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에게 어린이 책을 사주지 못하는 것은 어린이 책 가격이 너무 비싸서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대개 120~160페이지 정도인데(더 적을 수도 있고) 가격은 6500원이면 싼 것이고 7500원, 8800원, 부르는 게 값이다. 

전집으로 나온 것은 할인된 가격으로 사서 그런지 낱권 가격으로 따지면 3500원 어떤 것은 2500원도 하였기에 단행본 한권에 7500원 어쩌고 하면 너무 비싸게 느껴진다. 출판사는 어린이 책값을 왜 이리 비싸게 먹이는 것일까. 나만 비싸다고 생각하나?

우리네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한 투자에 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심리를 혹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요즘은 대입논술 때문에 초등생부터 논술 준비를 하고 난리인데 그 정서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단행본 한권이 3500~4500한다면 솔직히 싸다고 생각한다. 그럼 얼마나 좋을까마는. 내 생각에는 5000원이나 5500원 아니면 좀 두꺼우면 6000원정도 했으면 좋겠다. 비싸면 사보지 말라고? 물론 사보는 대신 도서관을 이용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책은 사봐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고 또 책이 하나둘 모이면 행복해지고 책장사들도 유리하지 않은가 말이다.





최근에 맘먹고 사준 책의 가격을 보자면,

 

<엘리너 루스벨트>(아이세움)........ 159쪽 7500원

<나도 자존심이 있어>(주니어랜덤)........83쪽 8500원

<박 에스터>(파란자전거).........135쪽 6500원

<춘악이>(문학동네)...........141쪽 8800원

<태양을 삼킨 화가 반 고흐>(창비).............. 173쪽 11000원 이었다.

 
물론 위의 것들은 싼 편에 속한다. 지난주 한 신문에 소개된 책들을 보니 소개된 책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몰라도 초등저학년에게 권하는 책 두 권 모두 12000원이었다. <얘들아! 영화랑 친구하자>(보리별)와 <마르코 폴로의 모험>(두레아이들)이 그것이다. 

정말 비싸지 아니한가. 나만 비싸다 생각하는가. 

아무튼 어린이 단행본 책값을 보다가 문득 한홍구의 <대한민국사>1~4권까지를 펼쳐보니 2003~2006년에 걸쳐 출판되었음에도 모두 300쪽이 넘는 책들인데 가격은 11000원으로 똑같았다. 이 책에 들어있는 내용적 함의로 보자면 어린이 책과는 반대로 정말 너무 싸지 아니한가. 그러나 <대한민국사>의 가격은 적정하다고 본다. 

비교가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사>의 쪽수와 가격에 비하자면 어린이 책 단행본들은 분명 비싸다. 내가 어린이 책 출판사의 속사정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책을 사주기보다 가정방문 책 대여점에 의존하는 학부모들을 보자면 책값에 대한 체감온도가 낮음이 나만이 아님은 확실하다. 

출판사들의 속사정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이 책 가격을 정할 때는 그것을 사 보아야 할 어린이들을 한번쯤 생각해 보고 책값을 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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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풉니다.^^ 즐감하시길~~~

진보는 왜 분열하는가?
 - 공공의 적이 뜰 때 진보는 통합된다


진보가 분열하고 있다. 민노당 분열이 그 서막이 된다. 손학규가 대통령과 그 주변을 무능한 진보라고 꾸짖으며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을 보니 자신을 유능한 진보로 포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별놈의 진보가 다 있구나 싶다. 통합당 초선그룹은 또 끝없이 반성만 반복하는 낮아지는 진보인지, 생활 속의 진보인지 뭔지 하여간 얄궂은 진보를 새로 표방했다고 한다. 유시민은 또 나름대로 무슨 독특한 진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참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이런 진보, 저런 진보 다들 하나씩 표방하고 나온다. 온갖 진보가 다 나온다. 오색깃발 들고 나온다. 떼 지어 나온다. 폼 잡고 나온다. 거들먹거리며 나온다. 유유상종으로 나온다. 구석구석 나온다. 씩씩하게도 나온다. 보기도 좋다. 나는 이들이 모두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 쓸데없는 짓거리다. 이런 진보 저런 진보 구분하는 금긋기 놀이가 취미생활은 될 것이다. 웃기셔들. 그냥 진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진보가 분열된 것은 전부 김대중, 노무현 때문이다. 두 분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진보라는 양반들은 천상 야당이나 할 팔자인데, 야당에 맞도록 체질이 세팅되어 있었는데, 팔자에 없는 여당을 하려니까 온갖 분열상이 다 나타나주는 것이다. 민노당도 그렇다. 딱 시민단체나 할 수준인데, 점조직이나 꾸려갈 수준인데 노무현 덕에 지갑 주워 주제넘게도 무려 10석이나 가진 어엿한 정당을 하려니까 NL이니 PD니 하며 알차게 분열하는 것이다.

