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나의 애가 타는 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말없이 곤돌라 위에 올라섰다. 마트료나는 얼른 일어나서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정말, 이대로 가실 건가요?”
“미안해. 우린 어쩌면 만나선 안 되는 사이일지도 몰라. 넌 신입생이니까 이것의 의미를 모르겠지만, 아마 곧 알게 되겠지. 그러면 네가 지금 겪은 일이 한겨울에 꾼 백일몽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될 거야.”

그는 ‘이것’이라고 말할 때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작은 왕관 모양의 배지가 태양의 빛을 모두 빨아들인 듯 옅은 안개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황금으로 만든 것이 분명할 그 배지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지만 매우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좁쌀처럼 작은 색색의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 안 돼요……”

곤돌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헤어져선 안 된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런 강렬한 예감이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학교 안에서 금방 다시 만날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어둠과 백일몽이라는 낱말과, 아직도 공기 중에 떠돌고 있을 그의 한숨이 마트료나의 영혼에 직접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대로 떠나면, 끝이다.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렇게 말해주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마트료나의 떨리는 입술에서 겨우 나온 건 우물거리듯 칭얼거리듯 나오는 조그만 목소리뿐.

“안 돼요…… 안 돼……”
그 목소리마저 울먹임으로 바뀌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마트료나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트료나, 이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 자신을 가지고. 넌 그럴 수 있을만큼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넌 아마도 나를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키스를 하려고 했을 거야. 그치만 난 단언할 수 있어. 너는 곧 나보다 더 아름다워질 거야. 이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찬탄하고, 우러러보고, 숭배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 그때가 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네?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왕관을 기억하고 있어. 이게 네 것이 되면, 이 화원의 주인이 네가 되는 날이 온다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야. 그땐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너의 과거인 셈이지. 너는 나의 미래이고.”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마트료나에게는 그의 말만이 희망이고, 빛이고, 구원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 속에 금빛 실로 수놓아졌다.

“자, 마트료나. 기대하고 있을게. 그럼 안녕, 미래의 여왕님…….”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목 놓아 불러봤지만 곤돌라는 야속하게도 점점 빠르게,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걸으며, 그 다음엔 달리면서 쫓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운하는 커브를 돌리며 수벽으로 가려진 정원 저편으로 사라졌고, 서툰 수영실력을 믿고 운하의 차가운 물에 뛰어들었지만 수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잔디밭만 있을 뿐. 운하는 한쪽 가장자리를 수벽이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삼십 미터도 더 가지 않아 섬의 가장자리에 이르고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곤돌라와 그 위에 탄 소녀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 묻고 싶고, 말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아직 이름도 묻질 못했는데. 그들의 만남은 너무나 짧았지만 첫인상은 너무나 황홀했고 첫키스는 짜릿했다. 하지만 이별은 갑작스럽고 허무하기만 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아니 한 가운데에 그가 들어왔다가 커다란 구멍만 뚫어놓고 사라져버렸다. 이제 이 허전함을, 아쉬움을, 서글픔을 무엇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을까.

마트료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풀 위에 엎어져서 흐느껴 울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여린 육체를 찌르고 할퀴었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짧고 강렬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충격과 슬픔이 더  고통스러워서, 그는 그 자리에서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울고 있었다.


* * * * * * * * * *


“어, 움직였다!”
“진짜?”
“얼른 와봐! 아니지, 먼저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지!”
“이걸 누르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않을까?”
“그래 그거야. 호출기를 눌러.”
“손을 움직이네? 얼굴도 조금씩 움직이는데? 눈도 뜨려고 해! 완전히 깨어났네!”
“잘 됐다.”

시끄러운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졌다. 마트료나는 무엇보다 시끄럽고 짜증이 나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려고 했다. 정말 멋지고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훼방꾼들이 나타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서히 눈을 뜨니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 세로 선이 그어진 하얀 천장이 보였다. 불을 밝힌 길쭉한 형광등 때문에 눈이 부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눈을 뜨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세 개의 얼굴이 보인다. 어깨에 닿는 단발에 둥그렇고 활기찬 얼굴, 직모의 장발에 머리 한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는 가르마에 웃음띤 얼굴, 태운 듯 짙은 살색에 아기처럼 호기심이 가득 담긴 얼굴.

“정신이 드니?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첫 번째 얼굴이 말했다. 이어서 세 번째 얼굴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아니 올 거야.”

두 번째 얼굴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체링아, 그냥 반말로 하든가, 존댓말을 했으면 그냥 하고 말지 뭘 또 고치니?”

그 말에 세 번째 얼굴, 체링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얼버무린다.
“습관이 되어가지고, 어쩔 수가 없어요. 앞으로 고쳐지겠지요, 지겠지.”

두 번째 얼굴, 조지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억지로 고칠 것까진 없고, 그냥 너 편한 대로 말해. 그나저나……”

지란의 시선이 침대에 누운 마트료나의 멍한 얼굴로 향했다. 참새라도 발견한 포수처럼 흐뭇하고 능글맞은 눈길이었다.

“하여간 우리 여왕님은 참 대단해.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이를 데리고 왔는지. 이건 완전히 미소녀 습득 이벤트잖아. 갑자기 혼자 수풀 속으로 뛰어들더니 애를 들쳐 업고 와서 병원을 찾고 말이야.”

여·왕·님

그 짧은 낱말이 마트료나의 마음속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등에 얼음을 집어넣은 듯 싸늘한 느낌과 함께 몽롱하던 정신이 일순 되돌아왔다. 푸른빛이 도는 흑발, 수려한 얼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휘날리던 자주색 망토, 반짝이던 왕관,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기억 속 깊이에서 솟구쳐 올라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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