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김장을 하였다. 작년엔 30포기쯤 했는데 올해는 배추를 헤아려 보니 40포기였다. 그러고 보니 ‘김장독립’ 한 지 이번이 세 번째이다. 3년 전 처음으로 김장을 홀로 할 때에는 혹시나 망치면 어떡하나 싶어 비장하기까지 했는데 세 번쯤 되니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다.

이젠 30, 40포기만이 아닌 경우에 따라서는 100포기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가을배추로 하는 김장은 배추가 달아서 고춧가루와 젓갈, 마늘만 넣고 버무려도 맛이 난다. 때문에 초보자라도 망치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에서 김장하는 방법을 프린터 해서 몇 번 읽고 시작하면 콜럼버스의 달걀세우기 보다 쉽다.

아무튼 이번 김장은 지난 일요일 오후에 시작해서 월요일 점심때쯤에 끝냈기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만큼 개운하기도 했고. 그런데 너무 급하게 새벽잠을 설쳐가면서 까지 부산을 떨어서 그런가 월요일 저녁이 되니 손목이 시큰거렸다.

산 후로  한 번도 갈지 않은 칼로 배추 40포기와 무를 자르고 씻고 썰고를 간만에 그것도 마라톤 기록 세우듯 빨리하다보니 생긴 부작용이었다. 해서 뜨듯한 전기장판에 손을 지졌다. 지지면서 생각하기를 젊은 나도 이런데 60대 나이 드신 어른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0대쯤 되신 어른들은 대게 며느리와 딸 합쳐 두셋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며느리와 딸이 김장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 연말에도 필시 100포기 이상의 김장은 하였을 것이다. 요새는 김치냉장고들이 다 크고 또 젊은 사람들도 김치 욕심이 많아서 어쩌면 100포기 이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나는 40포기를 해도 손목이 시큰거리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100포기 혹은 그 이상의 김장을 한다면 필시 김장 후 몸살이 나실 것이다. 때문에 주장하는바 김장은 각자들 하자.
각자하는 것이 재미없고 싫다면 마지막 공정인 버무리는 단계에서만 얼굴을 내밀게 아니라 배추를 뽑아서(혹은 사서) 자르고 절이고 씻는 단계, 그리고 양념 만드는 것 까지 함께하자.

그렇지 않은 젊은 주부들도 있겠지만 대게 마지막 단계에서 합류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아니면 요샌 택배가 발달해 있으니 어른 혼자서 김장을 하여 깔끔하게 포장해서 택배로 부쳐 주는 것도 더러 보았다. 아들 딸 결혼시키고 몇 년은 그것이 행복일수 있겠지만 10년, 20년 한 결 같이 재미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 어느 총리는 어머니가 원하니 효도차원에서 매일 저녁 퇴근했을 때, 어머니가 발 씻어 주겠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지만 그것은 지난 시대에는 미덕일지 몰라도 오늘날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아무리 김장 해준다고 해도 어머니가 기뻐하시니 어쩌고 하면서 그 김치 날름 받아먹는 일을 이제는 좀 자제해야 되지 않을까. 또, 노인 분들도 이제는 자식에게 김장을 해 주면서 삶의 작은 기쁨을 느낄게 아니라 다른 무엇에서 그것을 찾아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젊은 주부들, 웬만하면 이번에 김장독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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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혼들을 보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해도 막상 결혼생활을 매끄럽게 해낼 준비가 안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생활적이든. 그리고 부모와 함께 사는 일이 지긋지긋해도 결혼하기 전 까지는 같이 사는 게 ‘유종의 미’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

정말 결혼이 하고 싶으면 결혼하기 전에 집을 나와 독립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것 같다. 특히 홀어머니를 두고 있는 막내아들의 경우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이 나름의 효도이기도 하기에 그 울타리를 박차고 나올라 치면 일명 불효가 되기에 여간 용감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멀리 보자면 그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 옳다. 어머니 쪽에서도 ‘그래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내 손으로 따뜻한 밥 멕이고 싶은 정’을 일부러라도 떼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른은 애저녁에 훌쩍 넘고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들을 두고 있는 어머니라면 더더욱 그렇게 할 일이다. 그때껏 자식이 밥 할 줄을 모르면 속성으로라도 가르쳐 ‘쫓아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 되도록 밥도 못하고 손수 양말도 하나 안 빨아보고 직장생활만 한다면 그런 사람은 결혼해서도 문제다. 

