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물터럼 터져나왔던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보며, 유행처럼 번지는 각종 시국선언을 보며 
이건 뭐냐 하고 들었던 생각. 잘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마땅치 않은 생각의 파편들이 날라다녔다.

이를테면, MB의 국정기조만 바뀌면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물론 이 정부 국정기조가 사람을 아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고 못살게 하고 열받게 하지만 말이다) 엠비아웃이 설령 된다고 해도 도로 노무현 아닌가? (난 그때도 괴롭고 불편하고 짜증나고 살기 어려웠는데...)

정권을 비판하고 대통령을 욕하기는 쉽지만 (요즘은 이도 쉽지 않은 형국이다) 역시 대안을 내놓는 것은 어렵다.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쉽지만 (어느 정도는 정당하기도 하지만) 책임은 그를 뽑았거나 묵인했던 사람들, 더 나아가 한미FTA를, 비정규직법을, 뉴타운과 개발정책을, 대추리에서의 경찰폭력을 묵인했거나 받아들였던 한국사회가 함께 나누가져야 하고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뭐 대안 비스무레 한 거라도 나오는 거 아닌가 싶다.   

이런 파편들을 이어붙이는데 아래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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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재’를 생각한다 
- 레디앙, 김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민주주의 vs 독재

노무현 사망 이후 민주주의, 독재 등 말이 등장하고 있다. '담론' 차원에서. 담론이라는 면에서 독재나 민주주의가 세력관계를 반영한 적이 오랜 되었는데, 좀 새삼스럽다.

그럼 '독재'란 무엇일까? 담론 수준에서 독재는 '군부지배', '일당-일인의 전횡적 통치', '억압적 통치' 등이 아닐까? 요즘 보수정당이나 일부에서 자주 쓰는 '소통의 부재'란 아마도 시민사회와 반대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부와 다수 여당이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좀 꼼꼼하게 살펴보자면, 이는 시민사회내 다양한 요구를 정당이나 정책을 통해 대변하지 못하는 '이익매개 기능'의 약화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는 곧바로 '정당정치의 미발전'으로 이어진다. 예전 말로 치자면, 대의제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되돌이켜 보면 이전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졌나 질문하면 그 역시 아니다. 포퓰리즘적 통치에 기초한 정당제와 대의제의 약화는 2000년대 내내 지속된 현상이다. 그래서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고, 시민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정부’, ‘참여정부’ 때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왜 독재나 소통 결여란 문제가 제기될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자. MB정권은 이전 정권에 비해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사용이 잦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강력하다 등이 이를 보여주는 주된 현상들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정권에도 사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기구도 작동했다. 불안정노동, 구조조정,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기억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독재라고 부르는 근거는 아니다.

이는 '대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담론 수준의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좁혀진다. 다시 1987년 수준의 민주주의로 회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보면 모든 자본주의 국가와 정권은 독재이다. 반동적 독점자본의 정치적 테러독재 형태를 아주 예전에 파시즘이라 불렀듯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부르주아 독재이다. 다만 정권 형태의 차원에서 '누가 집권'했냐에 따라, 반동적 부르주아지냐 아니면 자유 부르주아지냐에 따라 그 형태상 차별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런 엄밀한 논의를 떠나서, 담론 수준에서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자고 대중들에게 외치면,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그 민주주의는 87년 제8차 개헌에서 규정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즉 민주주의의 계급성이 아주 쉽게 망각된다는 것이다. 지금 운위되는 민주주의는 이른바 독점자본의 정치적 외피로서 민주주의이다. 그 외피에 상처를 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대항하자는 것이 현재 시점이다.

이 이야기를 하니, 문득 18년 전 논쟁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1991년 5월 강경대 군의 테러 치사 사건 이후 사회운동은 한 달이 넘게 거리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다들 파쇼타도-민주주의를 외쳤지만, 문제는 대안이었다. 에피소드 같은 논쟁이었지만, 어느 세력은 '파쇼 타도-민주주의 쟁취'를 외쳤다.

