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왕관과 나이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사방에는 키보다 높은 수벽(樹壁)이 늘어서 있어 마치 초록색 미궁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불쑥 나타나는 토피어리(Topiary, 상록수를 입방체, 원추형, 동물 형상 등으로 깎은 조형물)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토피어리는 온갖 동물들, 특히 동서양의 용이나 유니콘과 같은 환상세계 속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마치 마법의 힘으로 나무로 변한 것만 같이 보이는 토피어리들 사이를, 혹시나 그들이 깨어날까 싶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지나갔다.

마트료나는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거대한 화원 속을 헤매다니고 있었다. 사방에 희미한 안개가 낀 듯 했고, 주위에는 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어딘가 조잘대며 흐르는 냇물의 노래가 들렸다.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환상적인 주위의 풍경까지, 모든 것이 바다 밑 세계처럼 흐릿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일단 납득을 하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한겨울에 이토록 꽃과 나무가 무성한 정원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느 한 가지도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어릴적에 만들어 날리던 비눗방울은 영롱하고 예뻤지만,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눗방울은 입에 넣은 솜사탕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름다운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지 모른다는 것을, 마트료나는 그때부터 배웠던 걸지 몰랐다.

꿈속 세상임을 알았으니 더는 무서워할 필요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저 경치를 즐기며 여유로이 산보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출구가 어디면 어떻고 보이지 않으면 또 어떨까. 꿈에서 깨기만 하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텐데. 방향도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마트료나는 어느새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간지러운 재잘거림에 이끌렸던 걸까. 회양목 울타리를 넘어 체리나무와 호두나무 기둥을 지나 흰독말풀의 커튼을 지나니 그곳에는 조그만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마트료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황홀한 정경에 도취된 채로 있었다. 차라리 시냇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한, 폭이 3미터도 되지 않을 좁은 운하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정원을 화려함으로 장식하고 있었고 그 위로 한 척의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유유히 흘러오고 있었다. 그 옆엔 순수하게 장식용으로 만든 작은 호수와 분수에서 재잘대는 소리가 나고 있었으며, 주위에는 온통 라일락, 수선화, 진달래, 장미, 패랭이꽃, 후리지아, 백합, 루드베키아, 큰앵초, 투구꽃 등 온갖 꽃들이 계절도 잊은 듯 가득히 피어 저마다 화려한 색상과 진한 향기를 뽐냈다.

물살의 속삭임와 향기의 간지럽힘에 빠져들어 그만 못보고 지나칠 뻔 했지만, 마트료나는 곤돌라 안에 사람이 타고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바닥 아래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녹색의 체크 무늬 스커트와 황갈색 블레이저. 영화궁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학생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신입생은 아닐 텐데 몇 학년일까? 마트료나는 타이와 명찰의 색이 학년마다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몇 학년이 어떤 색깔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자신 아직 이 학교에 온지 며칠 되지 않은 입학 예정자였던 것이다.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잠을 자고 있는 듯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는지라, 발끝으로 내딛으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리고 마트료나는 지금껏 본 풍경에 조금도 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목도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약간 푸른 빛이 도는 긴 흑발, 오똑한 코와 예리한 턱선, 조금 크지만 두껍지 않고 매끄러운 분홍빛 입술에 이르기까지 깎아 만든 미인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얼굴이어서, 그야말로 천상의 낙원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이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으로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마치 이곳을 독점하고 있는 듯한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복숭아빛 뺨에 차가운 손등을 대보고 싶었다. 분명 이 사람의 볼은 부드럽고 따뜻하겠지. 숨을 내쉬면 꽃보다 은은한 향기가 나고, 그 목소리는 꽃잎 위에서 떨어지는 이슬처럼 맑겠지. 그리고 저 윤기가 흐르는 입술은…….

마트료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곤돌라로 다가갔다. 이미 세상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저 아름다운 사람, 저 사람의 입술, 입술만이.

수풀과 꽃잎을 스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곤돌라는 어서 오지 않으면 가버린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만으로 마트료나는 무릎을 꿇고 곤돌라의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라는, 과거의 그는 이곳에 없었다. 오직 마음을 빼앗긴 꼭두각시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원하고, 느끼고 싶은 건 하나뿐. 곤돌라를 꼭 쥔 상태에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본다. 긴장과 흥분으로 멈췄던 호흡을 재개하자, 상대방의 숨소리가 들리며 포근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 같은 공기를 마시며,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있었다. 이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신비로운 화원에서 가진 두 사람의 밀회.

마트료나는 잠이 든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소녀는 언제나 독사과를 먹거나, 물레에 찔리거나 해서 잠이 들어야만 했다. 멋진 왕자님이 자신을 구해주러 오기를, 얼른 키스를 해주기만을 기다리며 무력하게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스스로 왕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름다운 공주님을 위해서, 나의 입술을 바치리. 이건 나의 소중한 첫키스. 그대를 위해 기꺼이……

두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천 년의 잠에 빠진 듯 했던 눈동자가 살며시 떠졌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생면부지의 소녀. 눈을 감고 너무나 진지하고 숭고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놀라서 소리를 치르거나 손을 휘둘러 밀치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보다 가만히 살펴보는 쪽을 택했다. 뽀얀 피부와 어깨 아래로 내려온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 감은 눈 위를 덮은 긴 속눈썹, 오똑하진 않지만 작고 귀여운 코와 딸기처럼 촉촉하고 붉은 입술. 너무 귀엽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그 행동에 몸을 맡겨버렸다. 두 사람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가볍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 순간 마트료나는 상대방이 잠에서 깨어 있음을 알았다. 놀라서 얼른 눈을 뜨고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상대의 왼손이 어깨를 붙잡고, 오른팔이 목을 휘감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서툴게 몸을 움직여봤지만 이미 덫에 걸린 토끼처럼 가엾은 몸짓에 불과했다. 상대의 입술과 혀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마트료나를 농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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