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손만 뻗어도 닿을 것만 같이 생생한데, 아직도 입술에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눈물이 눈에서 뺨을 지나 귀와 턱까지 흘러내렸다. 세 사람의 표정이 근심으로 바뀌었다.

“어딘가 아픈가봐. 하긴 내가 발견했을 때 보니까 온몸이 젖어 있었어. 아마 그 근처를 걷다가 발을 헛디뎌서 시냇물에 빠졌나봐.”

첫 번째 얼굴, 여왕님이라 불린 아이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본명이었지만, 지금 마트료나는 알지 못했다. 여왕님이라는 말에 그 사람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말을 떠올렸지만, 자신의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문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안녕, 미래의 여왕님’

여왕님이란 게 뭘까? 그 왕관 모양의 배지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때 문이 열리면서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물론 여성-이 들어와서 마트료나의 이마를 짚어보고 입을 벌리게 해 혀를 살펴본 후 겨드랑이에 끼워 놓았던 전자 체온계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흐음.”
“어때요? 좀 나아졌나요?”

왕님이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으쓱하고는 체온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100도네.”
“네엣?!”

세 사람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마트료나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듯이 보이지만, 사람 몸이 100도가 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100도면 물이 끓는 온도인데 자연발화도 아니고 몸의 수분이 다 끓어서 증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의사는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굴려 소녀들의 놀란 얼굴을 훑어보곤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화씨로.”
“네에?”

지란의 맥빠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섭씨와 화씨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화씨 451도는 종이가 불에 타는 온도예요.”

체링이 말했다. 지란은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도가 수학과 IT에서 뛰어나다더니 그런 것도 알고 있나 싶었다. 물론 체링은 동명의 소설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었지만 일부러 그걸 설명하지는 않았다.

“저기 선생님, 화씨 100도면 섭씨로는 몇 도 정도 되죠?"

왕님이 조바심이 나서 묻자 의사는 그제야 옆에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듯 체온계를 조작하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단위를 바꾸는 걸 잊었네. 섭씨로는 37.8도. 정상치보다 1도 정도 높지만 괜찮은 수준이야. 퇴원해도 되겠어.”
“하지만 아직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저렇게 울고 있는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님이 보호자라도 된 듯이 말했으나 마트료나가 그 말을 중간에 자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란이 여전히 팔짱을 낀 구경꾼의 자세로 물었다.

“괜찮겠니?”
“저를 병원에 데리고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마트료나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딱딱한 존댓말이었다. 마치 이곳이 싫고 당신들이 싫어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라는 듯한 태도였다.

“잠깐만 기다려!”

왕님이 불러세웠지만 마트료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 장소에 그대로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다른 그 무엇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곳이 어딘지 마트료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궁에 도착한지 겨우 나흘째. 아직 이 섬의 구조와 위치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친해진 아이도 없어 혼자서 섬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경치도 구경할 겸 지리를 익히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채 귀신에 홀린 듯 찾아간 그 정원과 작은 운하의 위치도, 그곳으로 가는 길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좋아. 입술 사이에서 약한 말이 흘러나왔다. 꾹 참고 있었는데 눈가가 시리며 간지럽다. 자신이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는, 세상 가운데 혼자 버려진 고아에 다름 아니었다. 엄마, 아아 엄마.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는 딸의 손을 꼭 잡으며 유언을 남겼다. 너는 여기서 살아가거라. 어머니의 고향, 대한민국만이 마트료나에게 남은 마지막 안식의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렇게 홀로 버려져, 첫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모두들 자신을 버리고 멀리 떠나버리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잠시 시간의 흐름이 뒤틀린 듯, 서둘러 방을 나가려던 마트료나의 동작이 문고리를 감싸쥐면서 서서히 느려지며 멈추었고, 의사 선생님과 지란은 아예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으며, 체링은 뭐라고 말은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입과 손가락만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왕님만이 유유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거침없이 걸어나가 마트료나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기다려봐.”
마트료나는 흠칫 놀라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상대가 자신보다 체구도 약간 크고 힘도 셌다.

