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손만 뻗어도 닿을 것만 같이 생생한데, 아직도 입술에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눈물이 눈에서 뺨을 지나 귀와 턱까지 흘러내렸다. 세 사람의 표정이 근심으로 바뀌었다.

“어딘가 아픈가봐. 하긴 내가 발견했을 때 보니까 온몸이 젖어 있었어. 아마 그 근처를 걷다가 발을 헛디뎌서 시냇물에 빠졌나봐.”

첫 번째 얼굴, 여왕님이라 불린 아이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본명이었지만, 지금 마트료나는 알지 못했다. 여왕님이라는 말에 그 사람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말을 떠올렸지만, 자신의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문은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안녕, 미래의 여왕님’

여왕님이란 게 뭘까? 그 왕관 모양의 배지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때 문이 열리면서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물론 여성-이 들어와서 마트료나의 이마를 짚어보고 입을 벌리게 해 혀를 살펴본 후 겨드랑이에 끼워 놓았던 전자 체온계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흐음.”
“어때요? 좀 나아졌나요?”

왕님이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으쓱하고는 체온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100도네.”
“네엣?!”

세 사람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마트료나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듯이 보이지만, 사람 몸이 100도가 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100도면 물이 끓는 온도인데 자연발화도 아니고 몸의 수분이 다 끓어서 증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의사는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굴려 소녀들의 놀란 얼굴을 훑어보곤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화씨로.”
“네에?”

지란의 맥빠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섭씨와 화씨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화씨 451도는 종이가 불에 타는 온도예요.”

체링이 말했다. 지란은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도가 수학과 IT에서 뛰어나다더니 그런 것도 알고 있나 싶었다. 물론 체링은 동명의 소설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었지만 일부러 그걸 설명하지는 않았다.

“저기 선생님, 화씨 100도면 섭씨로는 몇 도 정도 되죠?"

왕님이 조바심이 나서 묻자 의사는 그제야 옆에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듯 체온계를 조작하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단위를 바꾸는 걸 잊었네. 섭씨로는 37.8도. 정상치보다 1도 정도 높지만 괜찮은 수준이야. 퇴원해도 되겠어.”
“하지만 아직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저렇게 울고 있는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님이 보호자라도 된 듯이 말했으나 마트료나가 그 말을 중간에 자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란이 여전히 팔짱을 낀 구경꾼의 자세로 물었다.

“괜찮겠니?”
“저를 병원에 데리고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마트료나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딱딱한 존댓말이었다. 마치 이곳이 싫고 당신들이 싫어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라는 듯한 태도였다.

“잠깐만 기다려!”

왕님이 불러세웠지만 마트료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 장소에 그대로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다른 그 무엇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곳이 어딘지 마트료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궁에 도착한지 겨우 나흘째. 아직 이 섬의 구조와 위치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친해진 아이도 없어 혼자서 섬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경치도 구경할 겸 지리를 익히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채 귀신에 홀린 듯 찾아간 그 정원과 작은 운하의 위치도, 그곳으로 가는 길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좋아. 입술 사이에서 약한 말이 흘러나왔다. 꾹 참고 있었는데 눈가가 시리며 간지럽다. 자신이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는, 세상 가운데 혼자 버려진 고아에 다름 아니었다. 엄마, 아아 엄마.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는 딸의 손을 꼭 잡으며 유언을 남겼다. 너는 여기서 살아가거라. 어머니의 고향, 대한민국만이 마트료나에게 남은 마지막 안식의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렇게 홀로 버려져, 첫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모두들 자신을 버리고 멀리 떠나버리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잠시 시간의 흐름이 뒤틀린 듯, 서둘러 방을 나가려던 마트료나의 동작이 문고리를 감싸쥐면서 서서히 느려지며 멈추었고, 의사 선생님과 지란은 아예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으며, 체링은 뭐라고 말은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입과 손가락만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왕님만이 유유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거침없이 걸어나가 마트료나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기다려봐.”
마트료나는 흠칫 놀라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상대가 자신보다 체구도 약간 크고 힘도 셌다.

“내가 볼 때는 더 쉬어야 할 것 같아. 37도라니 체온도 높잖니, 응?”
“난 갈 곳이 있어서…….”
“정 그렇다면 나랑 같이 가자, 마트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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