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 선생님,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한 뒤풀이에서 어떤 분이 우스갯소리로 제게 건넨 말입니다. 사연인 즉은 이렇습니다. 평화박물관이라는 곳에서 ‘국가폭력과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서는 지난 8월, 27년 만에 간첩누명을 벗은 이른바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심에서 판사가 무죄라고 선고하면서 저보고 이제 국가를 좀 생각해달라고 그래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국가를 생각해줘야 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저를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간첩누명을 쓴 것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하지 말라는 걸까요? 저를 간첩으로 만든 건 전두환인데, 손해배상금은 전두환이 아니라 여러분이 낸 세금이잖아요. 제가 그 돈을 받는 게 맞을까요?”

그분은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너무 속상해서 한 500억 쯤 받아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떤 유명한 시민운동가는 1조 원을 청구하라고 했다내요. 그 말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왜 50억도, 5000억도 아니고 500억이라고 했는지. 가끔 로또 당첨을 꿈꾸는 저한테 500억 원이 어쩌면 상상 가능한 최대액수였던 모양입니다. 안기부에 끌려가 100여 일이 넘게 여성으로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문을 받고, 그 고통으로 인해 남편과의 관계, 자식과의 사이마저도 엉클어져버린 그분과 그분의 친척들에게 사실 무엇으로 보상이 가능할 것이며 과연 어느 누가 합당한 배상액을 계산해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나라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악의를 가지고 한 불법행위에 대해 형벌적인 의미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인데 미국의 어떤 식품업체가 고의로 유통기한을 넘긴 상품을 팔았다가 회사 문을 닫게 되었다는 뉴스를 아마 접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국가기관, 그 중 한두 부처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간생심 조작이니 은폐니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게 말이죠.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만들어지고 용산참사의 진실이 은폐된 채 어이없는 재판이 이뤄지고 있으니 그저 로또 당첨과 같은 한낱 망상에 불과합니다.

저는 요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국가란 참 대단한 것이군, 생각합니다. 바로 우측통행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별 걸 다 간섭하네, 우습기도 했는데 막상 사람들 보행방향이 눈에 띄게 바뀌는 걸 보면서 국민들 걷는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는 국가가 새삼 두려워졌습니다.

지하철역마다 “편리하고 안전한 우측통행, 세계와 우리의 문화”라는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전통은 우측통행인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좌측으로 바꿨고 해방 후 미군정은 차량은 우측통행으로 바꾸었지만 좌측보행은 바꾸지 못해 차는 오른쪽, 사람은 왼쪽으로 80년이 넘게 흘러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이미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다 우측통행이고 그것이 대다수 오른 손잡이에게도 편하고 안전하다는 설명이니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좌측통행을 세뇌당한 저는 뭔가 단단히 속은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편리하고 안전하고 선진국도 다 그렇게 한다는 글귀를 보면, 자고 일어나면 간첩이 생겨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 판검사들도 좀 억울한 사람은 있겠지만 이게 편리하고 안전하니까, 쭉 그래왔으니까, 자신들보다 더 똑똑한 이들도 다 그러고 있으니까, 했을 테지요. 혹시 재심 판사는 그런 선배 판사들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의 생리이니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떤 판사들은 과거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는데 그는 자신이 맡았던 사건도 아니고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책임질 것도 없다며 제3자인 양 하는 것일까요?

1985년에 나온 조세희의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보면 1980년 ‘광주’와 ‘사북’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알리바이라면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갖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알리바이라는 말은 범죄현장에 자신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리바이가 있다고 해서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두환에게 그 29만 원이라도 받아내야 할 것이고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배상금을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용산참사 재판에서 보듯 정부는 자신들의 범죄가 정당한 것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강변하고 사법부는 이에 대해 자기들만의 법 논리를 내세워 면죄부를 줍니다. 청산해야 할 과거사의 목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기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알리바이를 부정하고, 무수한 국가폭력에 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 그래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연대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인종주의 문제와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뤘습니다. 『사람』은 한국사회의 인종주의가 위험수위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며 경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인간이 물건 취급을 당하고, 배제되고 추방되고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는 누구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사회일지 몰라도 다른 누구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사회입니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살고, 정리해고만이 회사와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라 강요하는 사회에서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희생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종차별과 정리해고, 노동탄압에 대한 알리바이도 도처에 널렸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의 문제입니다. 희생양을 갈구하는 사회, 그것으로써 존재이유를 찾아야 하는 공동체는 참으로 허약하면서도 그래서 더욱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니까요.



