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문학상의 생활•기록문 분야 예심을 덜컥 맡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화로 수락하고 보니 우편으로 접수된 것까지 포함해서 대략 150여 편의 글을 일주일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가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고 그 당락을 결정짓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본심에 보낼 작품과 탈락시킬 작품을 가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본심으로 넘겨야 하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들의 편차가 워낙 심한 탓도 있었습니다. 생활글, 기록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문장이나 예술성보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있는 글, 글쓴이의 정성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들을 위주로 추렸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지만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했고 혼자 드러누워서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때 그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못 먹이고 못 입혔다며 미안하다 하시지만 사실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졌던 탓에 유별나게 궁상맞았다거나 고달팠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1980년대 이전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절대빈곤은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제가 십대, 이십대를 보낸 8, 90년대에도 이토록 가난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들과 함께 같은 하늘과 같은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이제 막 한국사회에 등장한 중산층들이 둥지를 틀었고 그 맞은편 작은 하천 너머로 아마도 신흥 중산층들에게 삶의 터전을 속절없이 빼앗겼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했습니다. 판자촌 동네 아이들은 한 학급에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꼬질꼬질하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 짝꿍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5학년 때였을 겁니다. 땟물이 줄줄 흐를 뿐만 아니라 어딘지 좀 모자라고 숙기도 없어 보이는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저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아이가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학용품을 제가 먼저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지 계속 제 주변을 맴돌더니 급기야는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나랑 안 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가 제 주변에 있는 게 불편하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차갑게 대하며 제가 반걸음을 물러서자 그 아이는 더 차갑게 제게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아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그 아이와 멀어졌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서입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는 인근에서 하나뿐이었던 남자 중학교로 당연히 학교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복도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동네 형들이나 고등학생들과 어울린다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요샛말로 이른바 ‘일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복도에서 그 아이를 마주친 순간 서로 눈을 피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뒤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문득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첫 번째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아이일 겁니다.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작품을 읽어나갈 무렵은 한창 무식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면적인 무상급식은 안 된다는 주장의 핵심은 빠듯한 나라 살림살이에 왜 부자 아이들의 밥값까지 대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군대에서는 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밥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소득 상위 50%이상은 군복을, 상위 20%이상은 총까지 스스로 장만해서 입대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반대편 주장인 “아이들에게 눈칫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군복무가 의무라면 당연히 군대에서 군인은 양질의 식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듯이 의무교육에서 급식은 학생들의 당연한 권리여야 합니다. 눈칫밥이나 낙인효과 같은 정서적인 접근이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무상급식을 이뤄내는데 효과적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력이 있을 때 베푼다는 시혜적 차원의 복지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편적 복지로, 그리고 인권의 차원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편 정말로 무상급식을 한다고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는 모두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좋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미 아파트 몇 단지에 사는지를 가지고 친구 집의 경제력을 짐작하고 무슨 학원을 다니는가 하는 것으로 또래집단이 나뉘는 마당에 무상급식 하나로 빈부격차에서 오는 차별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어른들의 바람일 뿐이겠죠.