이 산산이 흩어진 진보들을 이명박이 원위치시켜줄 것으로 믿는다. 공공의 적이 뜨면 진보는 저절로 통합된다. 진보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필자는 진보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까짓 거 분열해라. 천 갈래 만 갈래로 분열해라. 공공의 적 이명박이 큰 싸움판 벌여서 모두 재집결시켜 줄 테니까. 지금이 좋은 시절이다. 분열해도 좋은 시절이다. 이명박 쓴맛을 봐야 정신 차리고 통합되지.

국민이 진보를 통합시킨다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탄핵 강행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 별놈의 보수가 다 이쪽에 숨어있었더라는 거다. 그들은 본질이 수구인데 김대중 한 사람 때문에 억지춘양 격으로 진보 편에 짱박혀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또 새로운 김대중, 새로운 노무현이 나타나서 온갖 진보를 통일할 것이고 그때는 박상천류 보수들도 수구본색 감추고 진보깃발 뒤에 살그머니 숨어들 것이다. 진보/보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하다. 국민이 이쪽이나 저쪽을 가리키면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진보로 혹은 보수로 위장하여 양지로 숨어들다가 역사의 물꼬가 한번 돌려져서 국민이 그 가리키는 방향을 바꾸면 기어이 본색을 드러내며 천 갈래 만 갈래로 분열하는 것이다.

전두환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그때 그 시절 빛나리 아저씨 인기 있었다. 야간통금 해제하니 조선백성 살판났다. 과외폐지 두발자유화에 교복자율화가 덤이니 학생들도 살판났다. 국풍81로 여의도에서 잔치 베풀어 주시고 깡패소탕 삼청교육대로 깨끗하게 청소해 주시니 지화자 좋을시고 쾌지나 살판났다. 컬러방송 베푸시고 3S정책 내리시니 오죽 아니 좋겠는가. 우민정책 좋을시고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놀아보세. 전두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야당이 고분고분해졌다. 민한당 말이다.

민한당은 왜 어리석게도 어용정당의 길을 걸었을까? 오늘날 이명박 인기가 하늘을 찌르듯, 그때 그 시절 전두환 인기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식 깡패개혁(?)이 오늘날 이명박 인수위 꼴값 시리즈 뺨칠 정도로 참으로 눈부셨기 때문이다. 하루걸러 하나씩 새로운 개혁안이 터져 나왔다. 언론통폐합으로 썩은 언론 청소하시고, 법란 일으켜 땡중스님 청소하시고, 잔치잔치 벌였네. 아시안게임에 이어 올림픽 유치하시고 광주? 광주는 또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있으니 문제없다. 그건 잊어버리고.

국민이 전두환을 지지하니까 야당이 협조한 것이다. 야당이 국정 협조를 얼마나 잘했던지 85년 2·12총선 앞두고 국회의원 전원에게 훈장을 포상할 것을 상신했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 기억하시는가? 그런데 왜 민한당이 2·12 총선 때는 개박살이 났을까? 전두환 따르던 국민이 갑자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왜?

왜 국민들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을까? 오늘날 이명박 인기도 그때 그 시절 전두환 인기에 지나지 않는다. 손학규가 이명박 인기에 놀라서 독하게 싸우지 않고 한나라당 이중대 노릇을 하는 것은 그때 그 시절 민한당이 전두환 인기에 놀라서 투쟁은 하지 않고 훈장 받을 뻔 한 것과 일맥상통이다.

85년 즈음 전두환 일당의 개혁드라이브(?)도 바닥이 났다. 국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바꾸었다. 이제부터 딱 3년이다. 3년이면 이명박 인기도 백담사시절 전두환 인기만큼은 된다. 연예인들이 다투어 성대묘사한 전두환의 명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명박 버전 나와주신다. '왜 삽만 갖고 그래?' 지금 이명박 흉내 내는 손학규 일당은 민한당 신세가 된다. 국민의 마음은 한순간에 변한다.