여기서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란 문제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도 한편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다른 한편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아니면 과도정부 슬로건을 외쳤다. 적어도 당시 NL이 주장했던 '국회해산-즉각 총선'은 대안이 아니므로, 노동자 권력을 위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에 비해 2009년은 많이 후퇴한 셈이다. 물론 제헌권력, 국민소환 등이 제기되지만 아직은 논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권력의 항상성

이렇게 긴 이야기를 내가 해버린 하나의 이유는 '독재'란 담론이 지닌 자기 한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용하더라도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인지되지 않았을 때, 민주주의 투쟁은 대안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고 소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억압적 국가기구', 이른바 공권력의 문제다. 일단 전제해야 하는 것은 현재 국가기구의 작동은 80년대적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이른바 국가-자본관계에서 자본의 지배력이 전일화된 상황에서, 공권력의 동원은 과대성장한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자신의 장기적 정치이익 - 이른바 경제위기 극복이나 사회안정 등 - 을 위하여 공권력의 노골적인 사용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총자본과 국가간 이해의 수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MB정권은 자본분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공권력을 주로 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1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시절, 이른바 '이완된 독재' 혹은 '시민사회의 팽창' 등이 논의되며, 국가권력과 전면적인 투쟁인 '기동전'이 아닌, 시민사회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포위하고 이들을 장악하는 진지전 논의가 '그람시'를 원용하며 사회운동에 들어왔다. 다만 그때는 그람시를 아주 잘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국가=억압', '시민사회=헤게모니'라는 얼토당치 않은 말을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해석했다. 물론 그람시 소개서 중에 그런 해석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늘 억압적이며, 최종 순간에 자본(총자본)을 방어하기 위해서 강제력을 준비하고 예비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며 억압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현재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은 '독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상황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국선언이 확대되는 와중에 '시민사회는 독재에 맞서고 있다'는 주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사회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조직적인 면에서 분화가 공고화된 상태이다. 지금 시국선언은 시민사회내 MB정권의 공권력의 과잉 사용과 시민사회내 이익매개 기능의 단절을 비판하며 나온 - 모두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 반대연합이란 의미에서 -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재와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 진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현재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대안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안이 퇴영적인 만큼 설득력을 시민사회에서 좀 더 넓게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혹자는 87년 6월 이전을 회고하며, '좀 더 대중적인 슬로건'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대중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민사회내 존재하는 대항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죽음 곁의 현상에 주목해 보자

추모정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독재 전선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전선이 가진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에 그러하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지에 대해 대중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이 점에서 나는 죽음으로 형성된 추모정국의 생명력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대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죽음과 추모에서 한 발 떨어져서 추모 주위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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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6-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 목소리를 내고 온도를 높여야 할 시점이라 필요는 하다고 생각해요. 시국 선언 형식이 아니더라도. 의견 광고라도. ^^ 그런 의미에서 또 참여하신 것일테고요. ^^

머큐리 2009-06-2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융위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대립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대중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제시해야할 구호는 무엇인지.. 사실 독재타도는 이 시점에서도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듯 한데...프레임을 더 앞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구호가 무엇인지..그게 참 답답합니다.

나무처럼 2009-06-25 19: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가진자와 빼앗긴 자... 그래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오늘 어쩌다보니 전철연이라고 하는,
한나라당 모 의원 말대로라면
"죽음 가지고 장사 해먹는 사람들"과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우리 일행 중에 한 명이 밥먹다 무심히 

"부모님 집도 재개발 지역이 되어서..."

전철연 어떤 분이

"어딘데요?"

"안암동이요."

"거기도 전철연 있어요."

"아니 그럴 형편은 안 되고"

"그렇죠" 

다른 전철연 분이 밥 먹으면서 고개도 들지 않고

"그냥 얼마주면 '고맙습니다' 그러고 나와요."

(웃음)

또 다른 전철연 분이

"아이고, 부족하면 내가 보태겠습니다, 그러고 나오는 게 상책이죠."

(웃음) 

다들 화기애애...
웃으며 저녁식사를 마무리했다. 
용산참사로 아직도 지키고 있어야 하는, 150일 넘게, 이제는 문상객도 별로 없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의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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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2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드실텐데...웃음을 잃지 않아 다행입니다...

2009-06-22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짜가 좀 지난 기사지만 아직도 머릿속 한 귀퉁에에 들어앉아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일지도 모르는 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관계도 명확치 않은 추측성 기사...

누구는 빨치산에게 무덤은 사치라고 말했다지만...
지상에서 혁명을 꿈꾸었던 이에게 묘비가 무슨 의미이겠냐만은...