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

그런데, 비단 그러한 것은 남자에게만 국한 된 것도 아니다. 주변에 보면 30대 초반의 여성이라도 일단 직장생활을 하면 집에 와서는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먹고, 입고, 자는데 불편 없는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소위 그 여성의 부모들이 달리 마땅한 일도 없으니 딸내미 시중드는 것을 노년의 소일거리로 삼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야 저것을 빨리 좋은 사람 짝지어 내 보내야지 하면서도 계속 빨래해주고 밥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결혼하길 바란다면 딸 자식도 마찬가지로 내 손을 떠나게 해서 제대로 ‘일상생활’을 먼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무조건 결혼하면 내 보낸다며 미루고 계속 집에서 ‘빈대 치게’ 받아주고 하다보면,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을 보자면 그 딸의 마흔도 순식간에 다가온다. 

서른에는 좀 있으면 시집가겠지 해서 그때까지만 데리고 있자 하다가 서른다섯 되고, 늦어도 1,2년 안에는 가겠지 하며 또 뭉개게 놔두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마흔이 덜컥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식나이 마흔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애초에 서른쯤에 어디 원룸이라도 얻어 나가라고 했더라면 서른 초반에 결혼하지는 않았을까.  

'캥거루’ 그만 하고 독립하자.  

예전 우리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일을 너무 많이 시키면 엄마 팔자 닮아 고생한다며 되도록 일을 안 시키려고 했다. 설사 시켰더라도 막상 시집을 보낼 때는 예비 사돈에게 우리 딸은 아무것도 못한다며 슬쩍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그러니 잘 지도 바란다는 말을 추가하지만 속내는 자기 딸 고생시키지 말라는 완곡어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남자건 여자건 살림살이 좀 할 줄 아는 것이 오히려 결혼생활의 경쟁력이 되는 것 같다. 살림살이란 알고 나면 아주 쉬운 것이다. 때문에 서로 집안 살림에 대한 ‘일머리’가 있으면 결혼생활의 다툼을 훨씬 줄일 수가 있다. 그런데 전혀 해보지 않아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엄청 커지는 것이다.

하여간, 결혼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결혼을  떠나서도 남자건 여자건 한 초등 4학년부터 슬슬 라면 끓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생활적인 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다. 어쩌면 수학문제 보다 더 필요한 게 ‘생활교육’이 아닌가 싶다. 미리 해놓지 않으면 마흔이 되어도 할 줄 아는 것은 초등 4년에 졸업해야 되는 라면 끓이기나 겨우 할뿐 다른 것은 무지 몽매를 못 벗어나니 효도 하는 척하며 엄마를 부려먹는 것이다.

독립하자.  독립해서 살다보면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일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뿐만아니라, 드라마속 주인공 같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환상에서도 벗어나 현실적 선택을 할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어쩌다 이성친구가 놀러왔다 치자. 남자라면 장동건처럼 생겨야만 살아 줄 만하다 생각했는데... 얼씨구 이 남자도  옆에 두고 보니 얼굴은 좀 딸려도 저렇게 벽에 못도 잘박고 고장난 스피커도 고치고 내집에 딱 어울리네(?) 머이런 견적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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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와 <라비앙 로즈>를 봤고 <골든 에이지>와 <마이클 클레이튼>을 볼 생각이다.

극장에는 매 주마다 새로운 영화들이 걸리지만 보고싶은 영화는 늘 극 소수다.

이러면 우울하다. 사실 지난해는 못본 영화들을 한꺼번에 다 보느라 우울할새가 없었지만

올해는 쭉 찡그림모드다.

 

당췌 내 눈을 확! 땡겨준 영화들이 없으니... 한해를 꼬박 바쳐 11월에야 겨우하나 건졌다.

그 하나는 <비커잉 제인>이다. 물론 <화려한 휴가>가 있기도 했네..

 

아무튼,  모세혈관까지 헐레벌떡 춤을 출 그런 영화 없나 늘 찾다보니 

한달뒤의 개봉 예정작들을 미리 둘러보는 일도 다반사, 벋뜨, 땡기는 영화들이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ㅠㅠ... 이젠 더이상 영화를 의지할 수가 음써...

.....

이안이라는 이름은 내게 '브로크백 쓰나미'를 주었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색,계를

봤는데....불혹이라도 다같은 불혹이 아니라 도무지 그 '색'의 표현이

이해되지 않았다. 영화 그자체보다도 그것을 평한 기자들의 리뷰와 감독과 배우의 변이

더 그럴듯해 그러면 그런가 하고 봐야되는가? 하며 봤다.

