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자꾸 보고 싶은 세계 명작 동화
삐아제어린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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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책이란 것을 읽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둔 무렵이었다. 요즘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1살, 2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단계별로 별의별 책을 다 선물받지만 내 어린 날 책 구경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기에 여남은 권 읽자 더 이상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뭔가 아쉬워지면서 중학교 들어가서도 학교 도서관을 찾고 해야 될 텐데 그러지 못했다. 동화책을 처음 접해 짧은 시간에 여남은 권을 읽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이 묵었다'는 만족감이 일었었다, 참내.

그때 우리들이 주로 읽었던 책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검은말 이야기> <소공녀> <소공자> <왕자와 거지> <빨간 머리 앤>등이었다. 요즘 견지에서 보면 '약이 되기보다 독이 되기' 쉬운 동화들일수도 있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류의 책들이 어느 정도 내 심리에 영향을 미친것도 같다, 물론 '독' 까지는 아니겠으나.

그런 빈약한 어린 날을 보냈던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니. 그 때 그 '결핍'이 뒤늦게 '욕구'가 되어 빛을 발하다니 인생의 진행 경로는 알 수가 없어라. 또, 배꼽 잡을 증세는 뜬금없이 그 옛날에 못 읽었던 세계명작 동화나 위인전 시리즈를 내 나이 마흔 즈음에 불현듯
한꺼번에 왕창 쌓아두고 읽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인생의 불혹이니 약이니 독이니 따질 필요도 없을 터이고, 다만 너무 궁금해 미치겠는 것이다. 제목은 알되 읽어보지 못한 동화가 너무 많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그 동화들을 구할까 궁리중이다.

내 돈으로 사기보다 아이를 중학생으로 올려 보내는 집을 수소문해 헐값에 왕창 처분해줍쇼 청을 넣고 싶은데 잘 만나질지 의문이다.

겸사겸사 '자리끼'로 아이에게 해주던 이야기가 바닥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초등생이 되는 첫째아이는, 어릴 때는 하나의 얘기로 수십 번 우려먹어도 재미있다고 했는데 요새는 서너 번 들으면 이미 다 아는 얘기라며 새로운 것을 주문한다.

해서 도랑치고 가재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번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아이에게 얘기해 줄때는 나름의 상상력으로 각색하여 전혀 다른 얘기가 될 터이지만.

'아무튼 위인전과 명작동화여, 조만간 당신들을 만나러 갑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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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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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목욕탕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의 나만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다. 다름 아닌 졸도(?)사건 때문이다. 목욕탕에 가면 밥을 먹고 가도 기운이 딸릴 것인데 내가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벌인 그 두 번의 경우 모두 아침을 굶고 갔었다.

그런 상태에서 본전을 뺀답시고 더운 공기에 숨이 가쁘면서도 두 어 시간을 버텼는데, 마무리하고 옷장 앞에서 열쇠를 꽂다가 쓰러졌다. 그러고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분? 30분? 나중에 나를 발견한 한 아주머니의 놀란 목소리에 잃었던 의식이 희미하게 되돌아오면서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던 그 찰나.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내가 '유체 이탈'을 한 듯 허공에서 쓰러진 나와 근심스런 얼굴의 아주머니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의식이 조금 더 돌아오자 허공의 나는 어느새 내려와 쓰러진 나와 오버랩 되었고, 아주머니는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아주머니를 올려다보는 상태를 인지하면서 확실히 의식이 깼다.

재미있는 것은 그 짧은 몽롱한 순간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기운 없어 쓰러졌지만 쓰러진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고 '평온'했다.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냐고 물었으나, 혹시나 해서 일어나서 이리저리 걸어보니 약간의 기운 없음 빼고는 괜찮았다. 그 후로도 목욕탕에서 그런 장면을 한 번 더 연출했다. 물론 '죽음'의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 목욕탕 발걸음을 끊었다.

대신 죽고 난 다음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 것은 아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아프면서 죽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진다.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은 '잘 죽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픔 같은 것 없이 조용히 죽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좀 선하게 살면 조용히 죽을 수 있을까. 운동을 좀 열심히 하면 역시 조용히 갈수 있을까. 마음에 한점 미련 없이 원 없이 살다 가면 깔끔한 종말을 맞을 수 있을까. 명상을 오래하면 더 이상 미련을 남길 수 없는 순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까.

