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의 넉살좋은 성격과 수다 덕분에 왕님도 짧은 시간만에 체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조모와 아버지는 중국이 티벳을 점령했을 때 고국을 떠나 네팔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도로 이주한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여 체링을 낳았다. 체링은 망명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국제 자선단체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후원받게 되었는데 후원자가 바로 한국인이었다. 그 한국인 가족은 영어와 한국어로 된 편지가 담긴 선물을 보내는 등 많은 정성을 쏟아주었고, 체링은 감사의 뜻으로 한국어로 답장을 보내고자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부모가 반대하여 낙담하던 중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영화궁 고등학교의 유학생 모집 공고를 알게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시험을 쳤는데?”
“거의 전과목이었어요. 단지 한국어 시험도 있었고, 영어 말고는 전부 한국어로 출제되었으니까, 한국어 실력이 좋지 않으면 영어나 수학 정도밖에는 풀 수가 없을 거예요.”
“이거 참 대단한 학교인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로 된 시험문제를 내다니. 그래서 거기에 합격해서 여기 오게 된 거야?”
“네. 3년간 수업료에 기숙사비까지 전액 무료라는데 오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학교에서 말하기를, 졸업 후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는 것이 보답하는 방법이라고 했어요. 확실히 이 학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그들이 졸업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학교를 후원하면 저처럼 그 혜택을 받는 후배들이 생기면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 어떨까. 지란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졸업생들의 자발적인 후원만으로 이토록 거대한 귀족학교가 운영이 될까. 지란 자신은 부모님이 등을 떠밀 듯 하여 억지로 오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은 곳이다.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 인공섬이라는 완전히 폐쇄된 공간, 여자만 모아놓는다는 기이함 등등. 부동산 졸부인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귀족학교에 보내어 정치가와 기업인의 자녀들과 어울리게 해서 이를 통해 인맥을 늘리려는 천박한 의도가 있겠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그런 뻔히 보이는 속셈대로 끌려가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되레 엉뚱해 보이는 여왕님이나 체링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전혀 부유하거나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소녀들. 잘 정돈된 화단 중간에 비쭉 솟아나온 이름 모를 들꽃처럼 어색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닐까.
일행은 남도(南島)에 들어서 경비실을 지나 커다란 강당을 지나고 있었다. 유선형의 세련된 돔형 건축물은 강당이라기보다 체육관처럼 보였다. 농구, 배구 경기가 가능함은 물론 수영장도 따로 있다는 선지의 설명에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부터 여름이 기대가 되었다. 약간 기울어진 돔형 지붕의 한쪽이 유리로 된 것은 수영장이기 때문인 걸까? 주위에 심어 놓은 야자수와 큰억새를 보니 과연 제주도다 싶었다.
이때 소녀들의 설레는 마음을 흐트려 놓은 것은 점점 커지는 진동음이었다. 두두두두, 하고 쉼없이 울리는 이 낮은 소리는 흔히 듣지 못해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소리였다. 헬리콥터다, 하고 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하늘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어디 어디, 하고 모두들 시선을 그쪽으로 모은다. 과연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작고 검은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 이쪽을 향한다.
4인승 정도의 작은 크기에 유선형에 가까운 세련된 몸통. 마치 복어가 배를 살짝 부풀리고 꼬리를 길게 늘인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등과 꼬리에 프로펠러를 달고 스키를 신고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그 헬리콥터는 시콜스키(Sikorsky)의 S-434 모델인데 짙은 남색 몸통에 그려진 로고가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세로로 이등분한 듯한 황색 오망성 마크와 그 아래에 적힌 고딕체 영어 문자 TAIBOOK.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태북그룹의 로고였다. 즉 저 헬리콥터는 태북그룹 소유의 전용기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그룹의 고위급 인사일 거라는 얘기였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점점 커졌다.
한편에서는 마중 준비가 초고속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 네 명의 양복 입은 여성들이 긴 두루마리를 들고 달려왔다. 천막처럼 보였던 비닐을 바닥에 펴니 그 위에는 H라는 거대한 글자가 적혀 있는, 간이 착륙장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천막을 치듯 망치질을 해서 천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한 사람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신호용 깃발을 꺼내어 흔들었다. 헬리콥터는 착륙 신호를 받아들이고 곧바로 H 글자를 향해 다가왔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아이들은 모두 머리와 옷자락을 감싸쥐었다. 왕님과 체링도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몸을 웅크려 바람을 견뎌야만 했다.