 

똑같은 이안감독의 작품인데 브로크백은 아무런 설명없이 지대로 이해되는데

이 작품은 화려하게 설명해 놓아도 읽을줄을, 느낄줄을 모르니 아마 나는 바보... ㅋㅋ..

무삭제, 무삭제 그렇게 요란하더니만 겨우 고정도 가지고.... 물론 숙맥들에겐 감읍할

지경이겠지만.... 이참에 따져보자면 , 배우들은 왜들 그리 몸을 아낀댜?

 

이웃아짐의 말을 빌리면 죽으면 썩어질 몸. 뭘 그리 애껴 쌌는지...

양조위씨, 보여줄거면 뭐 두쪽만 보여주지 말고

본론도 좀 보여주든지.. 겨우 그것 가지고, 광고가 넘 셌다고 생각지 아니함둥?

 

이에 반해, 탕츠자의 용감무쌍엔 한표. 그래 벗을 거면 진작에 벗는 거야. 혜수 언니처럼

다 늙어 벗으면 뭐 한다니. 몸은 탱탱헌지 몰라두 얼굴이 시들었는데...

........

<라비앙 로즈>는 아주 기대를 하고 봤는데 좀 부족했다. 차라리 그냥 시간적추이를 따라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정신없는 교차편집은 흐름의 맥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에디뜨, 그녀 삶의 많은 부분을 알고 본 사람이라면 함축적인 부분들을 보면서

 아하, 저렇게 생략하고 넘어가는 구나 이해가 되겠지만... 노래몇곡만 알고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본다면 도대체 뭔 소리여?

 

그리고, 그녀의 약물중독, 알콜중독 부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멀쩡한 상태로 노래를 부른적이 한번도 없는 듯이 느껴져서 나까지 우울.... 노래 부르다 쓰러지

는 장면을 두번씩이나 넣은 것도 싫여.

 

이브몽땅의 존재도 '이브몽땅도?'라는 에디뜨의 한마디로만 처리.

이브몽땅의 고백록에서 보면 에디뜨 삐아프는 중요인물이었는데...

아무튼 이 영화만으로는 그녀의 삶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업그레이드 영화가 나오길 기대..

(이완 달리 화가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은 다들 손색이 없었는데....)

 

아, 여배우의 연기는 탁월하였다. 애처롭기가 진짜 에디뜨보다 더 애처로웠~~

'삐아프'= '작은 참새' 라는데 정말 '바들바들' 떠는 한마리 참새같은 삐아프의 연약한 내면을

원없이 끌어내 주었다.

 

오늘 한겨레를 보니 적정관람료를 5000원도 안되게 주었던데 그럼 안돼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영화는 무조건 봐야 한다고 생각... 영화가 제대로 이해를 몬

시켜주면 관객이 이해해 가면서 보면되고 부족분은 책을 통하던지 해야지

일일 관객수 따져 간판 일찍 내릴까 걱정..

.....

십일월도 이렇게 가고 있네. 그제는 윗쪽 지방에 눈이 내렸다기에 '첫눈이 온다구요' 노래를

들어 봤다.

'슬퍼하지 말아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시월의 마지막 밤은 이용의 밤,

매 해 첫눈 오는날은 이정석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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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 2007-11-2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킨이 끝내줍니다..^^ 라비앙로즈가 그랬군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폭설 2007-11-2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바탕화면 만든 사람 상 줘야 될것 같아요.^^
 

교육방송에서 하는, 정재환이 사회보는

'야심만만' 같은 퀴즈쇼에서 본 내용입니다. 나이별로 요새 질투나는 여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10대~얼굴도 이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성형수술 했는데도 티 안나고 이쁜 여자.

30대~결혼전에 오만 짓거리 다하고 신나게 놀았는데 시집 잘가서 잘사는 여자.

40대~골프 치고 놀꺼 다 놀고 쏘다니는데 자식들 대학 척척 붙는 여자.

50대~먹어도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60대~건강도 타고 났는데 돈복도 타고난 여자.

70대~자식들도 효도 잘하는데 서방까지 멀쩡하게 살아 호강하는 여자.

80대~아직도 살아 있는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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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체부 아저씨를 위하여 직접 쓰셨는지....
 
 
 
지난 오월 작고하신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를 다녀왔다. 8월 광복절 지나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못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찾아 나섰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후 여기저기 선생을 추모하는 글들에서 자연 이 주소를 외우게 되었다.

