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문의 향기 00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젊은 날 한때는 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나 혼자 뿐이고 모두 희희낙락 잘도 살아간다며 내 고독을 한탄하였다.

그러면서 고독을 이기는 나름의 방편으로 이것저것 동지를 찾아 헤매었다. 현실의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없으니 내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책이나 음악, 그림, 자연에 빠졌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외로운 것은 일종의 사회 부적응증 혹은 궤도이탈이라 생각했기에 외로움에서 어떡하든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음악을 들었고, 외로움을 이기고자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또, 외로움을 잊으려 자연을 벗하였고, 귀밑머리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고독을 치유하고 사회와 가까워지게 하기는커녕 사회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박이문 선생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고독을 마냥 헛되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나의 이십대 기억속의 박이문 선생은 고등학교 국어책속의 <길>이라는 수필 단 한편으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한 <길>을 공부하면서 이 분은 무엇을 하는 분일까 궁금해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박이문 선생이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옛날엔 시인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이었으나 수필가나 논설문의 저자는 시험에 나오지 않아(?) 몰라도 되었다.

그랬던 박이문 선생을 산문집 <길>(미다스북스)에서 다시 만났게 되었다. 표지 속 사진의 선생은 백발이 형형하였으나 산문 속의 선생은 영원한 청년의 모습이고 구도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독을 정의 했지만 나는 선생의 고독이 가장 감미롭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적나라한 자아, 모든 껍데기를 훌훌 벗은 벌거숭이 자아와 처음으로 직면한다. 고독은 자아를 밝혀주는 조명이다.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의식할 수 없다. 고독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고 우리는 자유를, 동물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할 수 없다. 우리는 고독한 경험을 통해서 자아에 대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갖게 될 수 있다.

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나는 죽음의 의미를 추상이 아닌 구체(具體)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끝이자 영원이고 단절이자 또 다른 만남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했기에 박이문 선생의 죽음에 대한 정의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죽음이 보여주는 무상은 나를, 나 자신의 작은 자아를 더 넓은 테두리에서 파악하게 한다. 인간을 자연의 관점으로, 더 나아가 우주의 관점으로, 곧 인간적 시간의 관점에서 영원의 관점으로 확장시키고 해방시켜준다. 죽음은 죽은 본인에게는 모든 의미까지도 ‘초탈함’을 뜻한다.

바다에 대한 선생의 글 또한 매혹적이었다.‘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공자의 말에 나 또한 함몰되어 ‘나는 인자가 되고 싶어 산을 좋아하는가’하고 생각 한 적 있었다. 아무리해도 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체념에 애꿎게 바다까지 싫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봄과 여름 두 차례 배를 타고 바다구경을 하고서야, 바다야말로 그 자체로 장엄한 대 서사시라는 것을 알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함은 산이나 바다나 다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바다는 ‘지자(智者)’라기보다 ‘용자(勇者)’인 듯싶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도 <길>에는 우리가 한번쯤 화두로 삼고 생각에 잠겨볼 만한 주제들이 많다. 눈, 여행, 기차, 책, 편지…. 단어 하나만 봐도 그리움이 저절로 묻어나지 않는가. 현대 사회는 급속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더더욱 명상이 필요한 시대인데 명상에 이르기까지의 차분한 과정을 인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박이문 선생의 책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지.

오랜 명상에서 우러나온 선생의 글은 읽은 이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느끼게 해준다. 한 잔의 맑은 차와 함께 고요히 앉아 선생의 글을 음미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명상은 없다. 자, 한 해의 끝자락, 우리 명상에 한번 빠져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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