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만남과 헤어짐, 그 일상적인 행위가 전선을 뛰는 내겐 늘 고역이었다. 정에 약한 나는 '만남이 곧 이별'이라는 이 바닥 생리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냉정함을 배워야 했고, 사람보다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기계적 습성을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전선의 '냉랭함'이 내가 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거친 전선에 익숙해져 갈수록 대신 수많은 도시 친구들이 떠나갔다. 내 몸에 흐르는 찬 기운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이해를 구할 수도 없었던 나는 떠나는 도시 친구들을 붙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나는, 만남을 곧 이별로 여길 줄 아는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외톨이가 되고 만 나는 말없이도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있는 전선으로 달려갔고, 그 전선에서 외로움을 달랬다. 177쪽


지난해 책이 나올 때 진즉에 사 두었던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 신문사)을 만 한 해를 묵혀 뒤늦게 읽게 되었다.

지난 <한겨레 21> 제 579호에 실린 '아시아 네트워크' 이상하게도 너무나 짠한 나머지, 정문태 기자가 그동안 '아시아 네트워크'를 늘 이런 '울림'으로 썼는데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했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즉, <한겨레 21> 579호의 '아시아 네트워크'에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위해 싸우는 수마트라 북쪽의 작은 지역 '아체'의 게릴라 총 사령관 무자키르 어머니의 인터뷰가 실렸었다. 정문태 기자가 쓴 무자키르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는 읽는 내내 나로 하여금 눈물을 글썽이게 했고, 묵혀 둔 정 기자의 책을 비로소 들게 해 주었다.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은 서*남아시아 곳곳해서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전쟁의 기록이자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값진 책이다. 그리고 미국과 그 우방들이 보도하는 전쟁의 실상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며칠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9.11 그 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정문태 기자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다큐멘터리가 액면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문태 기자의 책을 읽고나서 보았기 때문에 그 다큐멘터리가 철저히 미국의 입장과 생명만을 대변함에 보는 내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문태 기자의 전쟁기록은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엉터리 사실들에 일대 수정을 가해 주었다. 그 하나의 예로, 영화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폴 포트 정권'만이 행한 것이 아니었다.

'감동적인(?)' 영화 <킬링필드>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캄보디아 양민 학살은, '1975~1979년 폴 포트 정권이 '크메르 루주'를 외치며 죄 없는 캄보디아 양민 200만 명을 학살 했다'이다. 고로, '폴 포트는 세계 최 악질 살인자이다'가 우리 기억속의 결론이다.

그런데 진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책에 의하면, 캄보디아에서의 양민 대 학살은 '두 번' 있었다.

즉, 첫 번째는 1969~1973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주범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 기간 동안 캄보디아 전역을 폭격해서 60~80만의 캄보디아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1975~1979년 있었던 것으로 주범은 폴 포트 정권이다. 캄보디아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때 약 80~100만 명이 학살 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10년 동안 각각 미국과 폴 포트 정권에 의해 두 번에 걸쳐서 150~16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알면 알수록 더 나쁜 미국

오래전 이 땅의 대학생들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는 등 미국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이야기해도 무지한 당시의 나에겐 그것이 너무 추상적이었다. 세월이 흘러 미국이 우리의 오랜 우방이란 미망에서 뒤늦게 깨어나고 보니 미국은 어째 알면 알수록 더 '나쁜 놈'들이었다.

위에도 언급한 며칠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보았던 '9.11 그 후'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헨리 키신저는 전쟁의 산 증인으로 도도하게 테러니 전쟁이니 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그는 첫 번째 킬링 필드, 즉, 미국에 의한 캄보디아 양민학살 당시 안보고문으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아직껏 뻔뻔하게 행세하고 사는 것처럼 학살의 주범인 헨리 키신저 또한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 전문가'로 추앙받고 있는데 정문태 기자 아니었으면 헨리 키신저의 진실을 상당한 기간 모를 뻔했다.

나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크고 작은 40여개 전쟁판을 돌아다녔지만,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누구에게도 내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없었다...무용담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그 '과장'이 싫었고, 그 '거짓말'이 싫었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고' 같은 과장류도 '포화 속으로 떨어지는 낙조'운운하는 감상류도 나는 모조리 쓸데없이 전쟁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삿된 짓이라 여겼다. 114~115쪽

아무튼 이 책은 전선의 실상을 왜곡 없이, 가감 없이 기록한 책이다. 미국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한 많은 전쟁과 학살, 군부독재와의 힘겨운 투쟁을 하는 나라, 그리고 분리 독립을 원하는 소수 민족들의 투쟁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엇보다 진실만을 얘기하고자 하는 정문태 기자의 입 무거운, 발로 뛴 전쟁기록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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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0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은 책입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비연 2006-03-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읽고 갑니다^^

폭설 2006-03-0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비연님.........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멋진 봄날을 맞이하셔요.

비로그인 2006-09-12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읽었는데 이번에 동남아 갈때 미얀마를 갈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김재명의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도 재미있죠. 정문태,김재명,강인선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