"일단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서 안동으로 빠져나간 다음에 일직면을 찾고, 일직면 찾으면 조탑리도 자연스레 찾을 수 있겠지."

주소 하나만 달랑 알고 사진에서 보던 이미지만 머릿속에 넣고 찾아가는 길이라 그래도 내심 잔뜩 헤매는 것 아냐 하며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고속도로에서 안동으로 빠져나온 바로 그 동네가 일직면이었고, 아마 5분도 못 가서 바로 조탑리였다.

조탑리는 그 이름이 설명해주듯 마을 어귀에 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교회도 보였는데 아마 선생이 종지기로 지냈던 그 교회인가 싶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마을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일단 구멍가게나 교회로 가서 물어볼까 하던 찰나 아저씨 한 분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셨다.

"저기, 안녕하세요? 권정생 선생님 생가가 어딘지요?"
"요 위로 올라가면 외딴집 하나 있을 겁니다."

아무런 표식 없이 방치된 것에 놀라


 
▲ 추모의 글을 적을 방명록이라도 하나 두었더라면...
 
 
 
마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올라가니, 정말 사진으로 워낙 많이 봐와서 그런지 한눈에 선생의 집임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오월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몇 주일은 늘 주말마다 추모객들이 붐빈다고 했고, 선생의 책들을 평상에 두고 애도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간 석 달 후의 모습은 마냥 허허로웠다. 홀아비 몸에다 물욕도 없었으니 그냥저냥 허름하고, 소박하고, 쓸쓸하게 살다 가신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박' 그대로 이기 보다는 뭔가 '방치'된 느낌이 들었다.

선생은 유언하기를 집을 부수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는데, 선생이 돌아간 직후의 여론은 선생의 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쪽이 우세한 느낌이었다. 나 자신도 당연히 보존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불과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런 표식도 없이 어지러운 모습을 보니 자못 죄송스러웠다. 이럴 줄 알고 선생은 흙으로 돌려 달라 하셨는지….

그래서 생각하기를, 추모위원회(?) 쪽에서 선생의 생가를 당분간 보류이든 보존이던 우선 그대로 둘 거면,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리를 좀 한 후 '안내문'이라도 하나 세워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여느 시골 폐가와 똑같은 모습으로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포도가 탐스럽게..
 
 
 

 
▲ 한 발 찍고 보니 부추밭이어서 깜짝 놀랐다. 그 누구라도 베어가는 것이 옳을지...
 
 
 
한편, 이런저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의 텃밭과 집 주위에는 변함없이 선생의 친구들이자 자연의 열매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아주 없는 게 없었다. 호박잎, 콩잎, 깻잎에다 부추 밭, 그런가 하면 뽕나무, 산수유나무, 고욤나무, 앵두나무, 은행나무, 포도덩굴 등 다들 열매를 실하게 맺고들 있었다. 익모초며 국화도 때 되면 꽃을 피우겠지….

너무도 소박하게 살다 가신 모습에 저절로 고개 숙여져....


 
▲ 선생이 사용하시던 수도
 
 
 

 
▲ 마당의 솥..
 
 
 
동화작가 권정생. 아이의 받아쓰기 숙제 때문에 초등 1학년 읽기 책장을 넘기다 <강아지 똥>을 보게 되었다. "마침 잘 됐네" 나는 스크랩해 두었던, 언젠가 <한겨레>에 실렸던 선생의 인터뷰기사를 보여주며 "이분이 바로 이분이여" 하며 아이에게 선생의 삶을 얘기해 주었었다.

그러다 지난 오월 갑자기 영면하시자 역시 신문을 들추며 "글쎄, 이분이 돌아가셨다는구나" 하면서 훌쩍거리기도 했다. 그때 막연히 여름 방학하면 우리도 선생의 생가를 한번 찾도록 하자며 운을 띄웠었는데….

막상 가서 선생의 사시던 모습을 보니 세상에 어쩜 그리도 소박하게 사시다가 가실 수가 있는지 마음이 울컥했다. 선생의 인세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동화작가임을 비춰 볼 때 모르긴 해도 안동 시내의 비싼 집 수채는 사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데도 한턱내는 척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돌아가신 후 동네 사람들 입에서 "그 사람이 그리 유명 했수? 우린 몰랐소"라는 말을 들으시다니.

돈, 돈, 돈.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돈이 모인다, 저렇게 해서 돈을 모아라. 투자, 투자, 투자…. 물질에 대한 숭배가 끝이 없다. 이런 세상을 선생은 마지막 가는 그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살다 가셨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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