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의 정치 -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한국사회
권정우.하승우 지음 / 한티재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 헌법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헌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헌법을 만들려는 시도를 나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나치는 법적인 수단이나 규제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방법들, 숙청.테러.비밀경찰과 같은 수단을 통해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나치는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여기는 순간 숙청을 시작했고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그리고 상시적으로 비밀경찰은 적들을 만들어냈고, 그 적을 통해 내부의 단결을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헌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35쪽


이들은 살아 있지만 죽었고, 죽었지만 죽지 못한 사람들이다. 즉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자들이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 절멸의 상태에 처한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42쪽


대중들이 가지는 도피의 욕망은 "살도록 강요받았지만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세계에 대한 그들이 내리는 일종의 평결"(<인간의 조건>, 352쪽)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대중들이 도피하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거나 현실감이 없거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피만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들이 정치라는 행위, 즉 결과를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고유한 행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84쪽


아렌트는 "다원성은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인간의 조건>, 175쪽)고 말한다. 우선 인간은 지금껏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게 될 그 어떤 누구와도 같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또한 다원성은 인간이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공통감각이 없다면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과거와 미래의 인간들에 대한 이해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다원성은 말과 행위를 하는 동등한 인간들 속에서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93쪽


말과 행위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다원성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들어주고 반응해줄 수 있는 이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바로 이런 다원성에서 시작한다. 공적 영역은 "타인의 현존을 기반으로 자신의 차이성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공간"(179쪽)이라고 말했다. 아렌트는 설득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인간은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니라 말과 행위를 통해서만 정치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93쪽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용서로 서로를 해방시켜줌으로써 인간은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이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극히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95쪽


사랑보다는 존중이 용서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존중은 일정한 거리감을 가진다. 나는 그를 존중하지만 그와 일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존중받을 만한 자이기에 그를 인정할 수 있고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96쪽


반면 아렌트에게 약속은 자신을 지배하고 나아가 타인을 지배하는 데에만 의존하는 오래된 정치형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약속은 지배에 의존하지 않는다. 약속을 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다. 약속은 타인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사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아렌트는 약속을 "인간사의 예측불가능한 측면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수단일 뿐인 약속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이정표를, 예측가능한 섬을 불확실한 바다에 만들어 두는 것"(244쪽)이라고 말한다. -97쪽


아렌트는 자유=안전의 논리에서 다시 자유를 안전에서 분리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안전의 논리는 결국 공간을 분리하는 데 있다. ... 이렇게 타자와 만남의 장소가 상실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타자의 문제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고, 안전은 결국 나 아닌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진다.

문제는 안전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단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상실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안전이 가로막고 있는 인간들 사이의 공간은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만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유=안전의 논리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논리였다. 결국 타자의 자유를 빼앗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나의 자유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10쪽


소크라테서의 적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했던 주장은 매우 적절했다는 것이다. 다만 "'타락시킨다'는 의미를 잘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투사를 위한 철학>, 43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시킨다는 것, 그것은 청년들에게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의견을 변화시키는 어떤 수단, 그리고 심지어 원칙의 문제가 중요시될 때 복종을 반란으로 대체하는 어떤 수단을 부여하는 것이다."(43-44쪽) 타락이라 비방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기성질서에 대한 거부, 반란을 내포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일 수 있다. -191쪽


각자의 생각을 드러내고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아렌트는 이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타자와 차이 없이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두 명 이상이 만나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일 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204쪽


사실 1960년 4월항쟁의 불씨를 당겼던 행위자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중고등학생과 시민이었다. 이승원의 <4.19혁명과 피해대중>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발시켰던 마산의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13명이 사망했는데 중학교 재학생 2명, 중학교 졸업생 2명, 공장 직공 2명, 행상 1명, 고교 재학생 4명, 상인 1명으로 대학생은 한 명도 없다. 대학생은 사회를 바꾸겠다는 시민들의 열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난 뒤에야 시위에 동참했는데도, 마치 4월항쟁의 주역이 대학생인 것처럼 기록되었다. 기록에서 지워진 이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결정에 참여하고 싶었을 사람들은 다시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밀려났다. -2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중들이 권력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대중들에 대해 권력이 느끼는 공포의 동시성이 좀비의 공포에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27쪽


인권의 정치성은 국가라는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들 사이의 교류와 연합의 구성적 원리라는 점, 그리고 정당과 같은 정치적 제도의 매개 없이도 직접 국가제도를 변혁하는 인민의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의 원천적 권리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인권의 정치란 인권의 이념들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집합적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개인들 사이의 교류와 연합을 의식적으로 인권의 이념을 통해 구성해 가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적 활동이자, 사회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 인권을 핵심적 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운동이며, 인권의 이념에 따라 현실의 제도를 변혁해 가는 실천적 행동들이다. -63쪽


