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계단을 핥을 정도로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수국은 소담스럽게 핀 꽃잎 하나도 땅바닥에 끌지 않았다.

"많이 기다리셨죠?"

현관 등불 아래 환하게 드러난 릴리의 아름다움에 기타무라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촉촉이 젖은 꽃의 요정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맨 얼굴이 훨씬 좋아."

"위로해주지 않아도 돼요."

"정말인데."

릴리는 수줍어 고개를 숙이다가 물웅덩이에 잠긴 기타무라의 맨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그렇지만, 특별히 다정하게 해주려고 그런 건 아냐. 뭔가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군."

"자비 같은 건 아니죠?"

"자네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로 넉넉한 사람이 아니야."

릴리는 기타무라의 목에 매달리더니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뼈마디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릴리의 등은 야위었다. 긴 입맞춤 뒤에 두 사람은 뺨을 맞대고 빗소리를 들었다.

"손님,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자자구?"

"아뇨, 그런 거 아녜요. 그런 말은 못 해요."

"마치 밤을 마시듯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더니 기타무라의 귓전에 가느다랗게 그 숨을 토하며 릴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속삭였다.

"부탁이에요. 나하고 같이 죽어줘요."

<아사다 지로, 수국꽃 정사>


 

사진 : 불두화 (수국꽃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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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6-02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같이 죽어달라니......ㅠ.ㅠ 아름다운 꽃에는 처절함이...

sooninara 2005-06-0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사람들은 죽음을 동경하는거 같아요..수국꽃 정사라니.
야시시하네요..사자는 죽을사인가봐요.

stella.K 2005-06-0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꽃 정말 예뻐요. 플레져님 다시 돌아오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유난히 님이 많이 생각났었단 말이어요.^^

mira95 2005-06-0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꽃은 예쁘지만 밑은 이야기는 오~~ 처절하군요^^

플레져 2005-06-0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수국꽃이 마냥 예쁘게만 보이지는 않지요? 아사다 지로의 글이 있어 더 슬픈 것 같아요. 수니나라님의 그 지적, 정말 일리 있네요 ^^ 스텔라님, 어쩐지 저두 자꾸 님 생각 나더라구요!! 미라님, 글이 참 아리죠? ㅠㅠ

2005-06-0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5-06-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군요. 새로운 모습으로 뵙네요.그러고 보면 일본사람들의 미감은 아주 얇은 복어회에 든 극소량의 독약같은 맛이 나는 걸까요. 잘 보고 잘 읽고 갑니다.

icaru 2005-06-0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소담하고 수긋하도다...!

2005-06-03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5-06-0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꽃보다 플레져님이 훠얼씬 반갑습니다

플레져 2005-06-0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자~~ 여러분들, 이 꽃은 수국이 아니고 불두화라고 합니다.
친절하신 어느 님께서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
속닥님, 감사해요 ^^*

하니님, 잘 지내셨지요?
이카루님, 불두화래요, 정정! ㅎㅎ
부리님, 반가워요~

icaru 2005-06-0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불두화...!

superfrog 2005-06-1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잖아요. 저도 놀러가서 하.. 이렇게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꽃이 도대체 뭔가.. 했는데 님이 수국이라 하셔서 그렇구나, 했지요. 헌데 얼마 후에 시어머니가 불두화 라고 하시더라구요. 수국이랑 꽃모양은 비슷한데 나무에서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리는 건 불두화라고 그러시더군요.^^ 불두화건 수국이건 저 꽃이 제게 준 임팩트는 엄청나게 강합니다. 이름이 무엇이든 멋진 꽃이잖아요.^^

플레져 2005-06-2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이름만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절에는 불두화가 꼭 있대요. 정말 영험해보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