지금 진보의 분열상은 놀부집안 박 타듯이 하루걸러 하나씩 뭔가를 내놓는 이명박 서슬에 놀라서 그런 것이고, 3년이 지나 이명박 진영에서 더 이상 보수개혁의 아이디어가 나타나지 않을 때, 영어몰입식 교육인지 뭔지 하는 별놈의 보수개혁안들이 단지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이라는 것을 모든 국민이 깨달을 때, 그놈의 대운하라는 것이 성능 후진 국산자동차 밉다고 속도 빠른 신품 미제경운기로 갈아타는 노릇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아차릴 때, 이명박 추락하고 자동으로 진보는 통합된다. 2·12총선 직후 양 김씨가 뜨자 제 세력이 저절로 신민당으로 통합되었듯이. 그때 그 시절 민한당 공중분해 되었듯이.

역사가 가는 길이 진보다

진보는 앞으로 가는 것인데 길이 없어서 못 가고 있다. 길을 찾아야 할 터인데 길은 찾지 않고 '원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뻔뻔하게 거짓말을 반복한다. 조금씩 신뢰를 쌓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원큐로 해결될 것이라며 '한방'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한방의 찬스를 잡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NL이니 PD니 다 한 방에 대한 환상이다. 평등 하나로 혹은 자주 하나로 다 되는 드라마는 20세기 소식이고 우리의 21세기는 그렇게 녹록지 않다.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꾸준하게 신뢰를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의 권위가 추락한 이유는 먹히지 않는 거짓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무수한 예측들이 다 빗나갔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몰락과 이에 따른 냉전의 해체 그리고 EU의 통합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FTA체결 등 신자유주의 시장환경의 대두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변화된 현실 앞에서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경제의 대두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환경의 변화가 그 한방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한방의 논리는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무려 200년 전에 프로그래밍 된 것인데 환경이 변해서 진보가 새로운 버전으로 말을 갈아타야 한다면 한방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예견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는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려면 길을 뚫어야 한다. 길은 에너지로 뚫을 수 있다. 에너지는 과학, 산업, 공동체, 지식, 그리고 개인의 각성에서 얻어진다. 진보가 과학과 산업을 부정하면 안 된다. 산업을 지탱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부정하면 안 된다. 모든 변혁의 동력원이 되는 밑바닥의 에너지를 부정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의 존립을 정당화하는 사회의 온갖 모순들도 그 시장경제 시스템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환자가 있으니 의사도 살고 시장이 있으니 진보도 산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되어도 환자는 끝없이 나타나고 그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인 진보 자신도 끝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자도 없고 의사도 없는, 사회가 완벽하게 진보해 버려서 더 이상 진보할 필요가 없는 꿈의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1만 년 후에도 의사는 진료를 열심히 해야 하고 1억 년 후에도 진보는 오늘과 같은 고민을 안고 끝없는 모색을 해야 한다.

진보의 본질은 이상주의다. 각자는 각자의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 마르크스 혹은 모택동이나 혹은 북유럽이 표준을 세웠다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의 무수히 많은 종류의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그 무수한 이상주의들 속에서 합의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합의해 가야 한다. 그것은 끝까지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경우에도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진보의 주체는 역사다. 다만, 역사의 진보가 진보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진보의 모색은 계속된다. 한방의 혁명으로 진보를 완성시키고 역사가 스톱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르크스 버전이든 모택동 버전이든 한 개인의 꿈에 불과하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쳐도, 그 위치에서 옹호해야 할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주의자의 삶의 형태가 중요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진보의 근원적인 해답이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날로 통합된다. 냉전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FTA는 EU 통합에 대한 대응이다. 당장 유로가 달러를 이기는 것이 유럽통합과 무관치 않다. 중국은 2천 년 전에 진시황이 이미 거국적으로 FTA를 해버렸다. 중국은 국가 자체가 FTA고 유럽통합이다. 진보가 유럽통합은 찬성하면서 FTA를 반대한다면 사기다. 일본은 FTA를 할 나라가 주변에 없으니 고립되어 경제가 망하고 있다. 이건 정치를 떠나, 이념을 떠나 진보/보수를 떠나 과학의 영역이고 산업의 영역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구소련을 굴복시키고 세계를 자국시장에 편입시켜 레이건과 클린턴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지금 유럽은 EU라는 이름의 FTA로 미국을 제쳤다. 결국, 시장을 먹는 자가 이기는 거다. 1라운드는 미국이 구소련 몰락으로 시장을 먹었고 2라운드는 유럽이 이에 대한 반격으로 EU를 만들어 시장을 먹은 데 비해, 고립된 일본은 시장이 없어 한때 GDP 2위에서 지금은 18위로 추락했다.