그런데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삶을 긍정하며 끝까지 의연하게 살다 간 사람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베스트셀러라는 것 때문에 뒤늦게 만나게 된 분이었다. 모리 슈워츠.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정열적인 춤추기를 좋아하고, 수영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 맺기를 좋아하던 모리 교수는 78세의 어느 날 어쩔 수 없는 노환도 아니고 인생의 막바지에 '루게릭'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그는 의사로부터 자신의 병명을 듣고 난 다음 자신의 처지완 달리 이세상이 아무런 동요 없이 잘 돌아가는 것에 새삼 깜짝 놀았다.

담당의사는 2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고 했지만 모리 교수는 자신의 삶이 그보다 더 짧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쓸 것인가?' 자문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인기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그의 옛 제자 '미치 앨봄'은 우연히 TV 토크쇼에서 죽어가는 스승의 의연한 자세를 보았고 16년 만에 은사를 찾았다. 16년이라는 시간적 괴리도 잊은 듯 은사는 어제처럼 그를 기억해 주었고, 당신 삶의 마지막 프로젝트에 미치가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미치는 모리 교수의 서재에서 '나홀로'수강생이 되었고 매주 화요일 그와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만남은 14회로 끝이 났는데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모리 교수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홀로' 제자에게 질문하였다.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 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미치는 그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 인간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그러니 그 문화가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굳이 그것을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64쪽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75쪽

"나이 드는 것은 단순한 쇠락만은 아니네. 그것은 성장이야. 그것은 곧 죽게 되리라는 부정적인 사실 그 이상이야. 그것은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때문에 더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구."-155쪽

"존경은 그렇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내줌으로써 받기 시작하는 거야."-165쪽


모리 슈워츠 교수는 두 번의 장례식을 가졌다. 한번은 '살아있는 장례식' 그리고 또 한번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맞이하는 장례식을 가졌다. 그는 아직 덜 아프고 사랑의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때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렀다. 보내는 사람들도 떠나는 사람도 완벽하게 '회포'를 풀 수 있는 그런 장례식을.

우리는 매일매일 살고 있지만 실은 매일매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 죽음이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것에는 감사하나 마지막 불꽃이 꺼지기 전의 상황은 저마다 다르다. 정신적, 육체적 모두 고통으로 끝날 수도 있고, 반대로 소풍가듯 가볍게 떠날 수도 있다.

삶의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영육 모두 후회 없이 소풍가듯 떠나기 위해 현재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물어보나마나 결론은 뻔한데 욕망에 찌든 인간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모리교수는 그 외면에 깔끔한 쐐기를 밖아 주고 떠났다. 제발 비본질적인 것에서 헤매지 말고 참된 삶을 살다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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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강상중
강상중 지음 / 삶과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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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꿈
'강상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은 것은 수년 전 신문의 한 작은 기사에서였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도쿄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약간은 웃는 모습의 잘생긴 그의 사진을 본 나의 당시 반응은 '잘나가는 재일동포의 아들로 태어나 승승장구하며 살다 그 어렵다는 도쿄대 교수까지?'라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언젠가 우연히 NHK에서 그가 일본 우익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을 보았는데 표정이 너무 어두웠었다.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어두운 사람이었나.' 그것은 토론내용의 심각성 때문에 어두워 보였다기보다 어둠이 늘 그의 삶을 관통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이 책 <재일 강상중>을 발견하였다. 역시나 어두웠다. 아니 이름난 재일 교포들은 다들 왜 이렇게 '고뇌'라는 글자를 얼굴에다 쓰고 다니는 거야. 신숙옥씨의 얼굴을 봐도 유미리씨의 얼굴을 봐도.. 모두 그 얼굴 어딘가에 쓸쓸함 내지 깊은 상처가 묻어난다.

1950년, 나는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서 재일(在日)2세로 태어났다. 그리고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세계는 많이 달라졌다. 분열된 한반도도 지금 바야흐로 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재일의 존재는 변하지 않고 있다. 시간은 지났으나 1세들의 마음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고 있다. 재일과 일본, 재일과 남북, 남북과 일본과의 사이에 있는 분열이 해소되고 화해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질 때, 그때에 비로소, 나는 참다운 1세들과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재일 교포 1세들의 마음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반생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있게 한 재일교포 1세인 부모세대들의 삶 또한 반추하고 있다.

