾸 헷갈리네. 그나저나 엄마 이참에 계속 모르쇠 하까?"

"몰라."

"엄마도 생각해 봐라. 영감 제사 매번 가고 싶나?"

"그냥 다들 지내니까 지내는 거지. 나도 이번에는 안 갔다. 다음에도 안 갈란다."

"엄마, 그러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오빠 보고 제사 지내지 말라 캐라. 아부지는 그런 것 안 원한다. 살아서도 아들 속을 그리 썩였는데 돌아가셔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을끼라."

"해석도 잘하네. 내는 몰라. 니 오빠가 지내면 지내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엄마가 그러니까 오빠가 감히 결심할 수가 없지. 아부지는 분명 좋은 데 갔다. 내 아부지 돌아가고 한 달쯤 돼서 꿈 꿨을 때 아부지는 고대광실 너른 집에서 대감 모자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유유자적하더라니까. 정말이야.(웃음)"

세 번째 제사 때는 고의적으로 빠졌다. 설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 제사인지라 설에 미리 오빠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세 번째 아버지 기일엔 오빠와 올케 언니에게 미안해서 뒷골이 '땡'겼다. 지나고 나서 조카에게 들으니 오빠가 열두 시까지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와서 참 안돼 보이더라고 했다.

해서 나는 또 오빠에게 이러저러해서 그랬다며 사과의 말과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빠는 마음을 비웠는지, 이해하는지, 아니면 나랑 대화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별 질책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한 출가외인에게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 니 좋을 대로 해라."

말은 그래도 목소리로 보아하니 나름 섭섭해 보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니가 인간이가 짐승이가?"하면서 무섭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할 수도 있을 텐데 오빠 또한 신사적으로 나오니 그냥 내친김에 계속 '개개'기로 하였다.

드디어 올해는 네 번째 제사. 두 번째, 세 번째의 연습이 효과가 있었던지 이번에는 미풍양속(?)을 거역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 아니, 확실히 '굳히기'에 들어갔다. 오빠 또한 '이것들(나와 둘째 언니)이 확실히 세 번씩이나 빠지는 것을 보니 영 구제 불능이구나'하며 체념을 굳히는 느낌이 들었다.

 

매년 아버지 기일은 좋은 일 하는 날

내가 아버지 제사를 안 가고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내게 제일 많이 하신 말은 "착하게 살아라"였다. 비록 취중이었을망정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그 말들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잘하면서 그런 말하면 수긍이 가겠지만 가족들을 괴롭히며 그런 말을 하니 그 말을 듣기조차 싫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그 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간 그 상실의 언저리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우리 인간이 꼭 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말하던 바로 그 '선한 삶'을 떠올렸다.

'옳지, 매년 아버지 기일에 즈음하여 꼭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하자.'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했지만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뿐이다. 다름 아닌 좋은 일 하는 단체에 소액의 기부금을 내는 것. 그동안 아버지 제사 네 번 중 세 번을 빼먹고도 하늘나라 아버지에게 전혀 죄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하늘나라 아버지와의 가상 대화)

 아버지 : 너무 적다. 좀 더 써라. 5만원이 뭐꼬?

나 : 시방 돈 없어요. 일단 시작은 이렇게 5만원부터 시작해서 차차 늘려 가겠심니더.

아버지 : 그래? 한번 믿어 볼까? 내가 다른 때는 몰라도 해마다 2월에는 꼭 점검할 끼이데이.

나 : 알았어요. 다른 때는 몰라도 아버지 기일을 즈음해서는 꼭 그 어딘가에 송금하겠습니다.

 

'기념일 후원'에 '추모 후원'도 넣으면?

 



월드비전 누리집에 들어가면 '기념일 후원'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무슨 기념일을 맞아 자축하면서 후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들의 첫돌이나 생일을 맞아서, 혹은 결혼 몇 주년 기념으로, 또 아니면 병원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퇴원 기념으로 감사한 마음에 내는 후원이다.

난 제사 대신 '추모후원금'을 자신이 좋아하는 단체에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분의 삶과 성향에 맞는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정의롭고 공정한 것에 무게를 두고 사신 분이라면 아름다운재단 '소금창고기금'에다 추모 후원을 하면 될 것이다.

기아에 대해 유난히 마음 아파하신 어른이라면 세계의 굶주림을 돕는 재단에, 노인 분들에게 애잔함을 드러내신 분이라면 노인복지 재단에, 반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면 아동복지 재단에, 또 아니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이었다면 문화예술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단체에 등등, 추모후원을 할 곳은 수두룩하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를 가족 안에서만 음식을 하고 제를 올린다면 가족끼리만 추모의 정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식으로 생전 고인의 삶과 뜻이 비슷한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추모의 마음은 가족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지게 될 것이다.

