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빨강 머리 앤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황의웅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먼저 책 외양이 우리('나'가 아닌 빨강머리 앤에 열광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앤, 딱 그만큼 앙증맞고 예쁘다. 200쪽도 안 되는 얄팍하고 자그만 양장본인데, 빨강 저 겉표지보다 나는 겉표지를 벗기면 나오는 하얀 하드커버가 훨씬 예쁘다. 새하얀 하드커버 한가운데 반짝거리는 빨강의 자전거 타는 앤의 실루엣이 조그맣게 박혀 있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책을 갖고 싶다는 욕심부릴 때를 보면 어이없는 기준도 가끔 있는데, 이 책처럼 책표지가 겁나 예쁜 경우도 해당된다.  


 지난 2008년, 빨강머리 앤 출판 100번째 돌을 기념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책자들이 쏟아졌고 이 책도 그 즈음을 겨냥하여 펴낸 책이다. 앤의 집필 과정과 출판되기까지의 여정을 포함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어린 시절부터 마흔 세 살까지의 생애를 자서전 형식으로 쓴 글이다. 자서전 의뢰를 받았지만 그런 글을 쓰기엔 아직 너무 젊어서 적잖이 부담스러워한 흔적이 프롤로그에 보인다. 책 맨 뒤에 실린 연보에 향년 68세(1942년)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죽기 25년 전, 인생의 ⅔지점에서 쓴 글이 되겠다. 마흔 셋이면 흔히 인생의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는 시기라고 말한다. 100년 전의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37세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출산하였고, 작가로서 한창 물이 오른 시기이며, 자서전을 쓰기엔 이르긴하지만 더 늦기 전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아직은 감수성이나 유년의 추억들이 녹슬지 않았을 테니까.  


두 살이 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위었 때를 추억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어떻게 21개월밖에 안 된 아기적의 일을 초롱초롱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아기였던 자신이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었고, 아버지의 팔에 안겨서 내려다 보던 관 속의 창백하고도 아름다운 어머니의 얼굴, 그 뺨의 차가운 감촉, '가엾은 것'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조객의 말, 그 날의 창 너머 햇빛과 풍경까지 몽고메리는 눈으로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설명한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유년기의 기억은 자라면서 거의 다 잊혀지는데 아주 충격적인 사건만 기억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몽고메리의 의식,무의식의 세계 뿐만 아니라 각 세포마다 각인되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작가의 이 경험이 고아인 빨강머리 앤의 고독한 의식을 그리는 데 충분한 자양분이 된 것이 틀림없다. 


'태양의 흑점 같은 한두 가지 결점'밖에 없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프린스에드워드섬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겪었던 이야기들을 빨강머리 앤에서 어떻게 모티브로 사용했는지, 책에 등장하는 장소와 실제 장소와 연관성도 소개해 놓았다. 읽다보면 빨강머리 앤 속에 몽고메리가 얼마나 많이 녹아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책 곳곳에서 몽고메리는 거듭 강조하길, 책 속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이 창조해 낸 인물'이란 걸 꼭 알아달라고 말이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오래 전 (그러니까 사춘기였던 중고등학교 때)소원이었던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 여행'을 다시 한 번 희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아주 조그만 계집아이였을 때, 뜻도 모르면서 세로쓰기로 된 삼중당문고의 손바닥 크기의 『앤의 청춘』을 읽었다. 빨강머리 앤은 그보다 훨씬 뒤-초등학교 고학년 때-였거나 아니면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노래로 전국에 Anne 마니아를 양산하던 에니메이션으로 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은?'이라는 국어선생님의 질문에 내 내답은 장전된 총알처럼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이 튀어나갔고, '오호~그린게이블즈!'라고 마주 외쳐 주셨던 도미란 국어선생님, 어디 계시나요? 선생님도 그때 빨강머리 앤의 열렬한 팬이셨죠?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몇 갑절이나 힘든 시기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글쓰기를 해냈던 몽고메리, 출판 이후 100년간 전세계에서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을 받는 빨강머리 앤도 여러차례 퇴짜맞고 하마터면 낡은 트렁크에서 사장될 뻔한 것을 살려낸 것도 몽고메리의 포기하지 않는 치열한 글쓰기 덕분이다. 오죽하면 글쓰기 행로를 돌아보며『험한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글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우며 내내 부끄러웠다. 원제 『험한 길』이라는 표현이 작가로서 마흔 셋의 삶을 함축하는 의미로는 어울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내 안의 빨강머리 앤』이 더 좋다. 이 제목을 고른 것은 출판사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한표 주고 싶다. 끝으로 각 쳅터마다 나오는 몽고메리의 흑백 사진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사진을 찍었다. 에니메이션으로 형상화된 앤의 모습에 사람처럼 살을 붙이면 이 얼굴이 되지 않을까? 어디까지가 앤이고 어디까지가 몽고메리인지 더 분간하기 힘들어졌다.

   
/어린시절의 몽고메리

 

2009. 1. 몽고메리가 자서전을 쓰던 나이 마흔 셋, 올해 내 나이도 꼭 그 만큼.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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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9-01-27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몽고메리 참 예뻐요. 마흔셋에 자서전을 썼다구요. 빠르긴 합니다. ㅎㅎ
빨간 표지도 사랑스러워요.

진주 2009-01-28 23:48   좋아요 0 | URL
속 흰표지가 훨씬 더 이뿌다니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