그가 살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로자일지도 모르는 진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충격보다,
그가 맞이했던 생의 마지막, 그이의 죽음이 충격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가서 꽃 한 송이를 얹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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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여성 혁명가 로자 90년만에 시신 발견

 
‘붉은 로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독일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사진)의 시신이 숨진 지 90년 만에 베를린의 병원 지하실에서 발견됐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베를린의 한 법의학자가 룩셈부르크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 제보를 해왔다고 지난 30일 보도했다. 이 시신이 발견된 곳은 베를린자선병원 의학사박물관의 지하창고. 이 병원 법의학연구소의 미하엘 초코스 소장은 얼마 전 창고에서 머리와 손발이 없는 오래된 시신을 찾아냈다. 그는 시신에 딸린 부검소견서가 불분명하고 미심쩍은 점이 많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컴퓨터 단층촬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시신이 40~50세 여성의 것이며, 한동안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여성이 골관절염을 앓아 양쪽 다리 길이가 달랐다는 점도 확인했다.

초코스는 “이는 룩셈부르크에 대해 알려진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며 이 조사결과를 슈피겔에 제보했다. 룩셈부르크는 선천성 관절염으로 양쪽 다리 길이가 달라 평생 절뚝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47세였던 1919년 1월 우파 민병조직원들에게 붙잡힌 뒤 고문 끝에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란트베어 운하에 내던져졌던 시신은 얼음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5개월 뒤 수습돼 베를린자선병원에 옮겨졌다. 그후 검시를 거쳐 시내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묘소는 이후 좌파의 순례지가 됐고, 해마다 묘소 주변에서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추모행진이 열려왔다.

하지만 초코스는 “당시 묘지에 묻힌 시신의 검시기록에는 골관절염이나 총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서 다른 사람의 주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묘소는 나치정권 치하에서 훼손돼 유골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재조사할 방법은 없다. 초코스는 “이번에 발견된 시신의 머리가 없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두개골 수집이 유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면서 “민병대가 살해한 뒤 손발에 돌을 매달아 던진 탓에 수족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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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2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측성 기사인가요???
 

 

 

 

 

 

 

 

외부자의 시선이란 것은 이토록 소름끼칠만치 객관적인가 보다.
그것이 사실인가, 혹은 진실인가, 올바른 관점인가는 별도로 하고 말이다.
강준만 교수가 어디선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한국전쟁과 그 후과라는 취지의 글을 읽은 적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차피 반공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나라이고
분단은 한국의 생존방식이었으니까.
인민이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인민 중에서 국민을 선별했던 사회. 
그 기원을 엿보는 것 같다.  
 
문득 위에 있는 두 권의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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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갈라놓은 38선, 혼을 갈라놓은 전쟁 [한겨레21 2009.06.19 제765호]

[기획] 한국전쟁 직후 발간된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의 한국 르포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폭풍이 몰아치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독자 유현준씨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발간된 1950년 7월8일치 주간지 <파리마치>의 한국 관련 특집기사를 찾아내 보내왔다. 이 가운데 <파리마치> 특파원이 전쟁 발발 직전의 한국을 둘러보고 쓴 르포를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편집자

 

» 북위 38도 경계선은 남한의 작은 진지가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를 따라 나 있다. 오른쪽 영토는 공산 진영이고, 왼쪽은 남한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역사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세상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사태가 발발한 나라는 ‘조용한 아침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였다. 물론 그곳에 사는 당사자들에게 이런 사태는 새로운 느낌의 아이러니는 아니었다. 사실 1천 년 전부터 이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하늘의 제국’(중국)과 ‘태양이 떠오르는 제국’(일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유럽에서 놀라움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러한 사태가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한국은 늘 전쟁의 피해를 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는 의미-역주). 사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시적인 표현은 점점 더 복잡하고 위험한 느낌을 내포한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과거,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구실을 하는 지역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은 둘로 나뉜 전세계 양 진영 사이의 최전방 충돌 지점이 된 것이다.
 