“내가 볼 때는 더 쉬어야 할 것 같아. 37도라니 체온도 높잖니, 응?”
“난 갈 곳이 있어서…….”
“정 그렇다면 나랑 같이 가자, 마트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트료나의 애가 타는 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말없이 곤돌라 위에 올라섰다. 마트료나는 얼른 일어나서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정말, 이대로 가실 건가요?”
“미안해. 우린 어쩌면 만나선 안 되는 사이일지도 몰라. 넌 신입생이니까 이것의 의미를 모르겠지만, 아마 곧 알게 되겠지. 그러면 네가 지금 겪은 일이 한겨울에 꾼 백일몽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될 거야.”

그는 ‘이것’이라고 말할 때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작은 왕관 모양의 배지가 태양의 빛을 모두 빨아들인 듯 옅은 안개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황금으로 만든 것이 분명할 그 배지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지만 매우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좁쌀처럼 작은 색색의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 안 돼요……”

곤돌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헤어져선 안 된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 강렬한 예감이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학교 안에서 금방 다시 만날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어둠과 백일몽이라는 낱말과, 아직도 공기 중에 떠돌고 있을 그의 한숨이 마트료나의 영혼에 직접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대로 떠나면, 끝이다.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렇게 말해주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마트료나의 떨리는 입술에서 겨우 나온 건 우물거리듯 칭얼거리듯 나오는 조그만 목소리뿐.

“안 돼요…… 안 돼……”
그 목소리마저 울먹임으로 바뀌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마트료나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트료나, 이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 자신을 가지고. 넌 그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넌 아마도 나를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키스를 하려고 했을 거야. 그치만 난 단언할 수 있어. 너는 곧 나보다 더 아름다워질 거야. 이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찬탄하고, 우러러보고, 숭배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 그때가 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네?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왕관을 기억하고 있어. 이게 네 것이 되면, 이 화원의 주인이 네가 되는 날이 온다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야. 그땐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너의 과거인 셈이지. 너는 나의 미래이고.”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마트료나에게는 그의 말만이 희망이고, 빛이고, 구원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 속에 금빛 실로 수놓아졌다.

“자, 마트료나. 기대하고 있을게. 그럼 안녕, 미래의 여왕님…….”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목 놓아 불러봤지만 곤돌라는 야속하게도 점점 빠르게,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걸으며, 그 다음엔 달리면서 쫓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운하는 커브를 돌리며 수벽으로 가려진 정원 저편으로 사라졌고, 서툰 수영실력을 믿고 운하의 차가운 물에 뛰어들었지만 수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잔디밭만 있을 뿐. 운하는 한쪽 가장자리를 수벽이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삼십 미터도 더 가지 않아 섬의 가장자리에 이르고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곤돌라와 그 위에 탄 소녀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 묻고 싶고, 말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아직 이름도 묻질 못했는데. 그들의 만남은 너무나 짧았지만 첫인상은 너무나 황홀했고 첫키스는 짜릿했다. 하지만 이별은 갑작스럽고 허무하기만 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아니 한 가운데에 그가 들어왔다가 커다란 구멍만 뚫어놓고 사라져버렸다. 이제 이 허전함을, 아쉬움을, 서글픔을 무엇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을까.

마트료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풀 위에 엎어져서 흐느껴 울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여린 육체를 찌르고 할퀴었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짧고 강렬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충격과 슬픔이 더  고통스러워서, 그는 그 자리에서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울고 있었다.


* * * * * * * * * *


“어, 움직였다!”
“진짜?”
“얼른 와봐! 아니지, 먼저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지!”
“이걸 누르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않을까?”
“그래 그거야. 호출기를 눌러.”
“손을 움직이네? 얼굴도 조금씩 움직이는데? 눈도 뜨려고 해! 완전히 깨어났네!”
“잘 됐다.”

시끄러운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졌다. 마트료나는 무엇보다 시끄럽고 짜증이 나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려고 했다. 정말 멋지고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훼방꾼들이 나타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서히 눈을 뜨니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 세로 선이 그어진 하얀 천장이 보였다. 불을 밝힌 길쭉한 형광등 때문에 눈이 부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눈을 뜨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세 개의 얼굴이 보인다. 어깨에 닿는 단발에 둥그렇고 활기찬 얼굴, 직모의 장발에 머리 한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는 가르마에 웃음띤 얼굴, 태운 듯 짙은 살색에 아기처럼 호기심이 가득 담긴 얼굴.