약간 앞뒤로 뒤뚱거리는 듯했던 헬리콥터는 이내 가뿐히 착지했고, 문이 열렸다. 네 명의 직원들이 서로 질세라 뛰어왔다. 내린 것은 동년배로 보이는 소녀. 키는 조금 크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롱스커트의 정장차림이 너무나 어울려, 지란은 귀티가 흐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왕님은 체링과 만났을 때 보다 더 큰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를 보는 듯한 느낌. 단순히 예쁘다, 멋있다를 떠나서 부유하다, 고상하다는 건 이런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소녀는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하나 들고 내렸는데, 직원들이 서로 들고 가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흥. 드디어 아가씨께서 납시었군.”
지란의 빈정대는 목소리에 왕님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누군지 알아? 아는 사람이야?”
“척 보면 알지. 전용 헬리콥터를 달랑 혼자서 타고 올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겉에 그려진 로고 보이지? 태북그룹 3세, 그 중에서 우리 나이 또래라면 분명히…… 북도 정이야. 쟤네 언니들도 이 학교를 졸업했으니, 따라서 온 거겠지. 재벌 따님이라고 굽신대는 꼴들 좀 봐.”
확실히 왕님도 뉴스를 통해 주워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다. 태북그룹의 복잡한 가계도와 수많은 후계자 후보들에 대해서. 창업자 회장은 사별한 부인과 후처, 내연녀 등 여러 여성으로부터 낳은 자식들 및 그들이 낳은 3세까지 모두 모아서 거대한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현재 2세들은 개별 기업의 수장 혹은 이사를 맡고 있다. 이제 3세들도 차차 대학을 졸업하여 그룹의 요직으로 속속 발탁되며 후계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
“태북그룹의 3세가 전부 몇 명인 줄 아니? 열 하나야. 그중에서 쟤가 막내인 셈이지. 3세 중에서도 맨 위에 두세 명인가는 벌써 대학 졸업하고 그룹에 들어갔다지? 하긴 쟤들이 취직 걱정을 할 일이 있어 뭐가 있어? 단지 후계자 싸움에서 밀리기 싫으면 좀 힘들겠지만, 나 같으면 그냥 계열사의 사외이사 같은 눈먼 자리 하나 차지하고서 놀고먹으면 장땡이다 싶은데, 쟤들은 또 나름대로 프라이드나 야심이 있을 거 아냐. 이왕 재벌 후계자로 태어났으면 그룹 본사를 휘어잡고 싶다든지, 세계적인 CEO가 되고 싶다든지 등등. 뭐 저마다 고민이야 있겠지만, 우리 같은 애들이 보기엔 한 마디로 부모 잘 만난 애들의 배부른 고민이란 말이지.”
부모를 잘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저토록 귀티라는 것이 넘쳐 흐르는 걸까. 왕님은 아무런 시기도 질투도 그렇다고 선망도 담기지 않은 눈길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다. 마치 조각상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무상한 태도로.
북도 정은 무려 직원 두 명의 안내를 받으며 유유히 걸어갔다. 자기 임무를 마친 헬리콥터는 다시 세찬 바람만 남겨 놓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남은 두 사람의 직원이 천을 치우고 떠났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손선지는 다시 목소리를 높여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차선이 없는, 보행만을 위해 만든 널찍한 보도교를 두 개나 건너서 아직 건설중인 남동도(南東島)를 거쳐 기숙사 건물이 있는 동도(東島)에 도착했다. 기숙사. 앞으로 저곳이 짧은 시간이나마 집이 되고 안식처가 될 공간이었다. 왕님은 다른 건물에 비해 조금 고풍스러운 느낌의 갈색 벽돌 건물을 보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가 왔어. 잘 있었니?’
아니, 처음 보는 상대에게 잘 있었냐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워낙 많은 일을 겪고 놀라운 것을 많이 보아서 상기되고 흥분한 마음이 두서없는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가슴 속의 북소리는 여전했다. 소녀의 작은 가슴이 당장이라도 부풀어 오를 듯한, 늦은 오후의 신비로운 풍광을 표현하는 세찬 고동이었다.
(제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