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주 화초에 미쳤던 적이 있었다. 꽃집이란 꽃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구경을 했고 이름 모를 화초를 발견하면 집에 와서 책을 뒤졌다. 책에도 없으면 사진을 찍어 꽃에 관한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 문의하기까지 하였다.

지금은? 내게 언제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게 화초에 덤덤하다. 화초 이름도 반절은 까먹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지난 겨울엔 베란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화초들에게 아무런 ‘방한복’도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통고하였다.

“너희들, 이번 겨울에 알아서 살아남으면 내년 봄에도 거둬주고 스스로 못 살아남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여. 알겄냐?”

화초고 사람이고 강하게 키워야 살아남는지, 한 해 더 전에는 보온을 해줘도 죽더니만 지난 겨울에는 아무런 조치를 해주지 않아도 다들 살아주어서 보호자로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화초에 대한 이즈음의 내 마음은 그냥 10년 묵은 친구처럼 새로울 것은 없고 그저 덤덤하였다. 없으면 안 되나 떨림 증상은 전혀 없었다. 그랬는데, 아이들 방에 놓을 화초가 없어 간만에 꽃집엘 들렀다가 다시금 내 마음에 불을 댕기는 풀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 스파티 필름 잎이 얼마나 넓은지 우아하기 이를데 없어...^^
 
스파티 필름

아, 바람(?)이 이렇게 해서 나는 것일까? ‘더 이상의 떨림은 없어’ 마음이 확고했는데, 눈앞에서 너울거리는 넓고 푸른 잎을 가진, 같은 화초 수십 개를 동시에 바라보자니 '쌔앵~' 잠자던 바람기가 확 도졌다.

자세히 보니 신품종 ‘스파티 필름’이었다. 기존에 봐 왔던 스파티 필름은 잎이 좁았고 좀  넓은 것이 있기는 했으나 이처럼 넓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 봄 꽃집의 여왕이라면 단연 이 스파티 필름이 아닐까 싶은데, 내 눈에만 그런가?

 


  
▲ 스파티 필름 가격은 7천원이었다.^^
 
스파티필름

하여간 이 스파티 필름 덕분에 스파티 필름 뿐 만 아니라 다른 화초들까지 다시금 좋아졌다. 해서 수시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주고받는다. ‘어여, 내 마음이 느껴지니?’ 하면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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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우리 시대와 나눈 삶, 노동, 희망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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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한길로만 쭉 걸은 사람이 있다. 음악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연극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 상담을 하면서 30년을 한 결 같이 달려온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하 종강. 나는 이분의 이름을 떠올리면 먼저 이유 없이 믿음이 간다. 그리고 이분의 글을 읽으면 매번 짠했고 때론 단 한 문장으로도 눈물이 났다.

 지난 두해, 신문을 읽다가 가끔 눈물이 쑥 빠질 때가 있었는데 그 원인제공자의 8할은 하종강 이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노동자를 향한 그의 마음 씀과, 그가 소개하는 노동자들의 사연이 애 닳아 마음만 찡한 게 아니라 눈물까지 흘러내리고는 했었다. 

 그는 왜 문화 예술처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에 30년 동안이나 열정을 바쳤을까. (때문에 과로가 쌓이고 쌓이다 결국 두 달 동안 꼼짝없이 드러눕는 바람에 이 책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 출판)가 나오게 되었다지만.)

<고백 하건데, 나를 지켜준 사람들은 상담소에 찾아오는 노동자들이었다. ‘내가 오늘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하룻밤을 새면, 해고당하거나 몸 다친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그 혹독한 시기에 나를 구원했다.>-본문 352쪽


그랬다. 그는 참치 잡이 외항선원의 억울한 사연을 접하고 몇 시간에 걸쳐 정성껏 서류를 다 작성한 후 마지막으로 출력하려던 순간. 그 외항선원이 뒤늦게 아주 결정적인 증언을 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서류를 작성하였는데, 그런 수고쯤은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새벽 첫 차를 타고 갔다가 심야버스를 타고 오기도 하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토막잠을 자가며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이 책에 나오는, 저자가 만난 많은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들 또한 자신들의 안일한 삶보다 잘못된 노사관계를 바로잡고 노동자가 웃으며 사는 세상을 위하여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모진 탄압과 해고 속에서 때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아직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하고 있었다.  

