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금이 없으면 카드를 쓸 수 있었고 카드 한도가 넘으면 현금카드를 쓸 수 있었다. 이 은행에서 마이너스통장을 채워야 될 때가 되면 다른 은행의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던 그 멋진 신세계의 순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던 때가 그러니까 벌써 여러 달 전의 일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한도가, 혹시 다른 카드가 있으시면, 하고 매우 겸손하게 직원이 얘기할 때 어머 그래요, 몰랐다는 듯 지갑에서 다른 카드를 꺼낼 수 있었던 건 더 이전의 일이다. 이렇게 독촉장이나 혹은 독촉전화를 받을 때면 몹시 후회를 할 때도 있지만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던 시절,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전엔 나는 무도회장 바깥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었다.
<호텔 유로, 1203 - 정미경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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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유희...
그림은 호퍼의 것인데, 제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