무엇인가? 세상은 위에서 끝없이 통합되고 있다. 2천 년 전 진시황의 통일부터 작금의 EU 통합까지 위로는 계속 통합되고 있다. 전 세계가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통합된다. 이동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18세기 원양항해의 시작, 철도와 자동차의 등장, 비행기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지구는 자꾸 좁아지고 있다. 이건 찬성/반대의 차원이 아니다. 진보/보수의 차원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그것이 역사다. 진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옹호함은 무엇인가? 이동수단의 발명이 세계를 좁게 만들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 아래 통합시키고 있다. 그럴수록 인간들은 획일화된다. 모든 인간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같은 팝송을 부르고, 같은 꿈을 꾸며 잠든다. 왜? 할리우드 영화의 공습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공습 때문이다. 햄버거와 피자의 공습 때문이다. 이명박의 영어몰입교육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인간 하나하나를 낱낱이 쪼개놓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다움을 얻을 때, 우르르 몰려다니는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개인이 각성하고 강해질 때, 프랑스 여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이 남과 다른 디자인의 옷을 입으려 노력할 때, 합쳐지는 만큼 다시 쪼개진다.

진시황의 통합에 의해, EU 통합에 의해, FTA에 의해, 그리고 비행기와, 자동차와, 인터넷과, 햄버거와, 콜라와, 스타벅스와, 할리우드영화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우리가 획일화된다면, 그만큼 개인이 강해져서, 개인이 다양화되어서 그 합쳐지는 속도만큼 도로 쪼개놓는 것이 우리의 대응인 것이다. 진보의 저항인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고속도로로, 인터넷으로, 시장통합으로, 신자유주의로, 세상을 하나의 울타리로 합쳐놓는 만큼 개인의 각성이 세상을 다시 잘게 쪼개놓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때는 야후가 빅브라더였는데 지금은 네이버가 빅브라더다. 빅브라더는 날로 탄생한다. 그만큼 우리는 동호회로 쪼개고, 블로그로 숨고, UCC로 쪼개지고, 웹 2.0으로 착실하게 분열해서, 각자의 해방구를 가지고, 각자의 소도를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며 비밀스런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빅브라더의 감시망을 피하고 그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위로 크게 시장이 합쳐지는 만큼 밑으로는 악착같이 쪼개놓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임무다. 생텍쥐베리가 말한 어린왕자의 소행성을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다. 개인과 개인의 간격을 하늘과 땅만큼 벌려놓기다.

이는 역사의 영원한 두 수레바퀴다. 헤겔이 말한 정과 반의 대응이다. 한쪽에서는 계속 합치고 한쪽에서는 계속 쪼갠다. 위로 시스템이 합쳐지는 만큼 같은 비례로 밑으로 쪼갠다. 악착같이 쪼개놓는다. 개인주의는 날로 강화된다. 빅브라더의 통제권을 벗어나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가져야 한다. 문화의 전선, 예술의 전선, 문학의 전선, 교육의 전선, 패션의 전선에서 그 싸움 벌여나가야 한다. 이문열 같은 얼간이는 패대기치고 이외수처럼 이미 그 개인의 왕국을 건설해 놓은 선각자는 옹호하고.

한국모델의 완성이 진정한 진보다

마찬가지로 진보는 개별 문명의, 개별 국가의, 개별 민족의, 개별 사회의, 개별 공동체의, 개별 동호회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값어치를 올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 각각의 값어치는 각자의 모델의 완성도에서 얻어진다. 한 개인의 값어치는 한 개인의 각성에서 얻어지고, 한 사회의 값어치는 그 사회가 일구어놓은 문화적 양식의 완성도에서 얻어진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양식을 완성할 때, 마침내 한국모델을 완성할 때 비로소 가치를 수출할 수 있게 된다. 가치를 수출할 수 있어야 진짜다. 한국모델은 이거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선진국이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서구나 특정 외국모델을 추종하는 것이 수구꼴통이다. 말로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본질은 북유럽을 추종하는 좌파 수구꼴통 많다. 남의 정신을 수입하여 뇌 이식수술 하려는 자는 어떻게든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해치게 된다.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다. 친일파나 친미파나 친유럽파나 본질은 같다.

