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어둠 속의 손길


찬바람을 많이 쐬어서 그런지 몸이 고단하고 손발이 차가웠다. 여양은 욕실에서 뜨거운 물로 얼른 샤워를 하고 따스한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복도로 들어서니 방을 스무 걸음 정도 남겨두고 벽에 삐딱하게 등을 기댄 채 서있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와 블레이저 소매의 장식 색깔이 초록색인 것을 보면 2학년인데, 작은 키와 가냘픈 몸집이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아담했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날씬한 정도를 넘어서 야위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여양은 초등학교 시절 수수깡 공작 시간을 떠올렸다. 마치 노란 수수깡으로 만든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연한 금발과 푸른 눈, 하얀 피부가 눈에 확 띄는 백인 소녀인데 머리에 선글라스를 얹어 놓았고 겨울임에도 아찔할 정도로 짧게 줄인 스커트에 무릎 아래로는 서너 가지 색의 줄무늬가 수놓아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입학할 때 엄격하게 소지품 검사를 했을 텐데 저런 것을 잘도 착용하고 있구나 싶었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올 때 몰래 갖고 왔지 싶은데, 아무래도 재학생에게 신입생과 같은 엄격한 검사를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복장과 외모 때문에 복도 한 가운데 불량한 자세로 서있을 뿐인데도 왠지 잡지의 화보 촬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하루에 몇 명이나 보고 만나고 하지만 여전히 이색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녀는 가느다란 허리를 뽐내기라도 하듯 상체를 옆으로 꺾고 등을 벽에 기댄 채 한쪽 다리를 털듯이 떨고 있다가 여양을 보고는 허리를 젖히며 튕겨 나오듯 벽에서 몸을 떼고는 몸을 돌려서 정면으로 향했다.

“네가 여왕님이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TV방송으로 전교에 유명세를 떨쳤으니 무리도 아닌 모양이었다. 여양은 조금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예쁜 얼굴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심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그런데요.”
“긴장할 거 없어.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뾰족한 송곳니를 살짝 보여주며 그렇게 말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 태연한 척 하려던 시도는 실패한 듯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 마디를 더 보탠다.

“가만히 보니 너도 제법 맛있을 것 같은데. 통통한 게 부드러울 것 같아. 언제 한번 만날까? 후훗.”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설마 정말로 살을 뜯어 먹을 생각인가? 여양은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앳된 외모는 어쩌면 흡혈귀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도 유명하길래 어떤 앤가 직접 보고 싶어서 와봤어. 그 뿐이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아, 그러세요,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하고 넉살좋게 받아넘길 법도 하건만 이 작지만 거대한 소녀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 러시아에서 온 애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뜬금없는 질문. 그게 어때서, 혹은 그걸 왜 물어보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법을 거는 듯한 요염한 눈빛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쥐를 바라보는 뱀과 같은,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 저 조그맣고 귀여운 외모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예, 그런데요…….”
“너희들 무슨 사이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 길금윤이 정학을 마치고 풀려났어. 너희 둘이서 같이 만났지? 그 나이프 사건을 되새겨보자면 길금윤의 인질은 그 러시아 아이였고, 넌 그 아이를 용감하게 구해내었어. 훌륭한 미담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었지?”

금윤에 대해서는 교내신문에서도 다루었으니 누구나 알겠지만 만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신문부 기자마저 따돌렸던 그들의 만남을. 수수께끼는 눈사태처럼 점점 거대해졌다.

“하지만 네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아이인지 몰라도 막 고등학교 입학하는 신출내기가 칼로 인질의 목을 겨눈 미친년을 제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우리가 너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특별히 운동이나 무술을 한 것도 아니고 뮤지컬 특기생이라고 하던데.”

우리? 그가 말하는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결국 이럴 때 가장 쉽게 써먹는 해결책은 사랑의 힘이란 거 아니겠어? 아직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내 생각엔 평범한 여자애가 무모해질 정도로 용감해지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봤어. 어때?”

어떻냐니.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딩동댕, 정답입니다! 혹은 땡! 틀렸습니다. 같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여양의 얼굴을 쏘아보던 그는 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나름 고집도 있나보지? 그래봤자 곧 알게 될 거야. 빠르면 내일 당장이라도.”

뚱딴지 같은 말을 하더니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서 큭큭 웃는다. 여양에게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는 대화였다. 기실 대화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지만.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다 마쳤는지 작은 체구의 백인 선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별로 말해줄 생각이 없던 모양이라, 여양은 이름이라도 알아두고자 눈에 힘을 주고 그의 가슴팍을 노려보았다. 겨우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작은 가슴 위, 짙은 녹색 명찰에 하얗게 써있는 한글 이름과 그 아래 조금 작은 크기로 적힌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돌로리스 퀸 Dolores Quinn」

퀸? 여양은 순간 Queen으로 잘못 보았으나 다시 보니 Quinn이었다. 철자는 다르되 발음은 거의 같은 퀸. 순간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만 한 감정이 솟구쳤다. 분명 이 사람도 자신과 같은 놀림을 받으며 살아왔음이 틀림없다, 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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