“정신이 드니?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첫 번째 얼굴이 말했다. 이어서 세 번째 얼굴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아니 올 거야.”

두 번째 얼굴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체링아, 그냥 반말로 하든가, 존댓말을 했으면 그냥 하고 말지 뭘 또 고치니?”

그 말에 세 번째 얼굴, 체링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얼버무린다.
“습관이 되어가지고, 어쩔 수가 없어요. 앞으로 고쳐지겠지요, 지겠지.”

두 번째 얼굴, 조지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억지로 고칠 것까진 없고, 그냥 너 편한 대로 말해. 그나저나……”

지란의 시선이 침대에 누운 마트료나의 멍한 얼굴로 향했다. 참새라도 발견한 포수처럼 흐뭇하고 능글맞은 눈길이었다.

“하여간 우리 여왕님은 참 대단해.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이를 데리고 왔는지. 이건 완전히 미소녀 습득 이벤트잖아. 갑자기 혼자 수풀 속으로 뛰어들더니 애를 들쳐 업고 와서 병원을 찾고 말이야.”

여·왕·님

그 짧은 낱말이 마트료나의 마음속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등에 얼음을 집어넣은 듯 싸늘한 느낌과 함께 몽롱하던 정신이 일순 되돌아왔다. 푸른빛이 도는 흑발, 수려한 얼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휘날리던 자주색 망토, 반짝이던 왕관,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기억 속 깊이에서 솟구쳐 올라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 우……!”

심하게 몸부림을 치고 나서야 마트료나는 겨우 몸을 뗄 수 있었다. 첫키스치고는 너무나 거칠고 진한 경험이었다. 몸의 기운을 모두 흡수당한 듯 어지러워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수풀 위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토해내며 숨을 골랐다.

“아, 미안. 내가 좀 과격하게 했나?”
그는 곤돌라에서 일어나 앉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렇게 말했다.

“그치만 애초에 키스를 하려고 했던 건 너야. 그러니까 네 잘못이 반, 내 잘못이 반. 둘을 합치면 쌤쌤이지? 이걸로 없던 일로 하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마트료나는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상대를 다시 보았다. 자신의 첫키스를, 그 달콤하고 황홀했던 만남의 순간을 없던 일로 하자고?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순 없었다.

“저는 절대로……!”
“너, 신입생이지?”

주먹을 꼭 쥐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서 항변하려 했지만, 상대방의 낮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산들바람으로는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마트료나는 정색을 한 상대방에게서 어떤 위엄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도 사람들이 카리스마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 기세에 눌려서 대답하는 목소리는 한층 더 수그러들었다.

“네…….”
“못보던 얼굴이라서 그래. 너처럼 예쁜 아이라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사복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비스크 돌(Bisque Doll)처럼 작고 귀여운 느낌이라서, 신입생임을 알았지.”

마트료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다. 자신을 보고 예쁘다니.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는 혼혈아라는 이유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왔다. 몇 년 전에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으로 왔지만, 그런 취급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기만 했다. 아이들은 완전히 외국인도 아니면서 자신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치만 너무 대담한데? 처음 보는 상급생한테 대뜸 키스를 하려고 하다니. 난 그래서 네가 능숙한 줄 알았어. 근데 네 입술이 너무 서툰 거야. 혀는 뻣뻣하게 굳어 있고. 후후후.”

하얗게, 파랗게, 그리고 이번엔 빨갛게. 마트료나의 얼굴색은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변하고 있었다.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저 호수 안에 몸을 던져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괜찮아. 고개를 들고 자신을 가져. 넌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니까. 네가 나에게 끌린 것도,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야. 여기는, 우리들의 천국이니까 말야."