합의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보의 궁극에 이상주의가 있다. 그 이상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요임금 순임금 때가 이상이라고 말해서 안 된다. 그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낡은 이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이상이 다르고 모택동의 이상이 다르고 어제의 이상이 다르고 오늘의 이상이 다르고 내일의 이상이 또 달라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는 것, 그렇게 부단히 다름을 일구어 가는 것이 바로 진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상이 다르고 미국의 이상이 달라야 한다. 한국모델이 다르고 미국모델이 달라야 한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고 우기는 폭력이 파시즘이다. 달라야만 우리의 가치를 수출할 수 있다. 진보가 명목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획일화된 가치-그것도 외국에서 수입된 철지난-를 주장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이상주의는 합의될 수 없다. 한국의 이상과 미국의 이상, 스웨덴의 이상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같지 않은데 각자의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같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 이유가 없다. 다르므로 각자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한 개인의 가치는 개인이 꾸는 꿈의 가치에서 얻어지고 그 꿈은 자기 안에서 퍼펙트하게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의 이상과 나의 이상이 절대로 다르기 때문에 너와 내가 각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실천에 있어서는 합의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는 다만 합의될 수 있는 부분을 합의할 뿐이다. 너의 이상과 나의 이상은 절대로 다르지만 공공의 적을 퇴치하는 부분에서는 합의될 수가 있다. 각자의 꾸는 꿈은 달라도, 그 다름을 존중하면서 행동통일은 가능하다.

참된 이상은 예술가가 골방에서 혼자 만든다. 경제인들은 그 이상향으로 갈 수 있는 에너지의 토대를 제공할 뿐이고, 정치인들은 그 실천과정에서 조금씩 합의해 갈 뿐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해서 안 된다. 정치는 경제를 일정수준 이상 지배할 수 없고, 경제가 효율의 이름으로 문화를 왜곡해서도 안 된다. 최종적으로는 문화적 양식의 완성도가 남는다. 그것은 각자 제 위치에서 제각기 완성된 거룩한 개인들 사이에서의 소통의 양식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이상주의를 품을 때 그 모든 것은 가능하다.

∑ 

 

ⓒ 김동렬

http://www.drkimz.com/bbs/view.php?id=notice&no=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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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육. 교육문제에 대한 수많은 말들이 오고가고 수많은 비판과 대안이 있지만 딱하나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부모들의 행태이다. 한때는 우리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이 사회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의 교육열은 지나치다. 지나침을 넘어 병적이다. 병적이다가 아니라 미안하지만 ‘완전히’ 미쳤다. 

집단 히스테리도 이런 히스테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명분은 그럴듯하다. 사교육. 남들 다하니 내 아이만 처지게 할 수 없다. 소신 지키다가 내 자식만 낙오되는 게 아닌가. ‘내 아이만 낙오?’에 대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다 보니 남들 따라 남들 하는 만큼 쫓아가기 바쁘다, 너도 나도. 

예전의 교육열은 자식 스스로도 간절히 원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허리띠 졸라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과잉간섭을 원치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부모의 그런 매니저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이라 볼 수 없다. 날 때부터 어쩌면 엄마뱃속부터 쇠뇌 되어 온 비뚤어진 경쟁심의 결과이지 진정한 학문탐구는 아니다. 경쟁, 경쟁 정말이지 지겹다. 얼마 전 MBC스페셜에서 보니 우리나라와 핀란드의 교육열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경쟁’이었다. 

문제는 그 경쟁유발의 원인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경쟁심이 친구를 찍어 누르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생기는 감정이고 에너지였다면 핀란드학생들의 경쟁은 학생내부에서 나오는 지적호기심이 주는 자신과의 경쟁이었다. 

핀란드의 학생들은 좀 더 알고 싶고 보다 더 향상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좇아 공부, 운동 등에 몰두 하였다. 반면 우리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내적 욕구에 의한 열정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하니, 나만 처질수가 없으니 이를 악물고 잠과 싸우며 스스로를 인내하며 하는 것이 공부였다.

이러니 지구 저편 핀란드의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행복의 미소를 만면에 지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네 아이들은 매일매일 지옥이기는 하나 빛나는 내일을 위해 참고 또 참을 뿐이니 공부를 하면서도 어깨가 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교육이 변하려면 돈줄 쥔 학부모가 변해야....

교육 정책도 문제고 잘나가는 대학들의 이기심도 문제지만 제일 문제는 학부모들이다. 교육이 변하려면 먼저 ‘돈줄’을 쥔 학부모들이 변해야 한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지만 생활의 압박을 받으면서까지 매달 적게는 40~50에서 많게는 100~200만원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간 큰 부모들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가만 보면 교육철학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스스로 고민해본 흔적도 없이 오로지 ‘카더라 통신’에만 의존하여 경쟁적으로 학원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 아이가 이번 달 부터 태권도 학원을 다니면 다음 달 부터 내 아이도 보내야 되고, 또, 누가 괜찮다고 소문난 영어 학원을 물색해서 아이를 보내면 내 아이도 일단 등록시키고 보는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심리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들의 공통적인 말.

“우리 아이는 학원가는 걸 아주 재미있어 해요.”

