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광장이란 무엇일까.
그건 최인훈의 소설 광장처럼 공간을 넘어서 그 무엇이 아니었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온전히 광장을 가져본 적이 있는 걸까.
어제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을 거닐며 든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서야 읽은 경향신문의 칼럼이 무릅을 탁 치게 했다. 광장조례을 잘 만들자는 서명운동을 독려하는 글인데, 나도 서명을 했지만 이런 서명으로 광장이 우리에게 올 거 같지는 않다(내가 너무 패배적인 걸까). 그래도 하도 성질이 나 추운 길을 가다 말고 또박또박...
[문화와 세상]스노보드, 세종대왕, 광장 알박기
반이정 미술평론가
“이건 또 뭐냐!” 13일 폐막한 ‘서울 스노우잼’ 가설무대 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주, 우연히 무대 뒤편을 지나던 내 입에서 튀어나온 탄식이다.
이번 행사와 무대 설치에 쏟아진 비난 여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교통체증 유발, 주변 조망권 침해, 지방선거용 전시행정, 안전 불감증의 산물. 야당의 공식 비난논평도 비슷하며, ‘광화문 광장은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뼈있는 유행어를 남긴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까지 국가적 상징성과 역사적 문화성을 훼손시켰다며 문제삼았다. 이쯤 되면 내가 가설무대에서 받은 불쾌감은 대략 정당화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이 전례 없는 이벤트가 과연 그토록 욕먹어 마땅한지 되묻는 데 있다. 그럼 가설무대로 일그러진 나의 인상(혹은 시민의 보편적 불쾌감)은 어찌 해명될 것인고? 일단 요 몇 년 사이 도심 경관 위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아시바 올리고 공구리 치기’로 시민사회가 느끼는 공사 피로증이 작용했을 게다. 한편 토목사업으로 정치적 재미를 본 전직 시장이 대통령이 되고 보여준 독단과 무능에 실망한 국민이, 그와 유사한 노정을 되밟는 현직 시장에게 ‘무얼 하든 꼴 보기 싫다’며 완고히 마음을 닫았으리라. 반사 불이익!
하지만 냉정히 보자. 광화문 일대는 항시 과도하게 엄숙한 공간이었다. 광장 뒤편으론 조선시대 궁궐이, 그 뒤론 어느 시대건 국민 절반의 신임도 못 얻은 정치지도자의 관저가 있다. 광장 좌우로 비천상을 부조로 새긴 과도하게 웅대한 세종문화회관과 맞은편엔 항시 경찰이 대기 중인 금단의 땅, 미 대사관이 놓였다. 그 사이에서 도전적인 익스트림 스포츠가 펼쳐졌다. 광화문의 경관이 조장한 육중한 공기 위로 가볍게 솟아오른 스노보더의 묘기가 그 어떤 역사성을 훼손한단 말인가?
나는 오세훈 시장이 그간 감행한 관제 행사 가운데, 스노우잼 행사가 ‘본의 아니게’ 제일 실험적 시도였으리라 추정한다. 고스란히 드러난 철근구조를 흉하다며 욕하지만 엉터리 민화 이미지 따위로 가림막을 두르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또 역사성 훼손 운운하는 건 낯간지럽고 손쉬운 비난 같다. 우리 국민은 역사와 전통 앞에선 대체로 약하다(사극에 열광하는 국민성!). 정작 역사 왜곡의 오용 사례로 따지면 비난의 경중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고작 3일짜리 이벤트에 분개하면서, 왜 영구적으로 광화문 한복판에 ‘알 박은’ 황금빛 세종대왕 좌상 제막엔 관대할까? 민족이 낳은 위인이어서? 성공한 무신 동상 뒤로 군인 정치가 박정희가 자신의 과오를 은폐했듯, 성군 세종 동상 뒤에서 철 지난 정치적 실익을 계산하는 이는 없을까? 세종의 업적을 후대가 기리는 예우로, 고작 시대착오적 미감의 육중한(20t) 키치풍 동상 제막만이 능사는 아닐진대.
나는 황금빛 세종 좌상을 볼 때마다 만수대의 조악한 황금빛 김일성 입상이 연상된다. 광화문 광장을 거대한 영묘(靈廟)처럼 꾸민 것이 스노우잼 가설무대보다 위험한 발상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광장은 교활한 위정자에겐 대중 동원과 정치선전의 장이었다. 그래서 광장을 홀로 장악하길 원했고, 군중이 자율로 모이는 건 저지했다. 변형된 광장공포증이요, 저 혼자 알 박겠다는 심보다. 광화문과는 사정이 다르나 알 박기 문제는 시장 허가로만 행사가 열리는 서울광장이 가장 심각하다. 서울시장의 광장공포증을 치유할 ‘서울광장 사용 조례개정운동(openseoul.org)’이 진행 중인데, 추가 서명인이 시급히 필요하단다. 괜히 한시적 스노쇼 무대에 열 받지 말고, 광장을 영구히 빼앗는 몰상식에 분개하자(필자도 서명했다).
<반이정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