소녀가 몸을 일으켜 곤돌라에서 나와 마트료나의 옆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는 교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허리춤부터 발목에 이르는 자줏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가장자리가 금색 레이스로 장식된 화려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빌로도 망토로, 짧은 스커트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검은 양말과 잘 어울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명찰이 있는 자리엔 아무것도 없어 학년과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위에 휘황찬란한 왕관 모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의 손길이 마트료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얼음을 녹이는 봄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굳었던 몸이 풀리며 저절로 얼굴이 그를 향한다. 속마음은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이 떨림과 흥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순수한 마음 하나로, 마트료나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이름이 뭐니?”
“마트료나. 마트료나 미하일로브나 불가코프입니다.”
“어, 의왼데. 난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알았어. 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어머니가 한국 분이세요.”
“그럼 우리말도 어머니에게서 배웠니?”
“네, 한국어는 저에게 모국어나 마찬가지예요. 어머니랑 둘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 때도 집에선 늘 한국말로만 대화했죠.”

가만히 들어보니 억양이 조금 북한말을 연상시키기는 했지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한국 어디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하얀 피부와 눈은 서양인 같고 코와 입은 동양인 같은 느낌이 들어 한국인으로 살아가기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 대신에, 마트료나의 얼굴은 어색하거나 이상하기는커녕 매우 조화롭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도자기를 감상하듯 거듭 얼굴을 살펴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답다고.

두 사람은 마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긴 흑발을 휘날리는 청초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었고, 또 한 사람은 동서양의 느낌이 혼합된 신비롭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던 침묵의 밀회는, 갑작스럽게 끝을 고하고 있었다. 아쉬움의 작은 한숨을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포도주 빛 망토가 살랑거리며 주위에 핀 꽃과 풀들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들은 작별의 손짓을 하듯 온몸을 좌우로 저었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야.”

마트료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 선언이었다. 이제 처음 만났는데. 겨우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이대로 헤어진다니. 앞으로, 이제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야 할 텐데, 헤어지다니. 아무리 잠시라고 해도 지금은 안 된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작은 섬이니까, 같은 학교 안이니까 어디선가 스쳐 지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또 지금처럼 만나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키스를 나눴던 사이잖아요. 이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옆에서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2장 왕관과 나이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사방에는 키보다 높은 수벽(樹壁)이 늘어서 있어 마치 초록색 미궁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불쑥 나타나는 토피어리(Topiary, 상록수를 입방체, 원추형, 동물 형상 등으로 깎은 조형물)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토피어리는 온갖 동물들, 특히 동서양의 용이나 유니콘과 같은 환상세계 속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마치 마법의 힘으로 나무로 변한 것만 같이 보이는 토피어리들 사이를, 혹시나 그들이 깨어날까 싶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지나갔다.

마트료나는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거대한 화원 속을 헤매다니고 있었다. 사방에 희미한 안개가 낀 듯 했고, 주위에는 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어딘가 조잘대며 흐르는 냇물의 노래가 들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환상적인 주위의 풍경까지, 모든 것이 바다 밑 세계처럼 흐릿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일단 납득을 하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한겨울에 이토록 꽃과 나무가 무성한 정원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느 한 가지도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어릴적에 만들어 날리던 비눗방울은 영롱하고 예뻤지만,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눗방울은 입에 넣은 솜사탕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름다운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지 모른다는 것을, 마트료나는 그때부터 배웠던 걸지 몰랐다.

꿈속 세상임을 알았으니 더는 무서워할 필요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저 경치를 즐기며 여유로이 산보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출구가 어디면 어떻고 보이지 않으면 또 어떨까. 꿈에서 깨기만 하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텐데. 방향도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마트료나는 어느새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간지러운 재잘거림에 이끌렸던 걸까. 회양목 울타리를 넘어 체리나무와 호두나무 기둥을 지나 흰독말풀의 커튼을 지나니 그곳에는 조그만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마트료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황홀한 정경에 도취된 채로 있었다. 차라리 시냇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한, 폭이 3미터도 되지 않을 좁은 운하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정원을 화려함으로 장식하고 있었고 그 위로 한 척의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유유히 흘러오고 있었다. 그 옆엔 순수하게 장식용으로 만든 작은 호수와 분수에서 재잘대는 소리가 나고 있었으며, 주위에는 온통 라일락, 수선화, 진달래, 장미, 패랭이꽃, 후리지아, 백합, 루드베키아, 큰앵초, 투구꽃 등 온갖 꽃들이 계절도 잊은 듯 가득히 피어 저마다 화려한 색상과 진한 향기를 뽐냈다.