지리학적 요인으로 항상 북에서 남으로

이 나라에서 역사는 지리학적인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기는 한데, 유럽이 동구와 서구로 불리면서 서로 맞닥뜨리고 있다면, 한쪽 방향만을 가진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졌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김일성 장군이 일으킨 침공 방향도 절들이 있는 위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1천 년 전에 있었던 불교의 전파와 같은 흐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역사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중국 문화는 항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또한 한국 전역 여기저기를 통과하는 유일한 길과 철로의 방향이기도 하다. 한국의 북쪽에는 만주가 있고, 그 북쪽은 시베리아다. 남쪽으로는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왕래하는 페리호의 체류장이 있는 섬나라, 일본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파리에서 기차표를 사면,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추상적인 철의 장막’이랄 수 있는 38도선이 없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가려면 도쿄로 먼저 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는 것이 더 편리한 상황이다.

 
» 1950년 7월8일치 <파리마치>(68호) 표지

한국에 도착하면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하늘들 중 하나와 그 파란 하늘 아래 점점의 금빛 섬들이 있고, 그 섬들 뒤로 들쭉날쭉한 해안선들과 엷은 보라색 산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정경이다. 북한군들이 두 번째 침투 고지로 밀고 들어온 강릉 지역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섬들을 모두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 나라의 방어를 위한 손쉬운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섬들은 해적들의 소굴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도 중국 배들이 나일론 허리띠에서 라이터 그리고 아편에 이르기까지 각종 물품들을 밀거래하는 거처이기도 하다. 이런 밀수입의 규모가 너무 커서, 미국은 일본에 해양경찰 초계정 부대를 다시 만드는 것을 허용해야만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비행기는 서울 근교의 비행장인 김포에 착륙한다. 김포에서 수도까지 연결된 도로는 매우 훌륭해서, 사람들은 이 길을 지나가며 한국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현대화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한국은 그다지 현대화돼 있지는 않다. 이 길은 남북을 잇는 철로 길과 함께 실제적으로는 이 나라의 유일한 도로이기 때문이다. 다른 길들은 거의 모두 진흙 길인데다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데, 그것은 농부들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개울이나 도랑을 끊는 일을 제멋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도로와 오래된 전통 길 사이의 이 대비는 한국 전체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젊은 한국과 옛 한국이 혼재

이런 대비적 느낌은 바로 두 개의 한국이 있기 때문이다(일본이 만들어놓은 ‘젊은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놓은 ‘옛 한국’). 한국만의 한국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한국의 대도시를 보면, 이 두 양상은 서로 이웃하고 있고, 그로 인해 극렬한 대립적 형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이라는 제국 도시는 안남(Annam·안남은 고대 베트남을 가리키는데 주로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을 식민화했을 때 사용하던 명칭이다. 기자의 이러한 비교는 안남의 수도에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극명하게 대비되며 공존하고 있다는 예를 들어 한국의 상황을 프랑스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려 한 의도로 볼 수 있다-역주)의 수도 위에처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완전히 순수한 중국식 도시였던 것이다.


 

» 이 지도는 한국에서 방금 발발한 위기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보여준다. 남과 북이 붉은 진영과 미국의 전략적 위치들로 대립되고 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반도는 극도로 긴장된 영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유럽의 소국왕들이 자신들의 작은 베르사유궁전을 갖고 싶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들의 수도를 작은 베이징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서울에는 용무늬와 신기한 석상들로 치장된 많은 사원들이 벚나무에 둘러싸여 연못 속 연꽃 사이에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황궁 앞에는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축제날이면 그 길에서 백성들은 왕좌에 앉아 있는 자신들의 국왕을 주시할 수 있었고 칭송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일은 오늘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황궁을 상징하는 가장 중심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세웠다. 물론 더 이상 이 나라에 황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궁들이 남아 있음에도 한국의 수도는 점점 더 유럽 도시 변두리와 흡사해져 가고 있다. 좀더 근대적인 외형을 보여주고 있지만, 훨씬 더 지저분한 모습으로….

한국에서는 도로라든지 공장, 의상, 정치 예절 등 현대적인 모든 것들이 일본식이다. 그 외에는 모두 중국에서 온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중국적 이미지는 사실 중국에서조차 더 이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고고학자들을 위해서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한 현대 문물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기원으로만 따져서 1950년이 되었을 뿐이지만, 한국인은 이미 4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난방 시스템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