나는 오늘날 인권의 정치에 요구되는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권을 탈도덕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권이라는 관념에 내재해 있는 전복성과 급진성, 불온성을 복원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68쪽


인간의 권리는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그 본질적 규정이 유지되는 이데아와 같은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라는 활동에 의해 그 의미가 끊임없이 변경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권리'이며 하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권리들의 다양체를 표시하는 이름이다. -106쪽


오늘날 인권에 대한 비판이 향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현대 인권비판의 논의를 관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권이 말하는 그 인간이란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인권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역사에는 반복되고 있다. -122쪽


인간이 가지는 권리의 기원은 출생으로까지 소급되는데, 그 출생부터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곧 그가 국민이라는 사실, 그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태어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근대적 정치질서가 인권선언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인권이 바로 벌거벗은 삶을 포섭하기 위한 근대 정치의 장치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141쪽


바디우에게 인권이란 "생명과 관련하여(살해와 처형의 공포), 몸과 관련하여(고문, 가혹 행위, 기아의 공포),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하여(여자들과 소수자들에 대한 모욕과 공포) 공격받지 않고 학대받지 않을 권리들이다. 즉 인권이란 "악이 아닌 것에의 권리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가 악의 제어인 만큼 인권은 윤리와 그 내포가 사실상 같다. 윤리와 인권은 권력의 정치적 장에서 이렇게 동일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권-윤리는 정확히 서구 자본주의 승리를 승인하는 하나의 철학적, 정치적 방식이다. -145쪽


무엇보다 정치는 치안에 의해 이루어진 공동체 내의 자리들과 기능의 위계적 분배를 뒤흔드는 행위로서 그것은 ㅁ모든 이의 평등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치안에 의해 자격 없는 자들로 분류된 이들, 능력이 모자란 자들로 규정된 이들도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평등한 존재임을 입증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인 것이다. -160쪽

 

정치란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합의된 몫의 분배체제에 맞서 몫이 없는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이라고 여겨지던 이들이 그 체제의 경계 안으로 '부당하게' 침입하는 불화의 행위이다. -161쪽


"여성들이 단두대로 갈 자격이 있다면 의회로 갈 자격도 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드 구즈의 이러한 언명이 아렌트나 아감벤이 제시하는 인권의 아포리아를 벗어나게 해주는 논리라고 말한다. ... "여성들은 권리선언 덕택에 자신들이 가진 권리가 박탈당했음을 증명해 보링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공적인 행위를 통해서 헌법이 거부했던 권리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음을, 자신들의 권리를 행샇ㄹ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다." -167쪽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봉기, 또는 심지어 영속적 봉기라는 관념에 준거해야 한다. 이는 인권의 정치가 불평등과 압제에 대항하여 모든 가능한 형태로 봉기하는 사람들의 행위이며, 또한 그러한 정치는 자유 없이 평등 없고 평등 없이 자유 없음을 실천적으로 주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누구도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해방될 수 없지만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들 없이는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발리바르, 170쪽


랑시에르가 보기에 불평등이란 사회경제적 자원의 비대칭적 배분 이전에 바로 이런 감각상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타인을 자신의 말을 알이듣는 자, 그의 말을 내가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는 자로 감각하지 않는 사태, 혹은 타인의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 없고 내 말이 그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감각하는 사태가 바로 모든 불평등에 전제된 불평등이다. 그런데 아벤티누스 언덕에서는 이러한 불평등 전제가 깨져 버렸다. 귀족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 평민들에게 말을 건네야만 했다. 그리고 평민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평민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음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아그리파가 창작한 우화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말이 들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했음을 보여준다. 그 전제가 바로 평등이다. 그 평등이란 "말하고자 함과 듣고자 함보다 앞서는 평등"인 것이다.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항상-이미 내가 말을 건네는 대상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9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8쪽


체르노빌은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비밀이다. 해독할 수 없는 암호다. 어쩌면 21세기를 위한 수수께끼일 수도 있다. -11쪽


그들은 이야기하며 답을 모색했다. 우리는 같이 고민했다. 그들은 자주 서둘렀고, 시간이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그때만 해도 그들이 하는 증언의 대가가 삶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 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 그들은 이유 없이 서두른 것이 아니었다. 그 중 많은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다행히도 살아 있는 동안 신호를 보냈다. -13쪽


체르노빌 땅의 사람은 불쌍하다. 그런데 동물은 사람보다 더 불쌍하다. ... 사람은 자신만 구하고 나머지는 다 배반했다. ... 멕시코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의 러시아 원주민들은 양식을 위해 죽여야만 했던 동물과 새에게 용서를 빌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동물들이 사람을 상대로 고소할 권리도 가졌다. -17쪽