군대에서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전방부대였기에 40명 정원의 한 소대에서 4년제 대학을 다니다온 사람이 채 10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중대 행정반이라는 편한 자리에서 군 생활의 절반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로는 후방 무슨 본부 같은 곳은 4년제 대학생 아닌 이들이 열에 한둘이 될까 말까 하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회경험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고 제대할 날짜가 다가올수록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데모를 한다고 쫓아다니고 문학을 한답시고 술에 절어 지내던 대학시절에는 사회경제적 차이가 크게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둘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다 보니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농사짓는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의 친구와 자식이 결혼을 한다니 전세 아파트라도 마련해줄 형편이 되는 집의 친구는 반지하와 신도시로 사는 곳부터 다릅니다. 아마 어느 한 편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던 일이 대박 나지 않는다면 이 둘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주거와 교육, 의료와 같은 것들은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 어떠한 모욕이나 차별, 배제가 끼어들 수 없게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위한 기획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복지국가 논의에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이미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눈칫밥과 사회적 낙인을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발상도 그렇습니다. 복지를 위해서,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좀 못 사는 다른 나라를 착취해야만 할 겁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좋지만 그러면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편의점이나 PC방 같은 영세 자영업자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평택 대추리에 지어지는 미군기지로 인해 누가 얼마나 더 안전해질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주도 어딘가에 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앞에서, 그리고 공사 지연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비용 운운하는 말들 속에서 강정 싸움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가 되고 맙니다. 서울시민의 쾌적함과 그럴듯한 ‘디자인’을 위해 서울역에서 노숙인은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이주민은 필요한 만큼 시한을 정해 들여왔다가 쫓아내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한편 바로 이웃나라의 핵발전소 사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원자력 에너지에 기대어 또 이렇게 한여름 불볕더위를 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곤란과 어려움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아닐런지요.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번호 《사람》의 표지 사진입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 뒷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검은 색 계통의 어두운 티셔츠를 입었고 다들 무척 지친 듯합니다. ‘마리’라고 쓰인 간판 밑 내려진 셔터 앞에 선 이들은 마치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포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어디를 보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용역, 용역직원, 혹은 용역깡패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지난 6월 19일 명동 재개발 구역인 카페 마리에서 철거가 진행된다는 소식이 트위터로 퍼지자 일요일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의집회와 몸싸움 끝에 카페 마리는 다시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농성장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 과정에서 안에 들어간 동료가 집기를 다 철거할 때까지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셔터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왠지 참 애처롭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혹시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용역들. 사실 현장에서 이들을 만날 때면 유난히 겁이 많은 저는 눈을 마주치는데도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몇 발짝만 물러나면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운 존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정함과 공포의 대명사인 이들은, 이들의 뒷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삶도 이미 자본의 용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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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이번 한진중공업에서도 희망버스보다 일찍이 희망퇴직이 있었다. 비단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아이엠에프(IMF) 이후 무수히 잘려나간 노동자들 중에 도대체 어떤 이들이 명예롭게 명예퇴직을 했는지, 희망퇴직자들이 무슨 희망을 갖고 일터를 떠났는지 모르겠다. 희망이란 말은 참 얄궂은 말이다. “네가 우리의 희망”이라거나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말은 대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상책이다.


2011년 새해가 밝은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김주익 열사의 추모 동영상으로 처음 알게 되고 『소금꽃나무』란 책을 읽으며 열혈 팬이 되었던 김진숙 씨가 다른 곳도 아닌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나는 희망이란 단어 대신 고행, 순교 같은 단어가 불현듯 떠올라 망측해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송경동 시인의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를 읽고 다시 ‘김진숙과 85호 크레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또한 희망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85호 크레인에서의 죽음과 절망, 패배의 이야기였다. 이 죽음과 절망과 패배를 멈추기 위해 다만 우리의 적은 힘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냐는 시인의 말이 공명을 일으켜 ‘희망버스’가 생긴 줄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희망버스는 그 출발이 절망이며 패배한 역사를 경로로 삼는 그래서 좀 사기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1차 희망버스는 장인어른 생신과 겹쳤고 2차는 어머니 칠순 날이라 타지 못했다. 3차도 뒤늦게 내려갔다가 반가운 이들을 만나는 바람에 술잔만 빨다가 서둘러 올라왔다. 무박 2일이었지만 ‘희망버스는 절망버스’라는 머리띠를 두른 영도주민의 욕설과 삿대질, 해방정국에서의 백색테러를 떠올리게 하는 어르신들의 ‘빨갱이 사냥’을 목격했다.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주택가 골목을 누비는 바람에 영도 주민들에게 큰 폐를 끼치기도 했지만 열대야에 무료했던 일군의 영도주민은 많이들 반겨주시기도 했다.


