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
심하게 몸부림을 치고 나서야 마트료나는 겨우 몸을 뗄 수 있었다. 첫키스치고는 너무나 거칠고 진한 경험이었다. 몸의 기운을 모두 흡수당한 듯 어지러워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수풀 위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토해내며 숨을 골랐다.
“아, 미안. 내가 좀 과격하게 했나?”
그는 곤돌라에서 일어나 앉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렇게 말했다.
“그치만 애초에 키스를 하려고 했던 건 너야. 그러니까 네 잘못이 반, 내 잘못이 반. 둘을 합치면 쌤쌤이지? 이걸로 없던 일로 하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마트료나는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상대를 다시 보았다. 자신의 첫키스를, 그 달콤하고 황홀했던 만남의 순간을 없던 일로 하자고?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순 없었다.
“저는 절대로……!”
“너, 신입생이지?”
주먹을 꼭 쥐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서 항변하려 했지만, 상대방의 낮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산들바람으로는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마트료나는 정색을 한 상대방에게서 어떤 위엄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도 사람들이 카리스마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 기세에 눌려서 대답하는 목소리는 한층 더 수그러들었다.
“네…….”
“못보던 얼굴이라서 그래. 너처럼 예쁜 아이라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사복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비스크 돌(Bisque Doll)처럼 작고 귀여운 느낌이라서, 신입생임을 알았지.”
마트료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다. 자신을 보고 예쁘다니.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는 혼혈아라는 이유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왔다. 몇 년 전에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으로 왔지만, 그런 취급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기만 했다. 아이들은 완전히 외국인도 아니면서 자신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치만 너무 대담한데? 처음 보는 상급생한테 대뜸 키스를 하려고 하다니. 난 그래서 네가 능숙한 줄 알았어. 근데 네 입술이 너무 서툰 거야. 혀는 뻣뻣하게 굳어 있고. 후후후.”
하얗게, 파랗게, 그리고 이번엔 빨갛게. 마트료나의 얼굴색은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변하고 있었다.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저 호수 안에 몸을 던져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괜찮아. 고개를 들고 자신을 가져. 넌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니까. 네가 나에게 끌린 것도,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야. 여기는, 우리들의 천국이니까 말야."
소녀가 몸을 일으켜 곤돌라에서 나와 마트료나의 옆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는 교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허리춤부터 발목에 이르는 자줏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가장자리가 금색 레이스로 장식된 화려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빌로도 망토로, 짧은 스커트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검은 양말과 잘 어울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명찰이 있는 자리엔 아무것도 없어 학년과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위에 휘황찬란한 왕관 모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의 손길이 마트료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얼음을 녹이는 봄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굳었던 몸이 풀리며 저절로 얼굴이 그를 향한다. 속마음은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이 떨림과 흥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순수한 마음 하나로, 마트료나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이름이 뭐니?”
“마트료나. 마트료나 미하일로브나 불가코프입니다.”
“어, 의왼데. 난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알았어. 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어머니가 한국 분이세요.”
“그럼 우리말도 어머니에게서 배웠니?”
“네, 한국어는 저에게 모국어나 마찬가지예요. 어머니랑 둘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 때도 집에선 늘 한국말로만 대화했죠.”
가만히 들어보니 억양이 조금 북한말을 연상시키기는 했지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한국 어디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하얀 피부와 눈은 서양인 같고 코와 입은 동양인 같은 느낌이 들어 한국인으로 살아가기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 대신에, 마트료나의 얼굴은 어색하거나 이상하기는커녕 매우 조화롭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도자기를 감상하듯 거듭 얼굴을 살펴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름답다고.
두 사람은 마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긴 흑발을 휘날리는 청초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었고, 또 한 사람은 동서양의 느낌이 혼합된 신비롭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던 침묵의 밀회는, 갑작스럽게 끝을 고하고 있었다. 아쉬움의 작은 한숨을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포도주 빛 망토가 살랑거리며 주위에 핀 꽃과 풀들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들은 작별의 손짓을 하듯 온몸을 좌우로 저었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야.”
마트료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 선언이었다. 이제 처음 만났는데. 겨우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이대로 헤어진다니. 앞으로, 이제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야 할 텐데, 헤어지다니. 아무리 잠시라고 해도 지금은 안 된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작은 섬이니까, 같은 학교 안이니까 어디선가 스쳐 지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또 지금처럼 만나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키스를 나눴던 사이잖아요. 이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옆에서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