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ALINE > 객관적인 아침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詩  이장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현금이 없으면 카드를 쓸 수 있었고 카드 한도가 넘으면 현금카드를 쓸 수 있었다. 이 은행에서 마이너스통장을 채워야 될 때가 되면 다른 은행의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던 그 멋진 신세계의 순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던 때가 그러니까 벌써 여러 달 전의 일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한도가, 혹시 다른 카드가 있으시면, 하고 매우 겸손하게 직원이 얘기할 때 어머 그래요, 몰랐다는 듯 지갑에서 다른 카드를 꺼낼 수 있었던 건 더 이전의 일이다. 이렇게 독촉장이나 혹은 독촉전화를 받을 때면 몹시 후회를 할 때도 있지만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던 시절,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전엔 나는 무도회장 바깥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었다.

<호텔 유로, 1203 - 정미경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자본주의의 유희...

그림은 호퍼의 것인데, 제목이...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5-01-0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깍두기님한테 저 책 선물 받았는데...빨리 읽어 봐야겠군요. 이 책에서 플레져님이 자본주의 자극을 받으셨나?^^

플레져 2005-01-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예전부터 자극은 받고 있었는데, 이제사 실천 좀 해보려구요 ^^


호밀밭 2005-01-04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던 시절>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호퍼의 그림은 쓸쓸해서 좋아요. 그림 속 사람들이 화사하지 않은 점이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하고요.

icaru 2005-01-0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긴 글과 호퍼의 그림... 어울리는 짝이네요~!

님이 올리신 저 호퍼의 그림... 마침...제가 보던 책에 나와 있네요...님 찌찌뽕이에요...

음....제목이 뉴욕영화관이라네요!

서 있는 금발의 저 여자는 그러니까... 극장 안내원인가보아요..

플레져 2005-01-0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 요즘 세상과 맞물려 있는 이야기지요. 카드의 환상을 벗어나야할텐데요...

복순이언니님, 맞아요, 뉴욕까지는 생각이 났는데 말이지요...ㅎㅎ 극장 안내원인 것 같네요. 저는 영화 보다가 일어나 호젓하게 숨어버린, 혹은 늦게 영화관에 도착해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외로운 관객 쯤으로 생각했거든요. 큭큭...

icaru 2005-01-0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음~ 정말 그래 보이네요...

2005-01-05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1-0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언니님, 호퍼의 그림들은 요즘의 나날들과 많이 비슷해요. 쓸쓸하고, 외롭고...

속삭이신님, 감사합니다. 찾아뵐게요 ^^
 

   꽃이 졌다는 편지

   1.


  이 세상에서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휜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詩 : 이진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호밀밭 2005-01-0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라진 땅에서 핀 꽃, 안쓰럽지만 예뻐 보이네요. 사실 생명력이 너무 강해 보이는 식물은 안 좋아하지만 저 꽃은 강한 생명력에 여리여리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강한 것이 모습도 강하다면 세상과 어울릴 수 없을 거예요.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이 부분이 좋네요. 좋은 시예요. 자꾸 읽게 되는 매력이 있어요.

플레져 2005-01-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호밀밭님의 말씀이 더 와닿네요. 강한 것이 모습도 강하다면 세상과 어울릴 수 없을 거라는..........
 

내가 가장 아프단다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詩 : 유안진



올 한 해 잘 견뎌준 나, 내년에도 잘 해보자, 우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水巖 2004-12-3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참 잔잔하게 가슴에 와 닫는군요. 퍼 갑니다.

로드무비 2004-12-3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장하세요.

내년에도 우리 함께 잘 놀아보아요.

하나님의 축복이 듬뿍 내리길......^^

플레져 2004-12-3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오늘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로드무비님, 님의 우정 고마웠어요. 잘 놀자구요~ ^^

2004-12-31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5-01-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참 좋네요^^
 



삼나무 틈으로부터, 집에 있나 하고 들여다보니, 미케코는 설날이라 새 목걸이를 달고 얌전하게 툇마루에 앉아 있다. 그 잔등의 동그스름한 모양새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아리땁다. 곡선미의 극치라 하겠다. 구부러진 꼬리의 곡선, 발을 꺾고 앉은 품, 나른한 듯 귀를 이따금 쭈뼛거리는 모양 등등, 도저히 형언할 수가 없다.

더구나 햇볕에 잘 드는 곳에 포근한 듯 얌전히 대령하고 있는지라, 신체는 정숙 단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벨벳도 못 당할 정도로 매끄러운 온몸의 털은 새봄의 햇빛을 반사하여, 바람이 없음에도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만 같다.

나는 얼마 동안은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제정신을 찾음과 동시에 나직한 소리로, "미케코, 미케코" 하고 부르면서 앞발로 손짓 (발짓인가?) 했다.

미케코는 "어머, 선생님" 하고 툇마루를 내려선다. 빨간 목걸이에 달린 방울이 짤랑짤랑 울린다. 옳아, 설을 맞아 방울까지 달았구나, 참 좋은 소린데, 하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에 내 곁에까지 와서, "어머,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꼬리를 왼쪽으로 흔든다. 우리들 고양이 족속 사이에서 서로 인사를 할 땐, 꼬리를 막대기처럼 곧추세워서, 그걸 왼쪽으로 빙글 돌리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12-28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4-12-2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저두 요새 읽고 있는데, 그 고양이 참 해맑지요? ㅎㅎ 무례하면서도 제 주인 닮아 잘난척을 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