시골 사람들은 나무와 벽토로 지어진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다. 이 집들은 만주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겨울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대나무와 오리목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겨울 기온이 영하 25도까지 내려간다. 이 집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붉은색 초가지붕들이 거의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게 붙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 초가지붕 위에 고추를 널어 쉽게 말릴 수 있다. 대부분 이 초가집들은 U자 형태를 띠는데, 센 바람이 돌아나가게 하는 구실을 한다. 문 위에는 보통 악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요란스러운 색깔을 한 무시무시한 형상의 전사들이 그려져 있다. 나무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의 난방 시스템은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경제적이다. 그것은 바닥에서 이뤄지는 시스템이다. 나무로 된 이 바닥은(이 글을 쓴 기자는 한국의 방과 마루에 대한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한국의 방바닥이 나무로 돼 있다고 썼다-역주) 평평한 돌이 아래에 깔려 있고, 그 위로 큰 노란색 종이가 붙여져 있는데, 이 종이는 마치 가죽 같은 느낌을 준다. 난로 구실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 바닥돌이다. 여름이면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데, 이때 이 돌들이 한국의 집들이 찜통이 되는 걸 막아준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도 발을 따듯하게 할 수 있다. 시골 사람들은 이러한 시스템의 바닥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잔다. 또 다른 종류의 이불들이 있는데, 계절에 따라 각기 편한 게 사용된다. 한국에서 잠을 자는 것은 크레프(서양식 빈대떡)를 잘 붙이는 기술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크레프의 한쪽 면이 잘 구워지면 뒤집어서 다른 면도 잘 구워지게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즉, 잠을 잘 자야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이뤄져 삶의 리듬을 찾게 되고 그 리듬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은 한국의 얼굴에 깊이 각인된 중요 문제들 중 하나다. 우선, 불은 제사의 대상이거나 종교적 객체라고 할 수 있고, 최소한 미신적 대상인 것은 확실하다. 모든 한국인은 ‘열 세대 이상’ 이전 세대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불꽃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 그 세월 이상으로 불이 후세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절대 그 불꽃이 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그 불이 꺼진다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 안 좋은 재앙의 전조가 되고, 다른 하나는 그 불을 다시 지피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성냥은 아직 사치스러운 수입품 중 하나고, 라이터는 거의 밀수품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산들이 있지만 건조한 바람으로 황량하고, 벌판은 다시 경작하기 힘들 정도로 나무가 벌채된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음에도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나라 의복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사치스러운 의복 중 하나를 입는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의 한국 의복은 기원전 1950년 중국인들의 의복이다. 흰색이 지배하고 있다. 남자들은 비단이나 가벼운 순면으로 된 깨끗한 긴 옷을 입고 있다. 마디가 있는 지팡이를 들고, 중국식 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특히 그들이 머리 위에 쓴 말총으로 만든 신기한 ‘새집’ 같은 모자는 호박(琥珀)으로 장식된 끈으로 턱에 매여져 있는데, 긴 옷과 함께 이 모자를 쓴 모습은 마치 되는 대로 걸어가는 중국 고관의 위엄을 보여준다. 한국에 기독교 전파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원뿔형 모자를 통해서였다. 사실, 1910년까지 한국인들은 정체가 드러나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섬나라로 향하는 중국 배에서 내린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미션을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나라 방식대로 의복을 입는 것이었다.



» 조용한 아침의 무대는 격렬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미군식으로 무장한 이 남한 병사 3명은 남북한 경계선 바로 위에서 촬영됐는데, 대공습이 있기 전 이 장소에서 여러 차례의 작은 교전들이 일어났다.

 