- 사람 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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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하면 펠레, 권투하면 알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경향신문을 보니 그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남 참전을 거부하면서"난 베트콩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단다. 참 쿨한 말인데 한국에서 유명 스포츠 스타가 이런 말을 했다면 며칠 못 버티고 국적을 바꿔야 했으리라. 물론 알리도 이 발언 때문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하고 선수 자격마저 박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기의 대결이 된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경기"가 열릴 수 있었고.     

아프간에 파병을 한다고 한다. 탈레반에게 감정이 있는 이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피랍 사건의 피해자들이 그럴 것이다. 한편 알리처럼 쿨하게 "난 탈레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아프간에 대해 관심도 없어"라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파병은 감정의 문제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이건 이른바 이라크 파병을 추진하고 결단했던 참여정부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파병과 같은 외교적 행위에서는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익과 실용이 제일이라는 것. 그런데 그 국익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용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실용인 것인지가 그 때도 지금도 생략되고 있다. 그러면서 명분이냐 실용이냐라는 잘못된 이분법으로 국민 여론을 몰아넣었고 지금도 그런 것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명분과 실용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반면 국익에 관해서는 아주 잘게 구분해서, 어떤 집단에 이익이 되고 어떤 집단에 불이익이 되는지를 선명하게 들어내놓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국익이라고 하면 그 총량의 플러스, 마이너스 속에 어떤 사람의 경제적 이득과 다른 어떤 사람의 목숨이 맞바꿔지기 때문이다.  

일단, 한국군 300명 파병이 아프간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이 부분이 명분이든 실용이든 간에 가장 중요한데 말이다. (국가가 조폭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말이다.) 이 보다 한미 관계 운운하며 한국의 국익 때문이라는 말이 많은데, 미국은 한국도 동참한다는 명분이 중요한 거 같다. (300명의 군인이 뭐 그리 아쉽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우선 국방부를 비롯해서 군수산업업체는 대 환영일 것이다. (한국의 군수산업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누가 좋아질까? 아프간과 무역을 할 기업들? 일자리 창출이 되면 갈 노동자들? 혹은 선교자들 비롯한 종교의 블루오션에 혈안이 된 집단들? 

지난 피랍 사건에서 한국은 철군을 약속했고 이번 파병은 분명 약속 위반이다. 테러집단인 탈레반과의 약속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국가가 어떤 집단과 약속을 한 뒤, 그게 조폭이었으니 안 지켜도 된다고 하는 것은 국가의 태도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그 약속을 파기하면서 어쩌면 제2의 피랍사건만이 아니라 탈레반에 의한, 또는 그와는 무관할 수도 있는 국내에서의 태러 위협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만약 테러가 발생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한국은 급속도로 우경화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기관은 톡톡히 실속을 챙길 것이다. 테러방지법이 만들어지고, 대테러 센터가 생기고... 시장은 어떨까? 주가가 잠시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기업은 좋아라 하지 않을까?    

사실 상상하기 싫은 장면들이다. 어떤 글에선가 세계 경제위기의 돌파구로 서구에서는 제3세게, 특히 동북아시아의 전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20세기 공황에서 2차세계대전이 그러했듯이 한반도에서의 전쟁만큼 확실한 경제부흥은 없다는 논리였다.  

어쩌면 초국적 자본, 그와 다르지 않는 한국 자본은 테러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정부는 말 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 테러가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아프간 파병은 최소한 2MB와 자본에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목숨이 관계되는 일이다. 국익, 국가의 이익 이라는 말 가운데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아프간 파병이 불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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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11-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라디오에서 '테러 위협'에 대해 '그들은 항상 공갈 협박'을 한다고 일축한 한나라당 의원의 말이 생각납니다. 테러 위협에 대해선 상상이 안 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누구 좋을 일만 생기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실체없는 국익, 그런데 정말 국익에 큰 지장을 준다는 맹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고. 답답해요.