오래된 전통이기는 하나 '제사'는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원래의 그 좋은 뜻도 빛을 바래 '형식'만 남았다. 물론 아직도 제사가 가족의 화목을 도와준다면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제사가 들어 있는 달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한 게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고, 도망가고 싶어진다면 과감히 그 무거운 형식을 털어버리자. 대신, 형편에 맞게 부담도 없고 알맹이만 남는 '추모 후원'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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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똥꽃>(그물코)을 읽었다. 그전에, 얼마 전 <인간극장>에서 방영한 저자의 여든 노모 모시는 광경을 본적이 있다. 여든 중반의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를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지 아니 21세기에도 저런 효자가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한량으로 살다가 8남매와 빚을 남기고 일찍 돌아간 남편을 대신해 평생 일에 묻혀 사시다가 그 자식들 다 크고 저마다 살길 찾자 이제는 몸도 늙고 치매도 오고.....공동 저자인 김정임 할머니의 고단한 여든 중반 평생에는 그 나이 대 할머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내 엄마(82세)도 시집살이와 우리들 키울 시절에는 항상 잠이 부족하여 잠 한번 크게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하였던가. 보리밥이나마 밥 한번 원 없이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하였던가.

‘하루 종일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면서도 삼 세끼 밥을 하고, 방아 찧어 쌀 만들고, 한밤에는 베를 짜고 옷을 짓고, 베틀에 앉아 잠깐 졸았나 싶으면 어느새 닭이 울고....’ 엄마는 지금도 그 시절 얘기 할라치면 ‘아이고오’ 앓는 소리를 내는데 그 ‘아이고오’ 소리는 울 엄마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네.

<“아만 보듬꼬 젖 멕일 쌔가 어딘노. 등에 업고 쇠죽 끄리믄서 겨드랑 미트로 돌려서 젖 물리고 쇠죽 뒤직이믄 김이 올라와서 숨은 막히고 아는 울고, 아이고오, 오줌이라도 싸믄 그것 치울 쌔도 엄씨 밥해야지.”

“미역국은 커녕 무시국이라도 한 바내기 먹고 싶었지만 누가 끄리주노. 호박잎 국밥이 먹고 싶었는데 간네띠기가 한 그릇 각꼬 온 것 너거 아부지가 홀딱 닦아 먹어 삐리고 나는 팥잎 국밥 건더기 건져 먹었다가 가슴이 쪼개지는 거 가태서 숨도 못 쉬고... 아이고오.”

“너는 날 보믄 맘 상할 끼고 나도 너 고상하는 거 보믄 맘 상하고. 내가 가기 전에 개 한 마리 사다가 너 꼬아주고 가야 될 낀데 아이고오, 오찌 될랑고. 입그라, 응? 곧 추워지는데 따시기 입거라.”-본문 213, 214, 224>

신산스러웠던 지난날에 대한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김정임 할머니의 말투가 어찌나 재미있고 톡 쏘는지 슬퍼 울면서도 웃음이 났다. 보아하니 아마 저자의 글발도 엄니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닐는지. 

아무튼 저자의 어머니는 감옥살이 같던 도회생활에서 효자 아들 덕분에 하늘도, 땅도, 자연도, 공기도, 꽃도 모두 다시 찾았고 건강도 많이 회복 되신 것 같아 축하드리고 싶다. 

 
그러나, 효도만으로는 어려운 게 노인 복지의 현실

 
♣ 사례1: 나의 큰외숙모는 아마 20년도 더 되었지 싶다. 무엇이? 치매가. 내왕이 없어 그 얼굴이 가물가물하지만 외사촌 올케언니를 생각하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진다. 외사촌 오빠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며 시모 간병을 20년씩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효부 났다는 칭찬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 사례2: 남편의 고모는 당뇨, 신장병, 그리고 치매 등을 앓고 계시는데 고모의 며느리는 10년째 고모님을 돌보고 있다. 울 어머님은 ‘정말 며느리 한번 잘 들였다.’ 하면서 칭찬이 자자하지만 난 나와 같은 동년배인 그분이 나와는 다른 결혼 10년을 살았다는 것에 역시 억장이 무너졌다. 

올해 86세인 어머니를 저자는 1년째 모시고 있지만 그전에 8남매의 맏며느리인 저자의 큰 형수님은 20여년 모셨다고 하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서울하늘에서 20여년 시모를 모신 그분을 생각자니 역시 가슴이 아팠다.  

저자의 어머니를 향한 지극정성은 백번 칭찬받아 마땅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저자의 경우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경우이다. 우리 같은 속물들은 저자 같은 사람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나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도시에서라 하더라도 그렇게 살갑게 모실수가 없다.