개뿔. 내가 볼 땐 정반대다. 아이들은 가기 싫으면서도 부모의 강력한 뜻을 거역할 수 없어 다니는 것이고. 또, 하도 공부 못하면 끝장이라고 ‘쇠뇌’ 되다보니 아이 스스로도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불안’하기에 습관적으로 다니는 것이다.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아이대로 학원 접으면 ‘처질까’ 계속 다니고, 못하는 아이는 못하는 대로 학원이라도 다니는 ‘척’ 해야 부모도 안심 자신도 소속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쇠뇌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김일성만 북한주민들 쇠뇌 시킨 게 아니고 박정희만 우리 국민들 쇠뇌 시킨 게 아니다. 우리네 학부모들은 더하다. 우리네 학부모들은 김일성보다 박정희보다 더 아이들에게 공부 못하면 ‘끝장’난다고 매일 매일 쇠뇌 시키고 있다.

솔직히 나는 가계를 휘청거리게 하는 기십 만원의 학원비들을 볼 때면 내가 아까워서 못살겠다. 한시적으로 몇 달 다니며 공부 머리를 배워온다면 이해하겠으나 어린이집 시절부터 한번 시작된 사교육은 대입수능까지 끝임 없이 행해진다. 

때문에 사교육비는 수능까지 가기도 전에 ‘억’ 소리를 낸다.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했다면 혹은, 다른 식의 교육에 투자했다면? 왜 다들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막상은 창의성 없이 천편일률로 학원만 돌리냐 말이다.

부모가 ‘욕심’을 버려야 교육이 바로 선다.

서울시 교육감을 지낸 유인종 교육감은 말했다. 몇 해 전, 어느 기자가 우리교육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뾰족한 수가 없을까 물으니. 부모들이 ‘욕심’을 버릴 때 교육은 정상화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입시교육이 진저리가 나서 부모들이 하나둘, 사교육을 떠나 무심해 질 때 교육은 정상화 될 것이라고. 당시엔 ‘어느 하 세월에~~~’ 싶었지만 내가 봐도 그길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교육 안하면 나만 피해본다는 생각에서 제발 학부모들이 ‘발상전환’ 좀 했으면 좋겠다. 내가 볼 땐 사교육 안할 때 오히려 더 교육 효과가 나는 것 같다. 부수적으로 돈이 굳음(?)은 물론이고. 

내 아이는 올해 초등 3학년이 된다. 그동안 돈 들이는 사교육은 하나도 안했다. 굳이 했다면 지난 한해 내게서 피아노를 배운 것과 두루마리 문제집 한 권 푼 것이 전부다. 그래도 공부 잘하냐고? 주변에 학원 다니는 아이나 내 아이나 똑같다. 초등3년이 사교육 한다고 점수 잘나오고 안한다고 안 나오겠나. 다 거기서 거기다. 

대신 사교육을 안 하기 때문에 나는 부모로써 저 아이를 어떻게 도울까 나름대로 ‘창의적인’ 고민을 항상 하게 된다. 그리고 공부가 따로 있나. 어른들이 할 줄 아는 것을 하나 둘 배워 아이도 점점 스스로 뭐든지 ‘혼자’ 할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교육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지보다 내 삶을 즐기는 가운데 슬쩍 아이에게 삶의 요령, 재미, 지혜 혹은 소명을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흘려주려 할 뿐이다. 어른의 장점이 무언가. 아이들에게 들려줄 ‘지혜’와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만 들려주고 구체적으로 필요한 삶의 방식들은 아이 스스로 나이에 맞게 자신의 색깔에 맞게 점점 채워 가면 되는 것이다.

자식 삶의 도우미 아닌 자신의 삶을 살자.

나는 우리네 학부모들이 아이 교육에 혼을 빼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고 현재를 즐겼으면 좋겠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다들 뭐라 하는지. 백이면 백, ‘젊을 때 즐겨라. 자식 다 소용없다.’ 이구동성이다.

즐길게 얼마나 많나 말이다. 독서, 예술, 등산, 여행, 요가, 헬스, 자연감상, 봉사, 명상, 수다, 연애.....끝이 없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분수에 맞게 놀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들은 자신들에게 몸 바치는 부모보다 스스로 즐기는 부모를 더 좋아한다. 

결론은, 자식교육이고 뭣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우리 삶을 즐기자. 그게 남는 장사다.
못 믿겠다 하지 마시고 일단 한번 해보시라. 그게 아이도 살고 부모도 사는 길이다. 그래도 사교육을 안 하면 불안하다면 당신은 이미 사교육이라는 신종 마약에 중독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약의 대가가 지독하듯이 사교육도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본다.