한편 체르노빌에 대해서는 잊고 싶어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체로노빌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의식의 재난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던, 우리 가치관의 세상이 폭발했다. ... 현실은 사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기만 했다. -19쪽


나는 이렇게 산다. 현실과 비현실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어디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 그렇게 죽어가는데 우리가 무엇을 견뎌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는다. -52쪽


모든 것이 변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무너져간다. 그 세상에는 악조차도 달라질 것이다. 과거는 이제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위로하지 못한다. 그 안에 답이 없다. 예전에는 항상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나를 파괴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다. ... 왜 사람들은 기억할까? 나도 알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소리내어 말하면서 뭔가 깨닫게 됐다. 이제는 외롭지 않다. 다른 이들은 어떤가... -57쪽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나는 못 기다린다.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내 딸의 이름은 카탸였다. 카튜센카... 일곱 살에 사망했다. -69쪽


신문은 우리의 영웅성에 대해 떠벌렸다. 영웅다운 젊은이라고, 선한 일을 행하는 콤소몰 청년이라고!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누구였을까?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가? 나는 알고 싶다. 책으로 읽고 싶다. 내가 직접 거기 있었음에도 알 수 없다. -114쪽


어떤 사람은 부인이 임신 중이라고 증명서를 떼 왔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식이 아직 어리다고 했소. 물론 위험한 일이지. 방사선이라니까... 위험한 게 맞소. 하지만 누군가는 뭔가 해야 하지 않겠소. 안 그랬으면 왜 우리 아버지들이 전쟁터에 나갔겠소?

집으로 돌아왔소. 그곳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쓰레기통에 던졌소. 막내아들이 졸라서 군모를 줬소. 아들은 절대로 벗지 않고 매일 쓰고 다녔소. 2년 후 아들은 뇌종양 진단을 받았소. 

나머지는 알아서 쓰시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소... -117쪽


갑자기 잘 관리된 텃밭을 발견했다. 쟁기를 든 주인이 나타나더니 우리를 봤다. 

"화내지 마세요. 이사 간다고 벌써 허가서를 제출했어요. 봄에 떠날 겁니다."

"그런데 텃밭은 왜 가는 거예요?"

"가을마다 하는 일이니까요."

나는 이해하지만, 조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125쪽


또 농담 들려줄까? 체르노빌 사고 후로 뭘 먹어도 상관없지만 똥은 납 상자에 싸서 버려야 한대. 하하하! 삶은 아름답지만, 제기랄, 너무 짧아. -126쪽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다. 기밀유지 계약이었다. 나는 침묵했다. 말해도 된다고 했다고 쳐도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 나는 침묵한다.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다답할 수 있도록 나와 얘기할 사람이 있을까? 나의 언어로... 나는 외롭다. -129쪽


차라리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더라면...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이 쏟아지듯 밀려온다. 그곳에서 죽음은 일상이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130쪽


우리의 유일한 답변은 침묵이다. 아이들처럼 눈을 감고 생각한다. '꼭꼭 숨었으니까 못 찾겠지.' 무언가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우리가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그러니까 결론은 잊을까? 기억할까? -142쪽


"왜 거기 남은 동물들은 도와주면 안 됐어요?"

그러게. 왜? 나도 생각 못 해본 거였다. 그래서 대답도 못 했다. ...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모두를? ... 그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175쪽


우리 삶은 그것 주위를 빙빙 돌고 있어요. 체르노빌 주위를.... -180쪽


어떤 이들은 겁을 냈지만 나는 초대에 응했다. 들어갔다. 밥상 앞에 앉았다.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엇다. 다들 먹었기에 나도 먹었다. 술잔을 들이켰다.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럴 능력이 된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이 사람과 함께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다.' 운명을 나누는 것이었다. -206쪽

 

예술은 기억이다. 우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무섭다. 한 가지가 무섭다. 우리 삶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대신해버릴까 무섭다. -33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17쪽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8쪽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26쪽


광학에는 '집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사체를 잡아내는 렌즈의 정학도를 말한다.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은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28쪽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 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32쪽


시간, 이 또한 우리들의 고향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그네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시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랑한다. -4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유명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의 마지막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히 상실의 경험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자기이다. 중요한 것(사람)을 떠나보내고도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이 애도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나를 재정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애도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슬퍼하기로 시작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슬픔을 감추려고 한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7쪽


치유란 상실로 인한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기로 시작하는 애도의 과정을 거쳐 받아들이는 것이다. -8쪽


매력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누가 뭐래도 내 나름의 삶이 있다. 시대의 중력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이른 것은, 고비마다 시대의 중력에 맞서 하나씩 선택해 걸어왔기 때문이다. -2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