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듣고 헤어졌지만 인상은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금발벽안의 소녀에게서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의도를 모르는 말을 잔뜩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차가운 몸만이 아니라 혼란스런 머릿속도 더운 물로 씻어내고파 얼른 방문으로 다가가며 주머니에서 학생수첩을 꺼내었다. 그리고 초인종 아래의 접속단자에 갖다 대려는데,
“아흑……”
문 저편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온몸이 햇볕 아래 놔둔 찰흙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살며시 귀를 문에 대자 야릇한 음성이 이어졌다. 하아……, 웃, 아흐으……, 어맛, 아힝…… 등등. 목소리를 작게 내려고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은 역력했으나 틀림없이 끈적한 신음과 거친 한숨의 향연이었다.
설마 지란이 애를 낳고 있을 리는 없고, 다쳐서 아파하는 소리라기엔 너무 음란하니, 어딘가에서 야한 잡지라도 주워서 자위를 하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 톤이 지란과는 딴판이다. 다른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다.
호기심보다 두려운 마음에 수첩을 대고 문을 여니 방 안은 불을 꺼놓았는지 어두침침했다. 그리고 머리만 안으로 슬쩍 내밀며 안을 살펴보았더니,
“아악! 흐읏, 하아……”
책상 위의 스탠드만 켜놓아서 음침한 가운데, 농염한 음성을 꾸준히 토해내는 낯선 얼굴의 소녀가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를 반쯤 가리듯이 엎드려 있는 뒷모습의 주인공은 지란이었다. 지란의 왼손은 소녀의 사타구니에, 그리고 오른손은 왼쪽 가슴 위에 얹혀 있고 그 손가락들이 소금 뿌린 미꾸라지처럼 격렬하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양이 얼어붙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지란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태연한 목소리로,
“어머나, 벌써 왔어? 난 한참 더 있어야 올 줄 알았지.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지?”
라고 말하는데 어디서부터 꾸짖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벗어 던져진 교복이 방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져 있고, 풀어 헤쳐진 타이를 보니 동급생인 모양인데, 왜 야심한 시각에, 여자애 둘이서, 그것도 자기 침대도 아니고 여양의 침대 위에서, 여자끼리 묘한 짓을 해서, 방 밖에까지 들리도록 야한 음성을 발산하고 있는 것인지.
일단 “야! 이게 무슨 짓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어 공기를 축적하려 했다. 그런데 지란이 몸을 슬쩍 일으키더니 자신이 갖고 놀던 동급생을 가리키며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얘는 우리 반 친구 왕노혜야. 예쁘지? 이 가슴 좀 봐. 그냥 한 눈에 뿅 갔다니까. 오늘 체육시간에 옆에서 옷 갈아입다가 처음 알았지 뭐야. 이렇게 크고 예쁜 가슴을 하고 말이야.”
그 말에 절로 시선이 왕노혜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러자 들이켰던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서 팽창하여 그대로 폐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만들 가치가, 분명 그의 가슴에는 있었다.
여양은 저토록 큰 가슴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 이모, 고모, 초중학교 선생님, 대중목욕탕에서 본 어른들…… 그 누구를 떠올려 봐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마찬가지고, 다만 가슴 크기로 유명해서 인터넷에서 봤던 외국 모델이라면 비교할 만은 할 것 같았다.
저 아이는,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허리가 구부러질 거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워 있는데도 봉긋이 솟아오른 둥글고 탐스러운 저 수밀도의 열매, 그리고 그 위에 케이크의 장식처럼 살짝 올려진, 작고 귀여운 비밀의 씨앗까지.
여양은 타인의 여체를 이토록 탐스럽고 욕망에 가득한 눈길로 쳐다본 적이 없음을 인식하면서도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모든 이성의 편린들은 저 풍성한 여신의 수확물에 파묻혀 녹아버렸다.
“어때, 어때? 너도 만져볼래?”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이토록 간사해 보일 수 있었던가. 늘 과자와 초컬릿을 오물거리던 저 입술이 지금은 치명적인 유혹을 설파했고, 초컬릿이 묻어나던 저 손가락이 풍요로운 언덕 위를 가로지른다. 여양은 저도 모르게 다가간다. 최면에 걸린 듯 몽롱했고,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맡겨놓은 정신은 사고작용을 포기했다.
“아흑, 제, 제발……”
소녀의 반쯤 울먹이는 소리가 여양의 정신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고 현재의 상황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무렵에는 이미 그 손이 극락을 움켜쥔 후였다. 좌여양 우지랄이라고 할까, 여양이 왼쪽을, 지란이 오른쪽 젖가슴을 탐닉하고 있었으니, 심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긴 했으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어때? 최고지?”
지란의 입에서는 침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의 혐오감도 일었으나, 결국 자신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이상 그런 감정을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지란의 입에서 나온 가늘고 투명한 저 액체가 거미줄이 되어서 이 소녀와 자신의 몸을 옭아맬 것만 같이 느껴졌다.
여양은 일어나 불을 켜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서 말없이 건네주었다.
“왜, 더 놀자.”
지란이 칭얼거리듯 말했으나 여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건 노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것 같아. 오늘은 이만 하자.”
여양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노혜가 옷을 다 입기를 기다렸다가 옆에 앉아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말 미안해. 처음 만난 사이에 갑자기……”
“처음 같지 않은 걸. 지란이랑 애들에게 얘기 많이 들었거든.”
또 유명세다. 여양은 앞으로 친구 만들기는 참 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전교생에 교사들까지 보는 신문에 여왕 후보로 버젓이 올라서 아무런 활동도 없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북도정을 지지율에서 앞서고 있는 것만 봐도, 얼마나 자신이 유명해져 있는지는 실감할 만 했다. 자기소개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편리하지 않은가.
노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니 두 갈래로 땋아서 리본을 단 귀여운 머리 모양이 드러났다.
“미안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와서 부끄러운…… 짓을 해서……”
고개를 떨구더니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내일 보자는 비슷한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지란은 자기 침대 위에 클 대(大) 자로 눕더니 히죽거리고 있었다.
“으흐, 흐흐, 한창 좋았는데. 내가 쟤 별명 붙였어. ‘탱이’라고, 젖탱이에서 앞자 떼서 탱이야, 히히.”
“야, 너…… 설마 진짜 그거야?”
“그거 뭐?”
“레즈비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