땅딸막한 일본인, 다듬이질 이해 못해


이 옷들은 1년 내내 같은 방식으로 입는다. 겨울에는 비단이나 면으로 된 솜뭉치를 넣은 같은 종류의 겉옷을 입을 뿐이다. 저녁이면 그 솜옷을 떼어내고, 아침이면 다시 붙여 입는 식이다. 한국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우아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해주는 다리미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은 다리미질을 다듬이질로 대체하고 있다. 겉옷을 떼어내 빨래를 한 뒤, 그 옷을 편편한 돌 위에 깔아놓거나 나무 원기둥 같은 데에 감아놓고 몽둥이 같은 것으로 옷 위를 두들긴다. 그렇게 한 뒤 겉옷을 다시 옷 위에 붙이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의 의복 관리에 드는 시간이면 ‘해가 뜨는 나라’(일본을 지칭)를 위해 더욱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녁 이후의 빨래와 다듬이질을 금지하려고 했다. 땅딸막하고 촌스러우며 실용적인 의식을 지닌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흰색은 사치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 몸맵시가 좋고 키가 큰 순박한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절대로 필요했다. 이 점에 한해서, 일본의 식민화는 완벽한 실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을 ‘곡창’이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남한은 지금까지 한국인들을 제외한 모든 주변 국가에서 차례로 곡식을 가져가는 일종의 창고였다. 일본인들은 고작해야 수수나 조를 남겨두었지만, 그 생산량으로는 한국인들이 골고루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인들의 식량에는 유일한 식단인 김치가 있는데, 김치는 1년 전에 준비해둔다. 가끔 잔치 같은 특별한 날에 약간의 생선이 한국인들의 식단에 곁들여지기도 한다. 김치 요리법을 소개해본다. 큰 토기 항아리(어떤 항아리들은 무늬로 장식돼 있다) 안에 썰어놓은 오이와 배추를 넣는다. 그리고 고추와 마늘, 으깬 새우와 식초를 더 넣으면 끝난다. 항아리 입구를 밀봉해 겨울 내내 담근 상태로 놔둔다. 봄이 되면 그 밀봉을 여는데, 이때에는 뚜껑을 열자마자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 호놀룰루 억양과 ‘국모’ 간주에 거부감


한국의 주요 재원으로 뽕나무 경작이 있다. 뽕나무의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비단은 미국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또 다른 주요 재원은 인삼이라는 약용식물의 재배이다. 인삼은 검은 무의 일종으로 초가 같은 작은 지붕으로 덮어서 경작하는데, 그 경작지는 마치 작은 마을의 축소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인삼은 강장 효과가 기나피(강장제인 키니네의 원료)보다 더 우수해서 활력을 유지해주는 강력한 보조약으로 취급된다. 이렇게 생산되는 모든 인삼은 전부 중국으로 넘어간다.



경제적인 면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융성했으나 지금은 피폐해진 제국인 한국은 종교적인 면조차 몰락의 징후를 보인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초췌해진 국가가 된 것이다. 4세기 말께, 이 나라는 극동으로 통하는 중국 문명의 가장 원대한 대로였다. 수많은 건축물과 동상들, 도자기와 그림들이 당시의 부흥을 증명하고 있다. 그처럼 이 거대한 조각 동상(불상)들이 개성의 38도선 앞에서 오늘날에도 보초를 서고 있다. 당시 일본의 가장 뛰어난 건축가들은 한국인이었다. 한국은 전체적으로 보아 불교국가였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아직도 불교국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2천만 백성 중에서- 정확하게 우리가 숫자 통계를 가지고 있는 곳은 남한뿐이다- 절에 항상 다니는 불교 신자는 8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 신봉자와 얼마간의 신토이즘(천황에 대한 신앙) 초기 신자들,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도 활동에 의해 개종한 약간의 신자들, 일본 경찰에 의해 의무적으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신을 잘 믿는 동시에 무신론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미신에 쉽게 빠지는 물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천장에 걸어놓은 작은 흰나무 제단을 통해 자신들의 조상을 숭상하고, 터줏대감 신들이 자신들의 초가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작은 항아리 속에 가둬놓고 있다. 그들은 액일을 두려워하며, 상중일 때는 감히 뱀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데, 뱀뿐만이 아니라 빈대같이 작은 곤충을 포함한 어떤 동물도 죽이지 못한다. 시골에 가면 한 쌍으로 되어 서 있는 토템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은 2m 높이의 나무 말뚝으로 기괴하게 조각된 머리에 갓을 쓰고 있고, 요란한 색이 더덕더덕 칠해져 있다. 그 말뚝 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몇cm 더 큰데,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큰 말뚝에는 ‘천하대장군’, 작은 말뚝에는 ‘지하여장군’. 마을 노인들은 이 말뚝들을 경외하고, 젊은이들은 더 나이가 들기를 기다리면서 그 옆을 지나칠 때 말뚝들을 보지 않는다.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발달돼 있지 않다. 1910년 일본의 침략 때 피신했던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라는 의미 있는 단어와 함께 1945년 미국인들의 뒤를 따라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조국에 남은 사람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고국의 언어와 관습들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같은 경우의 큰 예로 이승만 대통령을 들 수 있는데, 그가 한 연설문에서 스스로에게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붙일 때, 그의 호놀룰루식 억양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실망시켰다. 같은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오스트리아 출신의 이스라엘 여자)를 ‘국모’(國母)처럼 간주하며 말을 했는데, 그와 같이 아내를 내세우며 소개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거의 무례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승만이 자신들의 아버지고 그의 아내가 자신들의 어머니라면, 자신들은 잡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 조용한 아침의 무대는 격렬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미군식으로 무장한 이 남한 병사 3명은 남북한 경계선 바로 위에서 촬영됐는데, 대공습이 있기 전 이 장소에서 여러 차례의 작은 교전들이 일어났다.

