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은 마치 레즈비언이라는 낱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대답했다.

“글쎄다. 난 특별히 남녀 관계의 대신이라고 생각해서 한 건 아닌데. 그냥 재미있는 장난이랄까?”
“장난이라니? 저 애는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 그게 장난이야?”
“아하, 넌 모르지? 사실 쟤도 즐기고 있었어.”

지란이 고개를 돌려 여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쟤 엄청 M이야. 마조히즘(Masochism)의 M. 이 놀이도, 뭐 내가 먼저 하자고 한 거지만, 쟤가 점점 더 해달라고 한 거야. 난 그냥 가슴만 만져보려고 했는데, 점점 손을 아래로 내려달라고 해서……”

그렇다면 레즈비언은 지란이 아니고 노혜였다는 말인가. 평소에 여자애들의 엉덩이며 가슴을 시도때도 없이 만지는 지란은 그저 장난꾸러기였을 뿐이고? 어쩌면 지란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동성애 지향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성애자라는 인식 하에 동성애에 흥미를 보이는 양성매념(兩性魅念)일 수도 있다.

아직 이렇다 할 대화도 못 나누어본 노혜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양은 자신이 느낀 죄책감과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도 된다는 이야기다. 아까 노혜가 말했던 ‘제발’이 제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함께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몰라. 나 빨리 샤워하고 잘래.”

여양은 그런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퉁명스레 말하곤 욕실 겸 화장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지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만날 마미랑 붙어 다니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냐.”

농담조의 말투였지만 왠지 뼈가 있는 말 같았다. 흘려듣기에는 너무 딱딱했다.

“여양아, 너도 아까 꽤 흥분한 눈치던데…… 오늘 네 침대에서 같이 잘까?”
“아니. 유감스럽지만 룸메이트랑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진 않거든.”
“그거 아쉬운 말씀입니다. 난 더 좋은 관계가 될 것 같은데. 생각만 있음 언제든 말만 해.”
“그래, 외로우면 출장 서비스 부를게.”
“난 제법 비싸다고.”
“몸으로 때우지 뭐.”
“뭐야, 그럼 결국 공짜잖아?!”

투덜거리는 소리를 남겨놓고 히히, 웃으며 문을 닫았다.


* * * * * * * * * *


처음엔 잠을 쉬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바람과 파도의 소리도 이제는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가처럼 느껴진다. 아기처럼 입술을 살짝 벌리고 얕은 숨소리를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던 마트료나는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방금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음을 떠올렸으나 그 꿈의 내용만은 안개 속을 더듬는 것처럼 불투명했다. 꽃이 무성한 화원 속에 있었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색상의 꽃이 발치에서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던 잔영.
하지만 현실은 어두침침하고 검푸른 작은 방이었다. 룸메이트 나즐리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고, 다급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살짝 열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지급한 파자마를 입었고, 한 사람은 그 위에 바막이라 불리는 후드자켓을 입고 있고 다른 하나는 털실로 짠 스웨터를 덧입고 있었다.

바막이 턱짓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갈색 곱슬머리에 커다란 코, 콧잔등과 뺨에 가득한 여드름이 인상적인 유럽인의 얼굴이었다. 스웨터는 약간 중국이나 몽골 쪽 인상이었고, 입을 여니 북한말과 같은 억양이 흘러나왔다. 조선족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러시아 출신?

“억지로 끌고 가기 전에 제 발로 나와.”

마트료나는 그 말대로 했다. 영문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초대(사실 납치에 가깝지만)였으나 이들은 그저 심부름을 하는 역할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에게 묻거나 반항을 해봤자 허사일 것이다. 두 명이나 왔다는 것은 그럴 경우 강제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데리고 갈 것이라는 무언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마트료나가 방을 나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바막이 앞에, 스웨터가 뒤에 서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나와보는 한밤중의 복도는 드문드문 있는 조명등의 희미한 빛에만 의지하기엔 힘들 정도로 어두웠으나 두 사람은 익숙한 듯 태연했다.
까닭 모르게 피어나는 두려움을 마트료나는 두 사람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겨내었다.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라 세 사람은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바막이 손등을 들어 짧게 두 번 노크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황금빛 머리카락을 빛내며 카밀리아가 나와서 마트료나를 맞았다.

“웰 컴, 마트료나. 전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네. 난 카밀리아라고 해.”

그는 간단히 자기 이름만 말해주고 문을 열어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고, 스웨터가 문을 닫았다. 밖에서 불을 켜놓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불은 꺼놓은 상태로 스탠드와 몇 개의 촛불을 밝혀놓은 상태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촛불의 빛을 받아 일렁이는 그림자가 이 밀회에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안에는 카밀리아 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카밀리아가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여기 조그만 애는 내 룸메이트인 돌로리스고, 여기 이 분이 학생회 총무부장이자 차기 여왕에 도전하는 메이브 이졸트 던세이니.”

다리를 꼬고 한 손을 턱에 얹은 채 마트료나의 모습을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던 갈색머리의 아일랜드 소녀가 눈을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다움을 뽐내듯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트료나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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