며칠 전 방바닥을 뒹굴다가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룬 KBS ‘추적60분’을 봤다. 중간쯤이었을까, 덩치가 산만한 노동자 한 명이 현장에서 걸어 나오며 “살려 주세요”라고 울먹이는 장면이 나왔다. 경찰이나 용역에 손발이 들려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곤봉에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것도 아닌데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그 노동자의 살려 달라는 말이 참 생뚱맞았다. 그런데 뒤이은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살려 주세요, 우리 진숙이 누나 좀 살려 주세요.”


그 순간 나는 정리해고로 십 수 명이 죽은 쌍용자동차가 떠올랐다. 아니 죽음의 행렬 속에 무력하게 무얼 해야 할지 몰랐던 내가 TV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김주익이 죽고 살아도 산 사람같이 살 수 없었던 김진숙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먼 훗날 내 아이가 “그때 아빠는 뭐 했어?”라고 물어볼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적어도 내게는 희망버스는 면피버스인 셈이다.


어떤 교수 양반은 자본주의에서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회장님은 정리해고만큼은 물러설 수 없는 경영권이라며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고 3년 간 영업실적이 없음에도 월급을 올려 받은 임원들은 외부 세력이 개입해 문제를 어렵게 했다며 성화다. 많이 억울한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법률은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에 따라서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놓았다. 그 판단은 법원이 한다. 법원에서 탐욕은 죄일까 아닐까?


뒤늦게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린다고 하지만 큰 희망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해 4차 버스도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버스를 탈 생각이다. 적어도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거기에 ‘인간 존엄과 관련한 긴급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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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몰랐던 사실을 이 글에서 알고 가네요. 양귀자의 [희망]의 초반부에 느껴지던 절망과 퇴락의 분위기가 문득 떠올랐는데, 희망버스의 출발이 절망이라는 부분에서 겹쳐진 것 같아요. 별명과 책 제목과 글이 참 잘 어울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나무처럼 2011-08-18 11: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김진숙 씨가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었는데...

saint236 2011-08-1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전 다음에서 김진숙을 검색하니 특수 단체인으로 나옵니다. 항목을 클릭하면 그제서야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라고 나오고요. 민노총을 민노총이라 부르지 않고 특수단체라 부르나 봅니다. 추적 60분 찾아서 봐야겠네요.
 

1.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잡초가 되어 뿌리째 뽑힐 수도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2.
동해인가, 일본해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 논란에 대해 '평화의 바다'란 제안을 한 적 있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우익에서 난리가 났다.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지금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된 이 바다는 한국에서는 동해, 일본에서는 서해인 셈인데, 오늘 뉴스를 보니 한국해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 친절하게 sea of korea라고 표기된 영국 지도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왜 시 오브 코리아가 한국해인가? 그러면 한국해와 함깨 북한도 고려해 조선해라고 병기해야 할까? 고려해로 통일해야 할까? 

3.
콜롬버스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안이 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 덕분(?)에 아메리카는 아메리카가 되었다. 땅과 바다에 이름 붙이기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각이다. 어느 바다가 인도양이 되었든 스리랑카양이 되었든 바다는 그 바다에 살아가는 이들, 물고기와 프랑크톤과 해초와 어부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 불러주기는 대상을 인식하는 차원의 것이어야 하지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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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명한 구절이다.

김원의 책을 읽고 있다.

과연 괴물은 누구인가?

자본주의, 폭력, 테러리즘, 반인륜적 범죄... 광신도, 범죄자, 부랑인, 날품팔이, 껌팔이... 철거민, 빨갱이... 

우리는 정말 괴물과 싸우고 있을까?  

세상은 무엇을, 누구를 괴물이라 할까?

두려움, 절대적인 폭력, 이해불가능한 공포, 예측불가능한 행동.... 배제와 타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중에서...
 