나무처럼 2009-11-01 21:50   좋아요 0 | URL
저는 테러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하여튼 비전투 민간인,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이라는 의미에서 테러는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러운 거 같아요. 수잔 손택인가가 폭력은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고 했는데 그래서 폭력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국회의원 같은 기득권층은 사회적 불안에서 천재지변 같은 것에까지 상대적으로 안전하니 참 불공평하죠.
 


 

"불법체류자, 외노자들 때문에 서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피해 받고 생계를 위협받습니다. 3D 기피? 불체자들 때문에 임금하락이 일어나서 기피하는 겁니다. 불법체류자를 동조하는 짓은 한국 수백만 서민을 못살게 구는 겁니다. 불체자는 외국에 대부분 송금하고 일끝나면 외국으로 가면 그만이지만 이 땅의 서민은 어떻게 살까요? 그들의 범죄들은 또한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독거노인, 불쌍한 아이들, 학대받는 동물들, 한국에 진짜 보호해야 될 존재들은 따로 있습니다. 여론을 보세요. 전국민이 불체자와 그 동조단체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당장 내일이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쫓겨날지도 모를 한 사람을 위해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졌고, 위의 글은 그 카페에 '추방마땅'이란 아이디로 어떤 분이 올린 글입니다. 부분적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흔히 '노가다'로 불리는 건설현장에서, 가구공단 같은 대표적 3D 업종에서 이주노동자들로 인해 임금이 오르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임금이 오르지 않는 것인지, 기업들이 값싼 임금노동자를 찾아 이주노동자를 불러들이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처럼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주민은 이웃이 될 수 없는지?


노동시장이 개방되고 여러 이유로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외국인 범죄가 늘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독거노인, 아이들, 학대받는 동물들까지 고통 받는 이웃들이 많다는 것도 지당한 말이지요. 그런데 왜 이주민들, 이주노동자들은 '서민'이 될 수 없고 '이웃'의 목록에서 빠져야 하는 걸까요? 진짜 보호해야 될 존재와 보호하지 않아도 될 존재는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 걸까요? 위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서민이라는 말, 이웃이라는 말, 국민이라는 말에 깃든 폭력이 되려 두렵습니다.


사실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와 시장이 이주와 노동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참으로 복잡하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라 굳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출산율이 바닥을 기고 내수시장이 침체되는 판국에 한국사회가 살 길은 다문화 사회이고, 그래서 이주민을 배려하고 적극적으로 포용하자는 말은 더 더욱 하기 싫습니다. 그런 논리는 1회용으로 이주노동자를 싸게 부려먹고 폐기처분하는 실용주의와 오십보백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1992년 2월 22일. 스무 살 먹은 한 네팔 사내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13년 동안 봉제공장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던 그는 1999년 이주노동자 노래자랑에 참가해 문화부장관에게 감사패를 받기도 했고 5년 전부터는 아예 '스탑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이라는 락그룹을 결성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방송국(MWTV)에서 기자로도 활동을 하면서 말이죠. 미누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얼마 전 출입국관리소의 표적단속에 걸려 곧 추방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18년 동안 이웃이었던 한 사람


그를 정부기관은 '불법체류자'라고 부르고 이주노동자 관련 인권단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합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은 다들 불법전입이 아니라 위장전입이라 하고, 경찰과 출입국관리소는 불법단속이 아니라 과잉진압, 과잉단속이라고 하면서 한국정부에 신고한 것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불법'의 딱지를 붙이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적 상황에서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위장체류, 과잉거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공소시효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살인은 얼마 전까지 15년이었다가 25년이 되었다네요. 강간치사죄는 15년, 아동성범죄도 15년이었다가 좀 늘어날 조짐이 있습니다. 영아유기죄는 5년, 공문서 변조 죄는 10년입니다. 반면에 한 장소에 15년 살면 점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체류 허가를 받지 않고 체류한 것이 죄라면 그 죄의 공소시효는 도대체 몇 년이어야 할까요? 흔히 위장전입으로 불리는 주민등록법 위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3년인데 말이죠.


