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좀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인 걸. 특히 아랍 문화권에 대한 편견이…… 뭐 좋아, 그 얘기는 다음에 하고, 일단 여기는 유학생이 많은 국제고인데 이런 비인권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국제적 망신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지. 이 제도를 만든 건 지금 이사회, 그러니까 영화궁 재단인데, 여기는 폐쇄된 곳이고 밖으로의 정보 유출이 차단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방학이나 졸업 등으로 학생들이 외부로 나간 후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게 기분 좋지는 않죠.”
“당연한 일이야. 문제는 학생의 인권만이 아니야. 이런 제도를 만든 이사회의 횡포도 횡포지만 그걸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교사들의 무력함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교장 자리에 어린애를 앉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봐. 이 학교의 선생들은 이사회에 비하면 애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지.”
“아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이 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 건 전부 이사회의 몫이고 교사들은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니까. 이곳이 누구의 돈으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선생들은 아무도 몰라. 막연히 태북그룹이 후원해서 학교가 돌아간다는 정도밖에는. 여기 수업료가 비싸다고 예전에 언론에서 한 번 비판을 했지만 이 섬의 건설과 학교 운영비를 생각하면 택도 없는 거 아닐까? 솔직히 나도 너처럼 장학생이야. 난 글짓기 대회에서 몇 번이나 입상을 한 덕분에 여기에서 공짜로 지내고 있어. 우리 같은 장학생들이 한둘이 아니고, 해외 유학생들의 입학금과 수업료는 한국 학생들의 절반도 안 되거든. 학생들이 낸 돈으로 이렇게 푸짐한 식사를 세 끼 먹으며 지낼 수 있을까?”
여양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품었던 의문이다. 고맙게도 장학생에 뽑혀서 삼 년간 무료로 먹고 자고 배울 수 있게 되었지만 황송할 정도로 좋은 이 학교의 운영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유학생이자 장학생인 체링은 졸업 후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이런 귀족 학교를, 인공섬을 운영할 만한 자금이 모일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그런 식으로 하려 해. 수감 생활이나 다름없다는 징벌방에서의 생활을 자세하게 싣고,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학교의 부조리함, 그 학교를 쥐락펴락하는 이사회에 대한 비판, 아울러 이사회에 꼼짝 못하는 무력한 교사들까지. 이걸 계기로 학생들이 단체로 항의를 한다면 이 제도가 없어질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사실 지금도 징벌방에 갇혀 있는 학우가 있어. 그를 풀어주는 계기가 된다면 더 좋겠지.”
과연 신문부의 수석기자, 라고 활어 선배가 말했던가. 여양은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승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그와의 만남은 입학식 날부터 있었다. 다짜고짜 인터뷰를 하자고 접근하길래 매몰차게 거절하고 도망만 다녔는데, 그 덕분에 여양에게 있어 그는 끈질기고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만 남아 있던 것이다.
이야기를 해보니 승미는 차분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취재 때문에 자주 같이 붙어 다녀서 활인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막무가내에 넉살 좋은 활인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속에 섞여서 지나가는 바람에 들을 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승미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학생이 사고를 당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여양 자신이 장학생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신문부의 정보력이라는 것이 이토록 넓고 치밀했어나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자, 이젠 더 도망치진 않겠지? 그리고 참, 명심해. 난 아직 네 인터뷰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전 여왕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으니까 인터뷰를 할 이유도 없다고……”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그런 신비주의만 고집하다가는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벌써 북도정이 바짝 추격하고 있어.”
“…….”
여전히 여왕에 대해선 흥미가 없었으나, 북도정이 자신을 앞선다고 생각하면 왠지 분하고 싫었다. 북도정이 여왕이 되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빈나련이든 누구든 한 사람을 정해서 지지선언을 하고 선거를 돕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망설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 주는 운명적인 느낌일까, 아니면 학생들이 자신에게 느끼고 자신에게서 바라는 어떤 기대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왕의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일까.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승미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났다. 금윤과 나영과 친구들도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얼른 다가가 승미와 나눈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줄여서 전했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인터뷰할게, 하겠어. 결심을 하니 편해지는 것 같아. 뭐랄까……, 한 달 동안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금윤은 정말로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양과 마트료나는 금윤 일행이 떠들썩하게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본 후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의 사이에 섞여서 즐겁게 웃고 수다를 떠는 금윤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여자애일 뿐이었다. 부디 저 미소를 계속 볼 수 있기를. 여양은 작아지는 금윤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가자, 마미. 오늘도 힘든 하루였지?”
“그래도 무사히 잘 해결된 거 같아서 기분은 좋아.”
“그럼 우리 목욕탕에 가서 몸이나 담글까?”
“우리 여양은 정말 목욕을 좋아하네?”
“그냥 탕 속에 녹아들고 싶어. 하하하.”
“그런데 사실 나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려놨거든. 오늘은 안 되겠어. 지란이랑 가.”
“그럼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지.”
둘은 손을 잡고 식당을 나섰다. 무사히 잘 끝난 기분 좋은 하루.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그것도 두 가지 사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제4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