도시에서 역시 86세의 노모를 3년째 모시고 있는 한 지인은 우울증이 와서 한동안 무척 힘들었다고 하였다. 이러다 내 먼저 가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모시지만 자꾸만 한계에 부닥친다고 하였다. 

 “시모를 모시는 데는 기약이 없잖아요.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 기한이 딱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매일 돌아가시라고 기도 할 수도 없고 말이죠.” 

 
효도보다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노인의 삶을 보장해줘야   

저자가 행한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도는 가깝게는 7,80년대의 우리네 며느리들이 다 한 것이다. 멀게는 이씨 조선 500년 역사가 효를 근본으로 삼았기에 다들 그렇게 효도를 하며 젊음을 불살랐고, 늙어지면 이제는 반대로 자식들의 효도를 받음으로써 ‘보상’받았다. 

그렇게 늙어서 보상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아니 늙어서 보상 받는 다기 보다 늙어서 ‘복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추 당초 맵다지만 시집살이 웬 말인고...’ 그저 나온 게 아니다. 갖은 설움을 이겨가며 시부모 봉양을 잘하고는 나중에 화병이 도저 이제는 반대로 가해자가 되어 며느리를 달달 볶으며 늙어간 게 우리네 선배 아낙들의 삶이었다. 

그런 식으로 억지효도가 반복되다가 시대가 가파르게 변하면서, 나름대로 먹고 살만해지면서 우리네 며느리들도 ‘배 째라’가 된 것이다. 저자는 본인의 ‘의지’로 어머니를 모시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마음은 애 저녁에 떠나도 ‘어쩔 수 없이’ 병든 부모 혹은 시부모를 수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나.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부모를 몇 십 년이고 수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말이다. 또 장기간의 노인 수발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다. 다른 엄마들은 수영 가네, 살 빼러 가네, 혹은, 뭐 배우러 가네, 하며 나름의 취미생활을 하며 사는데 자기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수발하다 세월 다 보낸다면 얼마나 우울할 것인가. 

때문에 주장하노니 울 나라도 이제 노인복지를 국가에서 책임져 달라. 노인의 불행은 노인 한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불행일수도 있다. 노인의 삶이 안정되어야 가족의 삶도 안정되고 가족이 건강해야 나라도 건강해지는 것이다. 

세금이 문제라고? 그러니까 상황설명 확실히 하고 당당하게 세금을 거두면 누가 말릴 것인가. 가까운 일본의 경우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시절에 전 국민 개호보험이 통과된 것으로 안다. 그 안에 노인수발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음은 당연한 거고. 지난핸가 교육방송에서 보니 2000년에 시작된 그 제도가 이제는 안착이 되어 너무도 잘 굴러가고 있어 한없이 부러웠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지난해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국회에서 통과 되었고 올 7월 부터는 시행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혜 폭이 아주 미미했다. 대략 3%의 65세 이상 노인 분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이름만 그럴듯하지 먹을 게 하나 없다. 제도를 보완해서 아니, 민주노동당이 말하던 대로 전 국민 ‘무상의료’가 되게 세금 좀 많이 거뒀으면 좋겠다. 

 
마무리.....

사실 지금 시아버님이 병원에 입원중이다. 뚜렷한 역할을 못하면서도 며느리들은 마음이 무겁고 아들들은 자주 연가를 써야하니 회사에 눈치 보이고 몸도 고달프다. 시어머님은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됐지 이젠 병구완까지 시키나’ 싶으니 우울하시다. 

처음엔 약 3주라고 했으나 별로 차도가 있지 않아 입원기간이 연장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열흘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추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비교적 짧은 기간임에도 다들 힘들어 하는데 장기간 수발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세상 그렇게 불공평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하여, 결론은, 내 생각은 그렇다. 세금 얼마든지 낼 테니 제발 노인 분들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실 방안 마련 좀 해 주시라, 국가는.  무늬만이 아닌 실질적 혜택이 ‘팍팍’ 돌아오게 제발 세금 좀 많이 거두시라. 국민들이 협조 안하면 협조 안 한다 하지 말고 홍보 좀 하시라.

아주 내 가심이 탄다, 아이 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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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사람 2008-04-0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같은 마음으로 가슴이 타네요... 허궁~~

폭설 2008-04-01 20:12   좋아요 0 | URL
차츰 좋아지겠죠? ^^ 하여간 개인에게 맞기면 노인불들만 더 힘들어지게 되니
우리도 제도 보완이 확실히 되어 노후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지역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아니, 지나가다 간판을 보면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태권도 학원들의 경우 그들만의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다름 아닌 무슨무슨 태권도 학원 글자 밑에 ‘00대 체육학과 동문’이라든가 ‘00대 유도학과 동문’이라는 말이 꼭 있다. 아니면 ‘전 국가대표선수 출신이 운영’ 하는 학원이라는 부연설명이 꼭 있다.