경남 진해가 고향인 그의 어머니 우순남 여사는 얼굴 한번 본 것이 전부인 약혼자를 찾아 18세에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왔다. 그 후 그분은 '문맹'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상상을 초월하는 간난신고의'나날을 살아 내었다. 남의 나라에서 평생 '문맹'이란 꼬리표를 달고 산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오로지 '고향의 제의와 풍습, 식생활과 의례'를 통해 확인하며 살았다.

물론 자식은 어머니의 그 세계를 재일동포라는 '불명예의 표식'으로 생각하며 견딜 수 없어하며 유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권운동가 서준식씨도 비슷한 고백을 하였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고.

두 예에서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나의 부모 세대가 그러하였듯 그 세대들은 다 자신의 문맹을 한탄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 땅에서의 문맹과 제일동포 1세대가 겪었을 문맹의 고통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2중의 문맹을 경험해야 했기에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남도 창원군 남산리의 한 가난한 소작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에 온 것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해인 약관 15세 때의 일이었다. 15세라면 요즘 중학교 2학년. 나의 돌아가신 큰 아버지도 그러했듯 그때는 그 어린나이에도 다들 가난을 면해 보고자 배타고 바다건너 남의 나라에 갈 생각들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도일하여 사춘기의 날들부터 얼마나 많은 직업과 장소를 옮겨 다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떠돌이 삶을 살았다. 남의 나라에서도 장남은 장남인지라 헌병생활을 하던 동생의 승진을 위해 침식을 잊으며 일을 하기도 하였다. 공습으로 여동생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봐야 했고 장남을 가슴에 묻었다.

강상중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재일동포 1세들은 평생을, 우리를 침략했던 나라에서 모든 감정을 절제하며 숨죽이며 그리고 천대받으며 살았다. 한편으론 가슴속에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강상중. 그는 와세다 대학시절 그동안 써오던 이름 '나가노 데츠오'를 버리고 '강상중'(姜尙中)으로 개명하였다. 알고 보니 지문날인 거부 그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세계는 '동북아시아'라는 큰 그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의 수가 약 300만이나 된다고 한다. 본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살고 있는 그 300만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서로 돕고 교류하는 삶을 그는 꿈꾸고 있었다. 그의 꿈이 현실이 되고 이후로는 보다 덜 엄숙하고 가볍게 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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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의 향기 00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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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젊은 날 한때는 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나 혼자 뿐이고 모두 희희낙락 잘도 살아간다며 내 고독을 한탄하였다.

그러면서 고독을 이기는 나름의 방편으로 이것저것 동지를 찾아 헤매었다. 현실의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없으니 내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책이나 음악, 그림, 자연에 빠졌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외로운 것은 일종의 사회 부적응증 혹은 궤도이탈이라 생각했기에 외로움에서 어떡하든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음악을 들었고, 외로움을 이기고자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또, 외로움을 잊으려 자연을 벗하였고, 귀밑머리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고독을 치유하고 사회와 가까워지게 하기는커녕 사회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박이문 선생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고독을 마냥 헛되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나의 이십대 기억속의 박이문 선생은 고등학교 국어책속의 <길>이라는 수필 단 한편으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한 <길>을 공부하면서 이 분은 무엇을 하는 분일까 궁금해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박이문 선생이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옛날엔 시인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이었으나 수필가나 논설문의 저자는 시험에 나오지 않아(?) 몰라도 되었다.

그랬던 박이문 선생을 산문집 <길>(미다스북스)에서 다시 만났게 되었다. 표지 속 사진의 선생은 백발이 형형하였으나 산문 속의 선생은 영원한 청년의 모습이고 구도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독을 정의 했지만 나는 선생의 고독이 가장 감미롭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적나라한 자아, 모든 껍데기를 훌훌 벗은 벌거숭이 자아와 처음으로 직면한다. 고독은 자아를 밝혀주는 조명이다.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의식할 수 없다. 고독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고 우리는 자유를, 동물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할 수 없다. 우리는 고독한 경험을 통해서 자아에 대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갖게 될 수 있다.