언젠가 뉴스에서 보니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한 아이에게 기자가 물었다.

“이 다음에 뭐 되고 싶어요?”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왜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대통령이 되어서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고 싶어요.” 

부자 되려고 대통령을 한다고? 기자의 질문에 답한 그 초등생은 ‘대통령’이라했지만 평소 그 자리에 우리부모들은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혹은 각종 ‘사’자 붙는 직업들을 들이밀며 아이들을 닦달한다.  이게 우리 부모들의 자화상이다.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나. 

부모들이 대입하는 그 직업들이야말로 특히 신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임해야 하고 그것 없이 오로지 부자 되기 위해서 그 직업에 종사한다면 개인만 타락 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우리사회를 좀먹게 하고 썩게 하는 것이다.

좌우지간, 애들은 냅두라. 

애들보다 시간 없는 우리 학부모 먼저 즐기고, 떠나고, 탐구하자. 남는 돈 있으면 어학연수도 내가 가고, 배낭여행도 내가 가자. 애들은 알바해서 가든지 말든지.... ‘근데 엄마가, 혹은 아빠가 가보니 배낭여행? 어학연수? 봉사활동? 오! 그거 한번 해볼만하데!’ 라는 경험담이나 슬쩍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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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피자를 자주 먹을 때 보면 피자 고명 중에 50원 동전 크기의 까만 고명이 있었다. 색깔에 비해 먹어보면 맛있었다. 그래서 먹을 때 마다 ‘이게 뭐꼬?’하면서 먹었고 색깔에 대한 선입견으로 아이들이 먹기 싫어하면 얼씨구나 대신 먹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 까만 것이 알고 보니 올리브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이 올리브로 만든 기름이 식용유시장을 평정하고 있다. 예전 자일리톨 껌이 껌의 세계를 평정해 버렸듯이. 나 또한 서양 사람들이 주로 요리에 이용한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그리고 올리브유가 우리나라 참기름처럼 진국이라는 말에 기존 식용유에 비해 좀 더 비싸도 개의치 않고 썼다.

올리브유로 생선을 굽는 다든가 계란 프라이를 하면서의 느낌을 말하자면 어째 기존의 콩기름, 옥수수기름보다 삼박하게 구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엔 냄새가 좀 적응되지 않았으나 올리브유가 좋다니 자꾸 쓰면서 적응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던 와중 트랜스지방에 대해 말들이 많아지자 모 통닭업체가 자기네들은 올리브유 중에서도 최상인 '엑스트라 버진'을 쓴다는 광고를 하며 통닭가격을 2천원인가 올려서 팔았다. 그에 발맞추어 나 또한 어쩌다 한번 통닭을 시켜먹을 때 '단돈 몇천 원인데 뭐'하며 엑스트라 버진을 쓴다는 통닭을 시켜먹곤 하였다.

그런데 올리브유가 마트의 식용유코너를 거의 평정하듯 차고 들어앉자 어느 날 문득 회의가 들었다. 정말 저들이 다 100% 올리브유일까. 혹 색깔만 그럴듯한 것은 아닐까. 물론 시중의 올리브유는 각 회사들마다 정성껏 만들었을 것이다. 그 믿음직스럽고 세련된 용기만큼이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올리브의 존재를 가까이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 올리브기름의 맛과 향을 모른다. 참기름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에 참기름 맛을 확실히 안다. 시중에서 아무리 순순 참기름이라 해도 그것이 진짜 방앗간에서 깨를 볶아서 짠 참기름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주로 시댁에서 주는 깨로 직접 참기름을 짜먹기 때문에 대량 가공되어 나오는 참기름을 사먹을 일이 없는데 어쩌다 명절 선물 세트에 끼인 참기름을 한번 먹어볼라치면 정말 색깔은 똑같은데 맛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몇 년 전엔 그 이유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즉 업체들이 참기름처럼 보이려고 캐러멜 류를 넣었다는.

아무튼, 나이 좀 있으신 어머니들은 진짜 참기름 맛을 다 알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특별히 올리브유를 경험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진짜 올리브유가 어떤지 모른다. 진짜 올리브유는 내가 진짜 참기름과 시중 참기름을 구분하듯이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올리브유라도 가격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비싼 것도 있고 그냥 대중적인 것도 있지 않나 말이다.