반면 음악학원이나 미술학원의 경우는 학원 이름만 있지 ‘00대 출신’이라는 말이 없다. 다른 교과학원도 현수막으로 ‘00대’ 출신 선생이 있다는 말은 있어도 간판에 그것을 병기하는 곳은 별로 못 봤다. 유독 태권도 학원만이 그러한 문구를 새겨 넣는 것 같다.

물론 가끔은 그런 과시문구가 없는 태권도 학원도 있다. 그러면 ‘저 학원 사범님은 아무 대학도 안 나왔다는 말이가?’ 하면서 나도 모르게 선입견을 갖고는 화들짝 놀랄 때도 있다. 아마 그런 생각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00대’출신 이라고 노출하면 확실히 장사가 좀 더 될 것이다.

더 되다 뿐인가. 이젠 태권도 학원의 경우 그런 문구 하나 없으면 아무리 태권도를 잘 가르쳐도 학원생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아 뵌다.  아닌 게 아니라 아는 분의 형님은 몇 십 년 동안 태권도 학원을 운영했는데, 때문에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수법은 나름대로 통달을 하였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태권도 학원들이 다들 ‘00대 동문’이라는 문구를 학원 간판에 넣으니, ‘아무’대 동문도 아니던 그 역시 할 수 없이 인근 체육대학에 편입하였다. 해서 2년 동안 배우는 척 시간을 보내고 돈을 들여 겨우 ‘00대 동문’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 웃지 못 할 일을 연출했다.

물론 태권도 학원을 여는 분들은 자신이 ‘00대 출신’임이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너도 나도 나는 이 대학 출신 너는 저 대학 출신 대한민국 태권도 학원모두 각자 자기 출신 대학을 밝히면 희소가치가 없지 않나?

태권도 힘 있게 잘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호연지기를 심어주면 되지 ‘00대’ 간판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혹 실력이나 사범으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보니 간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00대 출신’이나 각종 대회 수상 상장이나 상패 등은 학원 사무실에 비치해 두고서도 얼마든지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태권도를 좋아한다. 외국인들이 태권도를 배울 때 ‘원, 투, 쓰리’가 아닌 ‘하나, 둘, 셋’ 을 말하며 동작을 하는 것이 신기하고도 뿌듯했다. 하여간, ‘00대 동문’ 간판을 달지 않고도 태권도를 ‘빛나게’ 가르치는 태권도 학원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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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모처럼 아이들이 일찍 자서 느긋하게 여러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헐리웃 연예가 뉴스를 보게 되었다.

이게 예전것 재방송인지 아니면 실시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너무도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수술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향년 54세......

 

순간 어찌나 섭하든지... 아니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숟가락을 놓을 수도 있는것인지...

영화감독 나이 54세라면 이제 바야흐로 그간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작을

만들어낼 나이인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그 감독은 이 반도의 소도시에서 자신의 영면을 슬퍼한 아짐이 있다는 것을 알꺼나....

<잉글리쉬 페이션트> < 콜드 마운틴> 그리고 보지 못한 <리플리>..... 밍겔라 감독은

이 세 영화로 내 기억속에 영원할 것이다.^^

 

어제 2008년 3월 26일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죽음을 전해 들은 날이고

100년에서 2년 못 미치는 그 옛날, 1910 년,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사형당한 날이다.

아침신문에서 98년전 안의사의 담담한 편린을 읽고 눈시울을 붉혔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게되니 죽는 것 가지고 너무 슬퍼마라' 고 말하시던데....ㅠㅠ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큰일을 이행할 경우

손없는 날이라 정해진 날들에 연연하지 말고 어제 같은날을 잡으시라.

3월에 이사갈거면 안 어빠 돌아간 26일을 할것이고

4월에 뭔일을 할라치면 4월 19일 혁명일이나

윤봉길 의사 홍고우 공원에 폭탄던진 4월 (29일?) 에 뭔 일을 하시라...

 

그러면 윤어빠, 안어빠는 목숨도 버렸는데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을 몬 참아서

이 난리가 하면서 반성하게 된다....^^

 

하여간 어제는 잊을수 없는 날이었다.

백범일지를 보면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 세사람의 인품과 결의가 손에 잡힐듯 느껴진다.

이 셋을 아우르는 김구선생은 두말할것 없고....

 

문득생각해보니 백범일지는 작년엔가 읽었어도 백범의 '문화'로 부자가 되라는

말씀은 나도 모르게 지키려 애를 썼다는 생각이.... 20대부터...^^

 

어쩌다, 안소니 밍겔라에서 김구로 빠졌다니...

아무튼 위에 언급된 모든 분들 존경하고 '문화'를 느끼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기를~~~ 신입생 밍겔라 감독은 하늘나라 적응 잘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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