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강상중
강상중 지음 / 삶과꿈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 삶과꿈
'강상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은 것은 수년 전 신문의 한 작은 기사에서였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도쿄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약간은 웃는 모습의 잘생긴 그의 사진을 본 나의 당시 반응은 '잘나가는 재일동포의 아들로 태어나 승승장구하며 살다 그 어렵다는 도쿄대 교수까지?'라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언젠가 우연히 NHK에서 그가 일본 우익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을 보았는데 표정이 너무 어두웠었다.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어두운 사람이었나.' 그것은 토론내용의 심각성 때문에 어두워 보였다기보다 어둠이 늘 그의 삶을 관통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이 책 <재일 강상중>을 발견하였다. 역시나 어두웠다. 아니 이름난 재일 교포들은 다들 왜 이렇게 '고뇌'라는 글자를 얼굴에다 쓰고 다니는 거야. 신숙옥씨의 얼굴을 봐도 유미리씨의 얼굴을 봐도.. 모두 그 얼굴 어딘가에 쓸쓸함 내지 깊은 상처가 묻어난다.

1950년, 나는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서 재일(在日)2세로 태어났다. 그리고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세계는 많이 달라졌다. 분열된 한반도도 지금 바야흐로 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재일의 존재는 변하지 않고 있다. 시간은 지났으나 1세들의 마음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고 있다. 재일과 일본, 재일과 남북, 남북과 일본과의 사이에 있는 분열이 해소되고 화해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질 때, 그때에 비로소, 나는 참다운 1세들과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재일 교포 1세들의 마음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반생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있게 한 재일교포 1세인 부모세대들의 삶 또한 반추하고 있다.

경남 진해가 고향인 그의 어머니 우순남 여사는 얼굴 한번 본 것이 전부인 약혼자를 찾아 18세에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왔다. 그 후 그분은 '문맹'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상상을 초월하는 간난신고의'나날을 살아 내었다. 남의 나라에서 평생 '문맹'이란 꼬리표를 달고 산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오로지 '고향의 제의와 풍습, 식생활과 의례'를 통해 확인하며 살았다.

물론 자식은 어머니의 그 세계를 재일동포라는 '불명예의 표식'으로 생각하며 견딜 수 없어하며 유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권운동가 서준식씨도 비슷한 고백을 하였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고.

두 예에서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나의 부모 세대가 그러하였듯 그 세대들은 다 자신의 문맹을 한탄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 땅에서의 문맹과 제일동포 1세대가 겪었을 문맹의 고통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2중의 문맹을 경험해야 했기에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남도 창원군 남산리의 한 가난한 소작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에 온 것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해인 약관 15세 때의 일이었다. 15세라면 요즘 중학교 2학년. 나의 돌아가신 큰 아버지도 그러했듯 그때는 그 어린나이에도 다들 가난을 면해 보고자 배타고 바다건너 남의 나라에 갈 생각들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도일하여 사춘기의 날들부터 얼마나 많은 직업과 장소를 옮겨 다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떠돌이 삶을 살았다. 남의 나라에서도 장남은 장남인지라 헌병생활을 하던 동생의 승진을 위해 침식을 잊으며 일을 하기도 하였다. 공습으로 여동생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봐야 했고 장남을 가슴에 묻었다.

강상중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재일동포 1세들은 평생을, 우리를 침략했던 나라에서 모든 감정을 절제하며 숨죽이며 그리고 천대받으며 살았다. 한편으론 가슴속에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강상중. 그는 와세다 대학시절 그동안 써오던 이름 '나가노 데츠오'를 버리고 '강상중'(姜尙中)으로 개명하였다. 알고 보니 지문날인 거부 그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세계는 '동북아시아'라는 큰 그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의 수가 약 300만이나 된다고 한다. 본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살고 있는 그 300만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서로 돕고 교류하는 삶을 그는 꿈꾸고 있었다. 그의 꿈이 현실이 되고 이후로는 보다 덜 엄숙하고 가볍게 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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