물살의 속삭임와 향기의 간지럽힘에 빠져들어 그만 못보고 지나칠 뻔 했지만, 마트료나는 곤돌라 안에 사람이 타고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바닥 아래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녹색의 체크 무늬 스커트와 황갈색 블레이저. 영화궁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학생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신입생은 아닐 텐데 몇 학년일까? 마트료나는 타이와 명찰의 색이 학년마다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몇 학년이 어떤 색깔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자신 아직 이 학교에 온지 며칠 되지 않은 입학 예정자였던 것이다.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잠을 자고 있는 듯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는지라, 발끝으로 내딛으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리고 마트료나는 지금껏 본 풍경에 조금도 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목도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약간 푸른 빛이 도는 긴 흑발, 오똑한 코와 예리한 턱선, 조금 크지만 두껍지 않고 매끄러운 분홍빛 입술에 이르기까지 깎아 만든 미인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얼굴이어서, 그야말로 천상의 낙원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이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으로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마치 이곳을 독점하고 있는 듯한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복숭아빛 뺨에 차가운 손등을 대보고 싶었다. 분명 이 사람의 볼은 부드럽고 따뜻하겠지. 숨을 내쉬면 꽃보다 은은한 향기가 나고, 그 목소리는 꽃잎 위에서 떨어지는 이슬처럼 맑겠지. 그리고 저 윤기가 흐르는 입술은…….

마트료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곤돌라로 다가갔다. 이미 세상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저 아름다운 사람, 저 사람의 입술, 입술만이.

수풀과 꽃잎을 스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곤돌라는 어서 오지 않으면 가버린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만으로 마트료나는 무릎을 꿇고 곤돌라의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라는, 과거의 그는 이곳에 없었다. 오직 마음을 빼앗긴 꼭두각시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원하고, 느끼고 싶은 건 하나뿐. 곤돌라를 꼭 쥔 상태에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본다. 긴장과 흥분으로 멈췄던 호흡을 재개하자,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리며 포근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 같은 공기를 마시며,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있었다. 이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신비로운 화원에서 가진 두 사람의 밀회.

마트료나는 잠이 든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소녀는 언제나 독사과를 먹거나, 물레에 찔리거나 해서 잠이 들어야만 했다. 멋진 왕자님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얼른 키스를 해주기만을 기다리며 무력하게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스스로 왕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름다운 공주님을 위해서, 나의 입술을 바치리. 이건 나의 소중한 첫키스. 그대를 위해 기꺼이……