   


우리의, 나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존재가 혹시 괴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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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위들이 그렇듯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과 술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건설회사에 다니다 은퇴하셨고 정주영의 열혈 팬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자인 장인과 9시 뉴스를 틀어놓고 술을 마실 때면 저는 그저 벙어리 신세가 되기 일쑤입니다. 아주 가끔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을 물어보실 경우에야 에둘러 제 의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역시도 조심스럽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술자리에서 한국전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장인은 전쟁 통에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분인데 남녘에 내려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충남 공주 근처라고 합니다. 왜 하필 공주였나 여쭸더니 그쯤에서 인민군이 피난 행렬을 앞질러 가더랍니다. 그 시절 장인어른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죽음이 지척에 있었던 피난길의 기억은 아주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넝마주의공동체를 이끌었던 윤팔병과 철학자이자 변산공동체인 윤구병 형제 이야기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병부터 구병까지 아홉 형제 중 여섯은 좌익으로,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실종되고, 일곱째는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흔한 관용구로 어찌 전쟁을 겪은 세대의 아픔과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윤팔병, 윤구병 형제의 아버지도 제 장인의 어머니도 자식을 많이 낳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장인어른에게서 피난 시절 이야기를 들은 후 이른바 ‘반공 할아버지’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요즘 꽤나 유명한 반공 할아버지 한 명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KBS에서 6.25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전쟁과 군인>이란 다큐멘터리가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랐고 좌익 척결에도 앞장섰던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작진의 해명이 참 구질구질합니다. “(백선엽이) 독립군을 실제로 죽였는지, 민간인을 잔인하게 고문했는지는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당사자’가 백선엽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피학살자 유족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정말 비겁하고 후자라면 참으로 무책임합니다.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나온 여러 책들 중 눈길을 끌던 두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과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라는 책인데 두 권 모두 구술 인터뷰를 통해 민초들이 실제로 겪었던 한국전쟁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헤쳐나가야 했던 20대 초반의 여성, 그러나 국가의 공식 기억에서 철저히 지워지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장한 어머니’로 추켜세워졌지만 현충일 행사에서 엄숙한 추모분위기를 망친다고 곡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군경미망인, 전쟁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옮아온 가정에서 폭력과 함께 살아야 했으면서도 정작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던 상이군경미망인, 그리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냉가슴으로 60년을 버텨온 피학살자미망인,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마 지난 6월 30일 울산지역 보도연맹사건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이 “울산 보도연맹사건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요구는 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보상책임이 없다”는 고법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하라며 되돌려 보낸 반가운 판결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실을 은폐해왔던 국가가 이제 와서 시효가 지났다며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고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사법부가 그래도 KBS보다는 덜 비겁하여 다행입니다. 적어도 공영방송이라면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고 변명하기 전에 그 당사자를 찾아 나서고 그들이 어찌 살아왔는지, 왜 아직도 말할 수 없는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5월 《사람》에서는 앞으로 《사람》이 꼭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를 독자 여러분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응답해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노인 문제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사실 특집으로 ‘노인 인권’을 다뤄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리의 준비가 부족해 미뤄졌더랍니다. 하지만 이번호에 실린 ‘부양의무 기준, 죽음의 제도’라는 글을 읽으며 이 주제가 언제까지 미루어 둘 수만은 없는 사안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망신창이가 된 한국사회를 그래도 이만큼 살만하게 만든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는커녕 고작 지하철 공짜표를 가지고 ‘과잉복지’ 운운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들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59년 전에 전쟁은 멈추었지만 이들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사실 지면이 넘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방방곡곡 전쟁이 아닌 곳이 없지만 또 하나의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의 싸움입니다. 며칠 전부터 자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스마트폰으로 85호 크레인의 안부를 확인하게 됩니다. 제발 무사히 그이가 내려왔으면 합니다. 그런데 다섯 차례 뭇 생명을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지율 스님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진숙 씨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선뜻 말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크레인 아래인 이곳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요. 김진숙 씨가 서 있는 크레인 위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중 어디가 더 위험한가요?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김진숙 씨도 바로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 누군가 절박하게 외치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그리고 어렵지만 답을 찾도록 노력해야지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이야말로 위험한 곳입니다. 다시 물어보지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저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당신은 안녕한가요? 우리는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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