노사관계, 학교에서 가르치자.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제도권 교육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으로 노동문제를 가르친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정규 수업에서부터 노사관계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모의 노사교섭이 일상화한 특별활동으로 잡혀 있어 일 년에 여섯 차례 정도 모의 노사교섭의 경험을 쌓는다. 교과서에는 노사관계를 ‘인간이 사회에서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과정 이전에 노동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학습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는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몇 달 동안이나 학습하고 토론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로 평생활동해도 배우지 못할 만큼을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깨친다.>  -본문 317쪽 

위의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고등학생도 아닌, 초, 중등학생들에게도 미리부터 노사관계에 대해서 가르친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교육을 안 시키니 대학생이 되어도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일단 드는 생각이, 시민들 불편하게 하고 나라경제 말아먹는다만 떠오를 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었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것을 보도하는 신문, 방송 기자들도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였네. 뿐인가, 자칭 모 일류기업은 아직 노조, 하다못해 어용노조 조차도 없는데, 이게 다 무식해서 용감하다 못해 우리사회의 ‘거악’이 되어버렸구나.

정말 갈 길이 멀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30년 동안 노동법 우려먹고 산 저자와 같은 전문가의 말을 듣고 좀 쉽게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해주고 노동자 복지를 향상시켜주면 안되는지. 노동자의 피나는 투쟁과 희생이 있고 난 다음에야 겨우 한 발작 움직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아무튼 이 책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또 노동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짠하게 녹아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좀처럼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노동자가 살만한 세상을 위하여 위에 언급된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초, 중등에서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정당의, 제대로 된 국회의원부터 뽑았어야 되었는데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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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2008-05-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종강입니다. 제 책보다 서평이 더 감동적입니다. 고맙습니다.

폭설 2008-05-05 22:27   좋아요 0 | URL
어머나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저도 고맙습니다.^^
 
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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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가 본 곳은 앞부분에 나온 일본 뿐이라 일본에 대한 부분은 감이 오는데

다른 도시들은 정말 그럴까이? 의문만 생겼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이야?

나는 언제쯤 그러한 도시들을 훨훨 한번 날아보나?, 한번 밟아보나?

 

이런 여행담을 읽으면 내 신세가 꼭 세장속에 같혀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다 용기가 없어서 못가는 것일텐데 나는 용기아닌 현실이 내 발목을

잡는 다고 생각한다. ... 하긴 현실도 한 몫하겠지만..

 

고종석. 쌍팔년도 한겨레 기자시절에 글잘 쓴다고 친구가 그 이름석자를

내게 알려주기에 그런가? 하며 유독 그 이름을 기억하는데...

세월이 지나니 또 고종석, 우리말을 잘 아름답게 살려쓴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역시, 옛날의 명성이 세월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구나 했는데...

 

이책을 읽고보니 어째 이제는 그 약발도 다 된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글쎄.... 이 책의 글은 어느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묶었나 본데... 글의 내용이 일기같다.

정제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한번도 퇴고없이 그냥 생각나는대로 그대로 적은 듯하다.

왕년의 기자답게 문장을 좀 다듬고 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책을 읽고서는 이분이 우리말을 아름답게 쓴다고 칭찬받는 그분 맞나 싶어진다.

저으기 실망스럽다. 

그렇기는 해도, 

죽기전에 남의나라, 남의 도시들을 될수있는한 댕겨보도록 노력하면서

살어야지 하는 꿈은 꾸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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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우리말 바로쓰기에 대한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자주 추천이 되는 고 이오덕 선생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다. 왜냐면 알면서 실천 안 하기는 뭣해서 버텨보는 중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을까봐 무서워서 못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언어(지방언어, 토박이말, 혹은 폄하해 사투리)를 좋아한다. 내 지역 언어뿐만 아니라 타지역 말도 매력 있어 한다. 표준어는 뭔가 재미가 모자란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박이말을 화끈하게(?) 써 줘야 쓰는 맛도 있고, 듣는 맛도 있고, 읽고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조정래 선생이 그의 역작들을,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서울말로 썼다고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밥맛이다. 그렇다고 표준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표준어는 표준어 나름대로 존재의의가 있다. 각 지역 말을 이쪽저쪽으로 통역해주는 공통분모 말로써 말이다.

 

특정 전라도 말을 강원도 말로 통역해주면 강원도 사람만이 알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어로 통역해주면 모든 지역사람들이 다 알아먹는다. 하여간 표준어고 지역 말이고 다 있어야 되고 표준어, 지역어는 둘 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든 '한글(훈민정음)'이 변화 발전하여 오늘에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5백 년 동안 지배층들이 한문을 숭상하며 지속적으로 한글을 배척했는데도 오늘날까지 가열차게 살아남은 한글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감동스럽다. 내가 이 한글에 대한 느꺼움을 가슴깊이 새기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배우면서이다.

