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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도 이 책이 서점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고시절 일종의 객기로 공부는 못하면서 또래들보다는 좀 유난을 떨고 싶던 차에 우연히 문예지 한 권을 손에 넣었었다. 다행히 거부감이 일지 않는 쉬운 내용들이 마침 그 호를 장식하고 있어서 사랑에라도 빠지듯 그 책에 몰입했었다.
지금도 내 책장 한켠에는 그날의 '문학사상'이 빛 바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일년에 한 번쯤은 꺼내서 펼쳐 보고는 한다. 내 인생이 경제적이 아닌 문화적 혹은, 아웃사이더적이 되 버린 것은 다 그 한 권의 책으로부터 출발 한다고나 할까.
그 '문학사상'이라는 월간지 속에 '33세의 팡세'가 연재되고 있었다. 김승희라고? 처음으로 접하는 이름이었는데 세상에나.....
나는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전율로 그녀의 에세이를 탐독했다. 이 세상에 나만한 어둠을 가진 자가 또 있었다니 하면서. 그녀의 '어둠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내 젊은 날을 온통 지배했다.
대학 시절엔 그녀를 흉내내느라 밤새 독서에도 빠졌고 내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에겐 하나의 통과 의례처럼 그녀의 책을 선전했는데, 이유인즉 그 책을 읽고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절교(?)였다. 그러나 무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33세의 팡세'를 읽은 친구들은 거의가 자신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며 극찬했고, 그 책을 소개해 준 나까지 괄목(?)하고 상대해 주었다.
'33세의 팡세'는 시인 김승희의 고독과, 시와 학문에의 열정, 수줍음, 세속과의 불화 등등이 그녀의 현란하고 거침없는 문체 속에 녹아있다. (김열규는 한마디로 그녀를 언어의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어줍잖은 시인의 시보다 그녀의 산문이 훨씬 아름답고, 솔직히 그녀의 시보다 '33세의 팡세'의 산문이 더 아름답다.
어쩌면 아직도 큰 서점 창고 한켠에 몇 권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판 발행이 85년이고 94년에 21판 발행인걸 보니 지금도 찾을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1판'이라는 부수가 말해 주듯이 또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이 '교양 있는 다수의 독자를 가진 책이다.'
이문열(요즈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분이나 '젊은날의 초상' 은 젊은 날에 읽으면 차암 좋은 책이다.)의 젊은 날의 초상은 지금도 터줏대감처럼 서점을 지키는데 '33세의 팡세'는 창고에 가서나 찾을 수 있다는 게 유감이다. 20대 초반에 읽기에 가장 좋은 책으로(수없이 많지만) 왼손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오른손에는 김승희의 '33세의 팡세'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