그저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로 몰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18년이나 이 땅에서 살면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오고 있는 사람을 단지 '실정법 위반'을 들며 쫓아내려 하는 법무부와 출입국관리소의 행태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바다 건너 어떤 나라는 불법이든 합법이든 묻지 않고 10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부여한다고 하는데 한국사회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민으로, 이웃으로 살아온 그를 이 사회 구성원으로, 시민으로, 국민으로 대접하기는커녕 꼭 짚어서 쫓아내려는 국가와 이를 당연시 하면서 이주민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리는 이 사회가 저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그는 네팔인이지만 분명 그는 나의 이웃입니다. 국적을 이유로, 불법이라는 딱지 때문에 그를 쫒아내야 하는 것이 실용주의, 국가주의라면 이야말로 한국사회가 단속하고 추방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미디어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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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김훈 팬(누구는 편애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더 적절한 거 같다)이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약간 놀라고 조금 싫어라 한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누구는 그의 보수적인 정치 성향이, 누구는 마초적 기질이 싫다고 하고, 또 누구는 몇 천만원 짜리 자전거에 고가의 만년필 등등 취향까지 들며 말하기도 한다. 다들 부정할 수 없는, 반박하기 힘든 사실들이다.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럼에도 좋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찌보면 무수한, 저주에 가까운 악담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까지 담배와 술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렇게 쓰고 보니 김훈에게 약간 미안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솔직히 나는 김훈의 소설보다는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김훈 팬처럼 그의 문장을 사랑한다.(역시 나의 문장수업에서 그도 한 강좌를 담당했으니) 하지만 내가 김훈에게 끌리는 그 근원에는 그의 허무주의, 인간 본질과 맞닿아있는 듯한 냉소, 맬랑콜리한 삶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나티네>, <키쿠지로의 여름>,<베틀로얄> 등의 영화를 보면서 기타노 다케시에게서도 비슷한 '뉘앙스'를 느꼈던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를 읽으며 군데군데서 김훈이 떠올랐다.

김훈은 신문기자에서 소설가가 되었고 다케시는 만담가에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김훈의 논리가 문학이라면 다케시의 논리는 공학이다.
(다케시는 이공계 출신이다. 그는 영화 시놉시스에서 인수분해를 적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김훈보다 현실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소설가인 김훈이 혼자 자전거 여형을 떠나듯 고독한 낭만을 즐긴다면 협동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드는 다케시는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객기를 부리고 거들먹 거리며 군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인 것 같다.

둘 다 마초적 기질에 완고한 보수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다케시는 겉멋을 외투로 걸친듯 당당하고 김훈은 음흉스러움을 행간에 묻어두고는 하지만 너무나 강렬해 쉽게 드러난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극히 권위적이지만 그 권위적 태도에 독선이 없고 진솔함이 있어 좋다.  이 때문에 가만히 보면 둘 다 조금 안쓰러운 데가 있고 무척 귀여운 구석도 있다. 

결국 취향은 정치적 견해나 신념을 배반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을 이 두 사람을 보면서 하게 된다.   

 

p.s <공무도하가>와 <다케시즈>를 아직 보지 못했다. 뒹굴뒹굴 정말 할 일 없을 때 둘 다 봐야지 하며 미뤄두고 있다. 이것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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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tree 2010-06-0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타노 타케시를 좋아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남자'에 '아저씨'에 '어른'이라는 느낌이 확실이 들죠.(왠지 요즘 남자들에게는 없어져가는 특성같아요.) 그리고 너무 솔직해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납득이 가요.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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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이란 부제가 붙은, "치즈와 구더기"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재미있다. 16세기 마녀사냥과 종교개혁의 틈바구니에서 우주는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이 탄생하여 신과 인간이 비롯되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던, 그래서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죽어야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미시사 쪽에서는 유명하다는 카를로 진즈부르크는 그의 종교재판 기록을 분석하며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가 읽었을 법한 책, 그의 사고가 어떻게 발전되고 깊어졌는지를 소설처럼, 평전처럼, 또는 르포처럼 엮었다.  

그 가운데 16세기 글을 읽을 줄 알았기에 금단의 영역을 넘보았던 한 인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죄로 이단으로 몰려 가정이 파탄나고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신념을 버릴 수 없었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수 세기를 건너뛰어, 이탈리아에서 이곳 한국에서 만날 수 있었다.  


P.S 진즈부르크의 다른 책들도 어서 번역되길 기대한다. 요즘들어 부쩍 이탈리아 쪽 작품에 관심이 가는데 거의 번역되어 출간된 책이 드물다. 한국의 출판계는 편식이 너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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