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메이브는 한참만에 입을 열고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가 과연 무엇을 알았는지는 마트료나를 제외한 모두 알고 있었다. 넋을 놓은 듯한 그 얼굴에 카밀리아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두 손이 메이브의 목덜미와 허리를 뱀처럼 슬며시 파고들었다.

“저 아이가 그렇게 맘에 들어?”
“후훗.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내가 단언하건데, 저 아이는 진짜야. 허영과 욕심에 물들지도, 질투와 아집에 찌들지도 않은, 천박함과 겉껍데기밖에는 없는 싸구려 인생들과는 전혀 달라.”
“저 애가 나보다 더 낫단 말이야?”

메이브는 아양을 떠는 듯한 카밀리아의 목소리를 무시하듯 여전히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을 비롯해 내가 지금껏 본 모든 여성들을 다 가짜요 쓰레기로 몰아붙인다고 해도, 이 아이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

옆에서 가만히 있던 돌로리스가 뺨을 부풀렸다.

“치. 그 말은 뭐야, 우리가 다 쓰레기란 말이야? 이 신출내기 혼혈아보다 못하다고?”
“최소한 너보다는 나을 것 같구나, 롤리타.”
“또 나한테 싸움거려는 거야? 받아주지!”

자주 있는 일이지만 둘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메이브에게 있어 짜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거친 목소리로 저지했다.

“둘 다 닥쳐. 설마 내 눈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진 않겠지? 신이 내린 이 감식안에 오차나 오류 따윈 없어. 이 눈동자가 나에게 직접 말하고 있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소녀가 여기에 있다고. 거울이 백설공주를 비춰주듯 그렇게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어.”

에메랄드 아이(Emerald Eyed), 신이 내린 눈동자, 레이디 던세이니(Lady Dunsany), 요정왕국의 공주님. 아일랜드 민담에 나오는 요정 나라의 여왕에게서 따온 이름인 메이브에게 붙여진 숱한 이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초록색의 눈동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 눈은 초능력으로 오인받을 정도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진다.

유서깊은 아일랜드의 귀족이자 마법사의 혈통인 던세이니 가문의 후예로, 여성으로는 드물게 정통 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기 자신마저 가짜며 쓰레기로 치부하면서까지 아름답다고 칭송하고 있는 이 소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잠깐, 메이브. 그렇다면 그 말은……?”

당황스러워 하는 카밀리아가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에 메이브는 예상하고 있다는 듯 답했다.

“바로 그거야. 여기에 있는 이 소녀야말로 가장 여왕에 걸맞는 재목이란 말이지.”

방 안에 있던 소녀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웨터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고 자기 목소리에 놀라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왓 더 헬(What the hell)?! 서, 설마, 메이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아이에게 여왕 자리를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이제 카밀리아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난 그러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럴 용의도 있어.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지?”

메이브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뒤에 서있던 바막과 스웨터가 마트료나에게로 다가갔다. 메이브는 혀로 입술을 핥고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

“마트료나, 우리들 LXG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irls. 쉽게 말해 유학생들의 모임이야. 하지만 유학생이라고 다 받아주는 건 아니지. 오직 이 눈이 인정한 엘리트만이 LXG의 멤버가 될 수 있어.”
“엄청난 영광인 줄 알아! 지금 LXG는 여기 있는 다섯 명이 전부니까 말이지!”

옆에서 돌로리스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끼어들었다. 메이브는 살짝 흘겨보는 것으로 기를 죽이고는 말을 이었다.

“LXG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야. 성적이 우수하거나, 외모가 빼어나거나. 그걸 알기 위해선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입학한지 한 달밖에 안 된 신입생을 가입시키고자 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런데 너, 클럽 활동은 하고 있어?”
“아뇨. 아무것도……”

마트료나는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메이브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어리딩 부에 들어오도록 해. 작년엔 내가 부장이었고, 올해엔 여기 카밀리아가 부장이니까.”
“오케이. 넌 키가 좀 작지만, 상관없어. 여기 롤리타도 치어리딩부거든.”
“그래, 내가 가장 키 작은 부원이다, 어쩔래! 하지만 유니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나라고.”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아무튼, 들어오겠다면 받아주겠어. 키는 몰라도, 얼굴 마담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마스코트적인 존재인 나를 제치고 쟤를 간판으로 내세우겠다는 말이야?”

또 말다툼으로 번질 것 같자 메이브가 사전에 차단했다.

“부의 문제는 부실(部室)에 가서 하고, 오늘은 마트료나의 LXG 입단 환영식을 위해 모였으니. 다같이 축배를 들까?”

어느새 마트료나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입단 환영식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대답은커녕 아직 마음도 정하지 못한 마트료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바막이 방 구석으로 가더니 페트병과 종이컵을 가지고 왔다. 당연히 음료수일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여니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발효된 과일 냄새, 알콜의 자극적인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카밀리아가 당황한 마트료나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놀랐니? 이건 우리가 담근 특제 과실주야. 학생 신분인 우리가 술이나 알콜류를 갖고 들어오거나 살 수는 없지만, 알다시피 우린 고향에서 얼마든지 술을 마셨어. 난 프랑스 유학할 때 포도주를 물처럼 마셔댔지. 그래서 직접 만든 거야. 과일이야 식사 때도 나오지만 이 섬의 정원 곳곳에 있는 과일나무에게서 얻었지. 체리, 산딸기, 포도…… 특히 학생회관 뒤에 있는 제주 감귤 밭이 멋지지. 거기다 요리연구부에게서 얻어온 이스트와 설탕만 있으면 재료는 충분한 셈이야.”

카밀리아는 컵에 따른 액체의 향기를 음미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작년에 포도랑 산딸기를 섞어서 담근 거야. 조금 시지만 나름대로 마실 만 해.”

어느새 여섯 개의 종이컵에 술이 따라지고 모두에게 돌아갔다. 메이브가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자, 세계 최고의 학교에 모인 우리 유학생들이 영화궁을 지배하는 그 날을 위해 건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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