두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천 년의 잠에 빠진 듯 했던 눈동자가 살며시 떠졌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생면부지의 소녀. 눈을 감고 너무나 진지하고 숭고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놀라서 소리를 치르거나 손을 휘둘러 밀치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보다 가만히 살펴보는 쪽을 택했다. 뽀얀 피부와 어깨 아래로 내려온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 감은 눈 위를 덮은 긴 속눈썹, 오똑하진 않지만 작고 귀여운 코와 딸기처럼 촉촉하고 붉은 입술. 너무 귀엽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그 행동에 몸을 맡겨버렸다. 두 사람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가볍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 순간 마트료나는 상대방이 잠에서 깨어 있음을 알았다. 놀라서 얼른 눈을 뜨고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상대의 왼손이 어깨를 붙잡고, 오른팔이 목을 휘감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서툴게 몸을 움직여봤지만 이미 덫에 걸린 토끼처럼 가엾은 몸짓에 불과했다. 상대의 입술과 혀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마트료나를 농락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란의 넉살좋은 성격과 수다 덕분에 왕님도 짧은 시간만에 체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조모와 아버지는 중국이 티벳을 점령했을 때 고국을 떠나 네팔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도로 이주한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여 체링을 낳았다. 체링은 망명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국제 자선단체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후원받게 되었는데 후원자가 바로 한국인이었다. 그 한국인 가족은 영어와 한국어로 된 편지가 담긴 선물을 보내는 등 많은 정성을 쏟아주었고, 체링은 감사의 뜻으로 한국어로 답장을 보내고자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부모가 반대하여 낙담하던 중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영화궁 고등학교의 유학생 모집 공고를 알게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시험을 쳤는데?”
“거의 전과목이었어요. 단지 한국어 시험도 있었고, 영어 말고는 전부 한국어로 출제되었으니까, 한국어 실력이 좋지 않으면 영어나 수학 정도밖에는 풀 수가 없을 거예요.”
“이거 참 대단한 학교인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로 된 시험문제를 내다니. 그래서 거기에 합격해서 여기 오게 된 거야?”
“네. 3년간 수업료에 기숙사비까지 전액 무료라는데 오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학교에서 말하기를, 졸업 후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는 것이 보답하는 방법이라고 했어요. 확실히 이 학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그들이 졸업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학교를 후원하면 저처럼 그 혜택을 받는 후배들이 생기면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 어떨까. 지란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졸업생들의 자발적인 후원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귀족학교가 운영이 될까. 지란 자신은 부모님이 등을 떠밀 듯 하여 억지로 오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은 곳이다.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 인공섬이라는 완전히 폐쇄된 공간, 여자만 모아놓는다는 기이함 등등. 부동산 졸부인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귀족학교에 보내어 정치가와 기업인의 자녀들과 어울리게 해서 이를 통해 인맥을 늘리려는 천박한 의도가 있겠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그런 뻔히 보이는 속셈대로 끌려가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되레 엉뚱해 보이는 여왕님이나 체링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전혀 부유하거나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소녀들. 잘 정돈된 화단 중간에 비쭉 솟아나온 이름 모를 들꽃처럼 어색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닐까.

일행은 남도(南島)에 들어서 경비실을 지나 커다란 강당을 지나고 있었다. 유선형의 세련된 돔형 건축물은 강당이라기보다 체육관처럼 보였다. 농구, 배구 경기가 가능함은 물론 수영장도 따로 있다는 선지의 설명에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부터 여름이 기대가 되었다. 약간 기울어진 돔형 지붕의 한쪽이 유리로 된 것은 수영장이기 때문인 걸까? 주위에 심어 놓은 야자수와 큰억새를 보니 과연 제주도다 싶었다.

이때 소녀들의 설레는 마음을 흐트려 놓은 것은 점점 커지는 진동음이었다. 두두두두, 하고 쉼없이 울리는 이 낮은 소리는 흔히 듣지 못해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소리였다. 헬리콥터다, 하고 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하늘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어디 어디, 하고 모두들 시선을 그쪽으로 모은다. 과연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작고 검은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 이쪽을 향한다.

4인승 정도의 작은 크기에 유선형에 가까운 세련된 몸통. 마치 복어가 배를 살짝 부풀리고 꼬리를 길게 늘인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등과 꼬리에 프로펠러를 달고 스키를 신고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그 헬리콥터는 시콜스키(Sikorsky)의 S-434 모델인데 짙은 남색 몸통에  그려진 로고가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세로로 이등분한 듯한 황색 오망성 마크와 그 아래에 적힌 고딕체 영어 문자 TAIBOOK.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태북그룹의 로고였다. 즉 저 헬리콥터는 태북그룹 소유의 전용기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그룹의 고위급 인사일 거라는 얘기였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점점 커졌다.

한편에서는 마중 준비가 초고속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 네 명의 양복 입은 여성들이 긴 두루마리를 들고 달려왔다. 천막처럼 보였던 비닐을 바닥에 펴니 그 위에는 H라는 거대한 글자가 적혀 있는, 간이 착륙장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천막을 치듯 망치질을 해서 천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한 사람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신호용 깃발을 꺼내어 흔들었다. 헬리콥터는 착륙 신호를 받아들이고 곧바로 H 글자를 향해 다가왔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아이들은 모두 머리와 옷자락을 감싸쥐었다. 왕님과 체링도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몸을 웅크려 바람을 견뎌야만 했다.

