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없으면 카드를 쓸 수 있었고 카드 한도가 넘으면 현금카드를 쓸 수 있었다. 이 은행에서 마이너스통장을 채워야 될 때가 되면 다른 은행의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던 그 멋진 신세계의 순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던 때가 그러니까 벌써 여러 달 전의 일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한도가, 혹시 다른 카드가 있으시면, 하고 매우 겸손하게 직원이 얘기할 때 어머 그래요, 몰랐다는 듯 지갑에서 다른 카드를 꺼낼 수 있었던 건 더 이전의 일이다. 이렇게 독촉장이나 혹은 독촉전화를 받을 때면 몹시 후회를 할 때도 있지만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던 시절,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전엔 나는 무도회장 바깥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었다.

<호텔 유로, 1203 - 정미경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자본주의의 유희...

그림은 호퍼의 것인데, 제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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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0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깍두기님한테 저 책 선물 받았는데...빨리 읽어 봐야겠군요. 이 책에서 플레져님이 자본주의 자극을 받으셨나?^^

플레져 2005-01-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예전부터 자극은 받고 있었는데, 이제사 실천 좀 해보려구요 ^^


호밀밭 2005-01-04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던 시절>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호퍼의 그림은 쓸쓸해서 좋아요. 그림 속 사람들이 화사하지 않은 점이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하고요.

icaru 2005-01-0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긴 글과 호퍼의 그림... 어울리는 짝이네요~!

님이 올리신 저 호퍼의 그림... 마침...제가 보던 책에 나와 있네요...님 찌찌뽕이에요...

음....제목이 뉴욕영화관이라네요!

서 있는 금발의 저 여자는 그러니까... 극장 안내원인가보아요..

플레져 2005-01-0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 요즘 세상과 맞물려 있는 이야기지요. 카드의 환상을 벗어나야할텐데요...

복순이언니님, 맞아요, 뉴욕까지는 생각이 났는데 말이지요...ㅎㅎ 극장 안내원인 것 같네요. 저는 영화 보다가 일어나 호젓하게 숨어버린, 혹은 늦게 영화관에 도착해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외로운 관객 쯤으로 생각했거든요. 큭큭...

icaru 2005-01-0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음~ 정말 그래 보이네요...

2005-01-05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1-0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언니님, 호퍼의 그림들은 요즘의 나날들과 많이 비슷해요. 쓸쓸하고, 외롭고...

속삭이신님, 감사합니다. 찾아뵐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