 

십여 년 전,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문득 '내가 한국인임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라는, 나도 모르게 내 주제를 그리고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한 가운데 떠오른 것이 다음이다.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신라면, 그리고 한글.

 

한글 빼고는 죄다 먹는 것이라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인간 같아 뭐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위 여섯 가지는 이미 내 몸속에 ‘인’이 박혀 씻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내가 아무리 이탈리아 국수와 빈대떡을 좋아해도 이탈리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내가 한국인임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한국인이란 게 싫었냐고요? 천만에. 예전엔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별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을 배워보니 나는 정말 한국인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서방세계 사람들은 당연한 듯 우리가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쓰는 줄 안다는데 그게 아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아일랜드처럼 독립은 했는데 말을 다 잃어버렸다면 그 원통함을 어찌했을 것인가. 헌법상에만 아일랜드어가 명시되어 있고, 실지로는 모두가 영어를 쓰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싶다. 그런 만큼 우리말을 지켜온 선조들이 고맙다.

 

너무도 오염된 한국어

 

그런데 요즘 활자로 된 글이 건 방송에서의 말이건 우리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외국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을 볼 때면 아찔하다.  외래어야 할 수 없다 쳐도 신종 외국어를 마구 남발하는 것은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러한 말들은 누가 퍼트리는가 생각해보니 범인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먹물'들이 외국어를 많이 끌어다 쓰는 것 같다. 프랑스 갔다 온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독일어권에서 배운 사람들은 독일어를, 미국 갔다 온 사람들은 미국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요새는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예사롭게 남의 나라말을 걸림 없이 쓰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포도주: 요샌 활자화 된 글을 읽을 때면 '포도주'라는 말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죄다 '와인'이라 한다. 포도주 대신 와인이라 하면 맛이 더 '땡기'시는가. 나는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에서 '와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발견할 때면 소름이 끼친다.

 

상표·상품(명): 요샌 이 말도 안 보인다. 역시 신문이고 방송이고 모두들 '브랜드'라고 한다. 새 브랜드를 출시했네 어쩌내 하면서.

 

깨끗한 선거: 내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인데 시민 단체들은 그동안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쳤다. 나 참, 이말 처음 나왔을 땐 뭔 말인가 싶어서 인터넷에 뜻을 물었다. 그냥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 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이라고 하면 5천만이 알아먹을 것인데, 40대인 나도 모르는 것을 나보다 나이 많은 윗세대들은 어찌 알 것인가.

 

어린이: 요샌 이 말도 간당간당하다. 학교 앞은 스쿨존이요, 어린이옷은 키즈 룩이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 이름에는 '노블 키즈'가 있고 놀이터로는 '키즈 정글'이 있고 학원으로는 '키즈 영어'학원이 있다.

 

고상한 분들이 주로 쓰는 말들도 한번 볼까. '노마드', '멘토', '트라우마'.

 

멘토와 트라우마는 몇 년 전부터 부쩍 쓰더니 요샌 '조언자'라고 하면 조언이 안 되고 '트라우마’라고 하지 않으면 깊은 '내적 상처'가 표현이 안되시는가.  그리고 '노마드'라 하지 말고 '유목민'이라 해도 충분히 자유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한글 잡아먹는 '신종마약'들을 퍼트리는지. 

 

이런 마약들은 너무 많다. '문화와 아비투스(습관)', '디아스포라(이산자, 떠돌이)의 눈', '볼런티어(자원봉사) 활동', '웜비즈(따뜻한옷)', '쿨비즈(시원한옷)'등등 신문 한 장 펴들고 이 잡듯이 형광색으로 물들이자면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말이 없어서 그냥 쓰는 말이라면 할 수 없지만 읽어보면 우리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애써 '새파란' 영어를 끌어 쓰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보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똘레랑스'는 홍세화씨가 책임(?)지세요.)

 

만고의 진리, 우리말을 살려 써야 외국어도 잘한다

 

나는 우리말만 잘났고 외국어는 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말이 아름다운 만큼 비교할 수 없이 다른 나라 말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히라가나의 흘러내림을 보라. 그냥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물결치는 것 같다. 한자를 보라. 어떻게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어도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뜻을 모아 또 다른 말을 파생시키는데도 어찌 저리 철학적으로 만들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어도 마찬가지. 영화 속 멋진 배우가 혀를 도르르 말아가며 의미 있는 대사를 읊조리면 정말이지 '영어의 바다에 빠지고 싶다.' 이들 말 뿐 아니라 내가 모르는 무수한 다른 나라말들도 아마 한글이 가진 역사성만큼이나 오랜 풍화작용 끝에 살아남았을 것이기에 존중하고 싶다.