물론 식용유회사들은 올리브유를 최대로 맛있고 정직하게 만들겠지만 시중참기름과 방앗간에서 직접 짠 참기름의 차이처럼 차이가 나는지 어떤지 우리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올리브유란 말만 믿고 너무 올리브기름을 남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올리브유도 결국은 기름이 아닌가. 지금 시대는 지방을 되도록 줄여야 되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조상들은 무슨 기름으로 '찌짐'을 부쳤을까


언젠가 멋도 모르고 참기름만으로 김을 구운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순도 100%의 참기름으로 구웠으면 그 만큼 맛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썼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식용유랑 섞어야 된다고 하였다. 참기름은 발화점이 낮아서 바로 타버리기에 탄내가 나는 것이었나 보았다.

"그러면 예전엔 무엇으로 '찌짐'을 했어?"
"그땐 들기름으로 했지. 들기름이 없으면 피마자기름으로도 하고. 요샌 슈퍼에 찌짐 부치기 좋은 기름들이 많으니 다들 흥청망청 쓰지만 예전엔 기름도 귀했단다."
"아하, 들기름이 있었구나."

그때부터 나는 들기름을 요리에 이용해 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중 식용유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였다. 있는 식용유 다 먹으면 그땐 정말 들기름을 써야지 해도 그 식용유가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질라 치면 또 시어머니께서 명절에 선물로 들어왔다면서 서너 병씩 주곤 하였기 때문에 도무지 기름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식용유를 들기름으로 대체한 계기가 왔다. 집들이차 대전친구네에 놀러갔다가, 김이 하도 맛있어서 왜 이리 꿀맛이고 하면서 친구네 머무는 동안 김만 싸먹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김이기에 이렇게 맛있지?"
"들기름으로 구웠어."
"들기름?"
"응, 경상도는 들기름 잘 안 쓰지. 충청도는 들기름 잘 먹어. 볶을 때도 들기름 많이 써."

"오호, 그렇구나. 난 들기름은 참기름에 비해 참스럽지(?) 못하고 한물간 기름인줄 알았는데.(웃음) 그러나 식용유보다는 낫겠지 싶어 한번 써 봐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했는데 진짜 이제부터는 써야 될까봐."

그 후, 시어머니께 식용유 대신 들기름을 먹겠다고 하며 들기름을 부탁하였다.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시어머님은 진즉에 들기름을 짜줄 것을, 하며 흔쾌히 응해 주셨다. 몇 번은 그렇게 얻어먹다가 이제는 그냥 들깨만 달라고 하여 내가 직접 방앗간에 가서 짜먹는다.

간장, 된장, 고추장에서 그러했듯이 들기름 짜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역시 조상들의 슬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기계로 볶고 기계로 짜지만 옛날엔 어떻게 기름을 추출했는지 그 방법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동안 부침이나 볶음요리, 혹은 생선을 구울 때 각종 식용유나 올리브유를 썼다면 이제는 들기름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물론 기름이 많이 필요한 튀김요리 같은 경우는 들기름을 쓰기엔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튀김의 경우는 일반 식용유를 쓰고 볶거나, 굽거나, 부칠 때는 꼭 '들기름'을 추천하고 싶다.

뱀발: 유럽에서도 올리브유, 가짜가 많다는 군요. 마치 우리의 시중 참기름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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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에 잠이 깨어 우연히 <버드가의 섬>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무너진 건물 더미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혹 유태인 수난사(?) 하면서 잠시 보니, 그러하였다.

무너진 건물 더미속에서 평소 키우던 생쥐와 더불어 위기의 순간마다 지혜를 발휘하며 살아가는

소년의 모습을 (이런말 하면 실제주인공에게 미안하지만)

'흥미있게' 그려 주어 잠이 확! 달아났다.

 

'우리 오를레브' 라는 작가의 자전 소설 <희망의 섬 78번지>를 영화화 했다는데

이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검색을 해보니 이 영화는 1997년 만들어 졌고 덴마크 감독이 만든듯~~ 소렌 크락- 야콥슨 이라... 처음 접하는 감독이다.

 이 감독의 다른 작품으로는 <트룰리 휴먼>과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가 있다는데,

<트룰리 휴먼>은 어떤 작품이고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는 또 어떤 작품일까?

보여주는 김에 엠비씨는 다른 작품들도 틀어주면 안될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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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룰리 휴먼 Et Rigtigt Menneske 2001
    from 마쵸킹® so macho king™ 2009-06-01 01:24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산된 오빠가 벽 속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언제나 대화를 즐기던 리자는 승용차의 앞자리에 그렇게 앉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의 출근길에 승용차 조수석에 탔다가 사고가 일어나고... 이떄부터, 부모는 각자 방황과 외도를 하게 되고,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외국인 같은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리자와 대화하던 그 오빠(P)였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고, 가르쳐줘야 비로소 배우고 실천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