약간 앞뒤로 뒤뚱거리는 듯했던 헬리콥터는 이내 가뿐히 착지했고, 문이 열렸다. 네 명의 직원들이 서로 질세라 뛰어왔다. 내린 것은 동년배로 보이는 소녀. 키는 조금 크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롱스커트의 정장차림이 너무나 어울려, 지란은 귀티가 흐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왕님은 체링과 만났을 때 보다 더 큰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를 보는 듯한 느낌. 단순히 예쁘다, 멋있다를 떠나서 부유하다, 고상하다는 건 이런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소녀는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하나 들고 내렸는데, 직원들이 서로 들고 가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흥. 드디어 아가씨께서 납시었군.”
지란의 빈정대는 목소리에 왕님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누군지 알아? 아는 사람이야?”
“척 보면 알지. 전용 헬리콥터를 달랑 혼자서 타고 올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겉에 그려진 로고 보이지? 태북그룹 3세, 그 중에서 우리 나이 또래라면 분명히…… 북도 정이야. 쟤네 언니들도 이 학교를 졸업했으니, 따라서 온 거겠지. 재벌 따님이라고 굽신대는 꼴들 좀 봐.”

확실히 왕님도 뉴스를 통해 주워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다. 태북그룹의 복잡한 가계도와 수많은 후계자 후보들에 대해서. 창업자 회장은 사별한 부인과 후처, 내연녀 등 여러 여성으로부터 낳은 자식들 및 그들이 낳은 3세까지 모두 모아서 거대한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현재 2세들은 개별 기업의 수장 혹은 이사를 맡고 있다. 이제 3세들도 차차 대학을 졸업하여 그룹의 요직으로 속속 발탁되며 후계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

“태북그룹의 3세가 전부 몇 명인 줄 아니? 열 하나야. 그중에서 쟤가 막내인 셈이지. 3세 중에서도 맨 위에 두세 명인가는 벌써 대학 졸업하고 그룹에 들어갔다지? 하긴 쟤들이 취직 걱정을 할 일이 있어 뭐가 있어? 단지 후계자 싸움에서 밀리기 싫으면 좀 힘들겠지만, 나 같으면 그냥 계열사의 사외이사 같은 눈먼 자리 하나 차지하고서 놀고먹으면 장땡이다 싶은데, 쟤들은 또 나름대로 프라이드나 야심이 있을 거 아냐. 이왕 재벌 후계자로 태어났으면 그룹 본사를 휘어잡고 싶다든지, 세계적인 CEO가 되고 싶다든지 등등. 뭐 저마다 고민이야 있겠지만, 우리 같은 애들이 보기엔 한 마디로 부모 잘 만난 애들의 배부른 고민이란 말이지.”

부모를 잘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저토록 귀티라는 것이 넘쳐 흐르는 걸까. 왕님은 아무런 시기도 질투도 그렇다고 선망도 담기지 않은 눈길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다. 마치 조각상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무상한 태도로.

북도 정은 무려 직원 두 명의 안내를 받으며 유유히 걸어갔다. 자기 임무를 마친 헬리콥터는 다시 세찬 바람만 남겨 놓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남은 두 사람의 직원이 천을 치우고 떠났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손선지는 다시 목소리를 높여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차선이 없는, 보행만을 위해 만든 널찍한 보도교를 두 개나 건너서 아직 건설중인 남동도(南東島)를 거쳐 기숙사 건물이 있는 동도(東島)에 도착했다. 기숙사. 앞으로 저곳이 짧은 시간이나마 집이 되고 안식처가 될 공간이었다. 왕님은 다른 건물에 비해 조금 고풍스러운 느낌의 갈색 벽돌 건물을 보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가 왔어. 잘 있었니?’

아니, 처음 보는 상대에게 잘 있었냐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워낙 많은 일을 겪고 놀라운 것을 많이 보아서 상기되고 흥분한 마음이 두서없는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가슴 속의 북소리는 여전했다. 소녀의 작은 가슴이 당장이라도 부풀어 오를 듯한, 늦은 오후의 신비로운 풍광을 표현하는 세찬 고동이었다.


(제1장 끝)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pilza2 2009-07-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콜스키 S-434의 모습은 아래 웹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tln.kr/78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