 
북한 세계 3위 금 생산국 됐을 것 

오랜 세월을 통해 분단과 억압 그리고 침략당하는 역사를 가져온 이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슬로건은 공산당을 무찌르는 방법을 잘 아는 것으로 귀결돼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단일화되게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들이었다. 한국인들이 항상 알고 있는 정부 형태라고는 오직 ‘경찰국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미국의 민주주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습은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 이외에는 동물을 포함한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두 가지 분류법밖에 없었던 이 나라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가축처럼 취급됐다. 이전에 도시는 일본인들에 의해 각 집들을 묶어놓는 식으로 구분됐고, 그렇게 묶인 동아리의 대표가 정치적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이 시스템을 해체시키려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고, 일본인들의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장·면장·읍장 등으로 아무리 작은 마을 단위라도 대표제로 구성됐음을 말한다-역주).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애국심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정치 문제가 모든 한국인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라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미군과 소련군의 군사작전 대치점에서 만들어진 38도선은 마치 삽질로 지렁이를 정확하게 절단내듯이 이 나라를 남과 북으로 절단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모든 광산자원이 집중돼 있고, 그중 90%는 석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풍요로운 나라이다. 일본인들이 그 전에 이 나라의 중요성을 알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곳의 금광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문가들이 평가한 바에 따르면, 이 금광들이 현재 개발됐다면(세계대전 중에 일본인들이 이미 다 파헤쳐버렸다) 북한은 세계에서 세 번째 금 생산국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북한 사람들은 지금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쌀과 다른 작물들은 남한에 집중돼 있다. 그 결과 먹을 것을 찾아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고, 전기 부족으로 인한 추위와 암흑을 피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3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공산당의 갑작스러운 침략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사실 1년 전부터 38도선으로 갈라진 양쪽에서는 작은 국지전으로 인해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1년이면 45일간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기에 시작됐다. 그때까지 나라 전체는 거의 의무적인 오침이 요구되는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 더위 때문에 모두 그늘 속에서 쉬고 있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성스러운 휴식을 파괴하면서,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혁명가 김일성은 거의 국가적 신성모독 행위를 범한 것이다. 이제 38도선은 한국의 땅만을 둘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까지 갈라놓고 있었다. 철의 장막은 그들의 신(神) 위에까지 떨어진 것이다.

번역 유현준 프랑스 리모주 법원 번역·통역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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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잡지에서 이번 호 좌담 주제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다.
기획을 하며 뽑아 놓은 몇 가지 질문들. 
패널들이 어렵다고 난리다.
잘 되야 될텐데....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청와대, 국회 등에 댜헌 전의경에 의한 365일, 24시간 경비) 
전의경제도는 일상적 준계엄 상태가 아닌가
경찰의 방어적 질서유지에서 적극적 법집행으로 전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 

 

4.19, 6월항쟁의 역사에도 집회시위가 아직도 불온한 이유는 무엇인가
집회시위는 능동적으로 변화발전하고 있나, 수동적이거나 퇴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집회시위의 자유가 인권, 기본권으로 공인받지 못하는 이유는
집시법 개악 저지 전술은 효과적이었고 시의적절했나, 또는 유효한가

 

집회시위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영역인가, 저항권의 발동인가
소수자, 인권운동에서 집회시위는 어떤 의미인가
직접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에서 집회시위는 아직도 유의미한가
사상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와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빈곤한 사람들, 힘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집회시위는 무엇인가
집회시위에서 물리력 행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경찰폭력(물리적 폭력, 불법채증, 도발적인 선무방송)에 대한 구채적 대응책은 뭔가
 



예전에 잡지에 실었던 기사들이 혹 도움이 될라나 모르겠다.
(어쨌든 하이드 님이 가르쳐준 글상자를 써먹어보니 한결 이쁘다^^)

 '대한민국에서 데모하기' 

'합법적 불법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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