 

백기완 선생은 그토록 보편적으로 쓰이던 '서클'이라는 말을 '동아리'로 산뜻하게 바꿔 놓았다. 때문에 요샌 대학에 동아리는 있어도 서클은 없다. 서클이라는 말의 존재를 모르는 새내기들도 많을 것이다. 선생이 퍼트린 '동아리'와 '새내기'처럼 지식분자들이 생각 없이 외국어를 끌어들이지 말고 작심하고 우리말을 살려 쓴다면 제2, 제3의 동아리, 새내기는 무수히 새끼 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가 장정일씨는 어느 글에서 <한겨레>에 독자투고를 하면 자신이 쓴 말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감쪽같이' 바른 우리말 문장으로 바꿔줌에 찬사를 보내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수년전 독자투고 글이 좀 길어 조금 줄이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내가 쓴 군더더기 말들을 솎아 내고 정말 감쪽같이 깨끗한 문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한겨레> 기자가 달리 <한겨레> 기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자 다 어디로 갔는지. 외래어는 그렇다 쳐도, 외국어들이 너무 난무한다. 아주 외국어들을 외래어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나마 우리말을 살려 쓴다 맹세한 신문까지 이러니 다른 신문들은 오죽하랴.

 

물론 나도 반성한다. '브로크백 쓰나미'란 말을 쓴 적이 있고 '금요일 밤, 세 감독의 아우라' 어쩌고도 했고 그리고 '어감'이라는 말 대신 '뉘앙스'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제부터는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한두 번 썩어 쓸지언정 글로는 위의 말들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이미 쓰여 지는 외래어라면 몰라도 새로 끼어드는 외국어는 사양하겠다.

 

하여간, 대운하 없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말이 오염되는 것 또한 반대한다. 대운하가 우리에게 줄 피해만 큰 게 아니라, 외국어(특히 영어)가 우리 말(영혼)에 주는 피해도 심각하다. 제발, 너도나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말 살려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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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퇴행’. 이수광 이우학교 교감은 어느 글에서 ‘배움의 퇴행’이라는 말을 했는데 몹시 공감이 갔다. 그는 배움의 퇴행을 일러 ‘쓸데없는 것을 과잉 학습하는 과정에서 정작 배워야 할 내용들을 등한시한 나머지 자신의 성장 동기를 상실하는 부조리’라며 깔끔하게 정의하였다.

 

더 보탤 것도 덜 보탤 것도 없이 정곡을 찌르는 정의다. 요즘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하고 있는 반복학습이야말로 ‘배움의 퇴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 청소년들이 우리 어른들 보다 기억력이 좋은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기억력이 좋을 때 공통으로 배우는 것은 정규 수업시간에만 하고, 집에 돌아와 나머지 시간엔 각자 몰입 할 수 있는 곳에 시간을 쓰도록 해야 될 텐데 너무 안타깝다.

 

나는 지금 초등 3년인 내 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면 이런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하며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입시교육의 문제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만약 후일 내 아이도 ‘야자’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하는 것 그 시간을 최대한 슬기롭게 ‘견디다’ 오라며 나름 조언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잠을 허용하는 선생님이 감독이라면 그냥 ‘엎드려’ 자고, 책을 보게 하는 선생님이라면 책을 보고, 문제만 풀어야 된다면 피할 수 없으면 그 자체를 즐기는 방법도 있다,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되어가는 양을 보니, 부모인 우리만 성적에 목매지 마라 해서는 아이가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일을 우쩌? 계속 이런 식이면 고교 3년 다 못하고 검정고시로 건너뛰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아이 스스로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변에 동화되어 줏대 없이 경쟁에 ‘불붙어’ 버릴까 그게 더 두렵기도 하다. 그리하여, 점수 몇 점에 울고 웃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은 ‘배움의 퇴행’이라는 지름길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때문에, 주장하노니, 우리 학생들이 ‘배움의 퇴행’으로 접어들지 않게 교육당국은 한시바삐 아침 자율학습과 저녁 ‘야자’를 없애 주길 바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해서 7시 30분 까지 학교 도착하고, 밤 10시에 마치고 11시 다 되어 집에 돌아온다는데. 이게 도대체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권 할 짓인가 말이다. 이는 명백한 학대다.

 

그리고 부모들이여! 눈 있고 귀 있으면 다른 나라의 교육 풍습도 좀 보고 배웁시다. 우리식이 아닌 다른 교육 선진국 식으로 해야 아이들의 창의력이 솟구친다는데 왜 그러한 것들은 본받으려 하지 않는지. 다른 것은 잘도 따라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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