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나는 죽음의 의미를 추상이 아닌 구체(具體)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끝이자 영원이고 단절이자 또 다른 만남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했기에 박이문 선생의 죽음에 대한 정의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죽음이 보여주는 무상은 나를, 나 자신의 작은 자아를 더 넓은 테두리에서 파악하게 한다. 인간을 자연의 관점으로, 더 나아가 우주의 관점으로, 곧 인간적 시간의 관점에서 영원의 관점으로 확장시키고 해방시켜준다. 죽음은 죽은 본인에게는 모든 의미까지도 ‘초탈함’을 뜻한다.

바다에 대한 선생의 글 또한 매혹적이었다.‘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공자의 말에 나 또한 함몰되어 ‘나는 인자가 되고 싶어 산을 좋아하는가’하고 생각 한 적 있었다. 아무리해도 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체념에 애꿎게 바다까지 싫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봄과 여름 두 차례 배를 타고 바다구경을 하고서야, 바다야말로 그 자체로 장엄한 대 서사시라는 것을 알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함은 산이나 바다나 다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바다는 ‘지자(智者)’라기보다 ‘용자(勇者)’인 듯싶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도 <길>에는 우리가 한번쯤 화두로 삼고 생각에 잠겨볼 만한 주제들이 많다. 눈, 여행, 기차, 책, 편지…. 단어 하나만 봐도 그리움이 저절로 묻어나지 않는가. 현대 사회는 급속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더더욱 명상이 필요한 시대인데 명상에 이르기까지의 차분한 과정을 인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박이문 선생의 책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지.

오랜 명상에서 우러나온 선생의 글은 읽은 이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느끼게 해준다. 한 잔의 맑은 차와 함께 고요히 앉아 선생의 글을 음미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명상은 없다. 자, 한 해의 끝자락, 우리 명상에 한번 빠져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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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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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 책이 서점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고시절 일종의 객기로 공부는 못하면서 또래들보다는 좀 유난을 떨고 싶던 차에 우연히 문예지 한 권을 손에 넣었었다. 다행히 거부감이 일지 않는 쉬운 내용들이 마침 그 호를 장식하고 있어서 사랑에라도 빠지듯 그 책에 몰입했었다.

지금도 내 책장 한켠에는 그날의 '문학사상'이 빛 바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일년에 한 번쯤은 꺼내서 펼쳐 보고는 한다. 내 인생이 경제적이 아닌 문화적 혹은, 아웃사이더적이 되 버린 것은 다 그 한 권의 책으로부터 출발 한다고나 할까.

그 '문학사상'이라는 월간지 속에 '33세의 팡세'가 연재되고 있었다. 김승희라고? 처음으로 접하는 이름이었는데 세상에나.....

나는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전율로 그녀의 에세이를 탐독했다. 이 세상에 나만한 어둠을 가진 자가 또 있었다니 하면서. 그녀의 '어둠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내 젊은 날을 온통 지배했다.

대학 시절엔 그녀를 흉내내느라 밤새 독서에도 빠졌고 내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에겐 하나의 통과 의례처럼 그녀의 책을 선전했는데, 이유인즉 그 책을 읽고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절교(?)였다. 그러나 무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33세의 팡세'를 읽은 친구들은 거의가 자신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며 극찬했고, 그 책을 소개해 준 나까지 괄목(?)하고 상대해 주었다.

'33세의 팡세'는 시인 김승희의 고독과, 시와 학문에의 열정, 수줍음, 세속과의 불화 등등이 그녀의 현란하고 거침없는 문체 속에 녹아있다. (김열규는 한마디로 그녀를 언어의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어줍잖은 시인의 시보다 그녀의 산문이 훨씬 아름답고, 솔직히 그녀의 시보다 '33세의 팡세'의 산문이 더 아름답다.

어쩌면 아직도 큰 서점 창고 한켠에 몇 권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판 발행이 85년이고 94년에 21판 발행인걸 보니 지금도 찾을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1판'이라는 부수가 말해 주듯이 또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이 '교양 있는 다수의 독자를 가진 책이다.'

이문열(요즈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분이나 '젊은날의 초상' 은 젊은 날에 읽으면 차암 좋은 책이다.)의 젊은 날의 초상은 지금도 터줏대감처럼 서점을 지키는데 '33세의 팡세'는 창고에 가서나 찾을 수 있다는 게 유감이다. 20대 초반에 읽기에 가장 좋은 책으로(수없이 많지만) 왼손에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오른손에는 김승희의 '33세의 팡세'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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