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따라오지 말라고 그랬죠.”

여양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오는 두 선배들은 능글맞게 웃고만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린 그냥 우리 갈 길 가고 있는 것뿐이니까.”
“맞아. 너희들이 우리 앞을 걷고 있는 거야. 길앞잡이처럼 말이지.”

이 선배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교내에서는 유명한 마당발들. HDV 카메라를 들고 있는 체육복 바지 차림이 방송부 부장 서활인이고 두꺼운 취재수첩을 들고 사진부 협조로 대여한 DSLR 카메라를 목에 건 쪽이 신문부에서 특파한 취재기자 제갈승미다.

“자, 카메라 돌아갑니다. 화면 좋고! 마트료나는 어쩜 이렇게 뒤태도 예쁠까. 다리가 호리호리한 게 바람에 톡! 하고 꺾일 것만 같네요.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인가 봅니다, 하하.”

활인이 어느새 촬영을 하면서 자체 해설을 넣고 있었다. 활어처럼 톡톡 튀는 말투도 여전했다. 하지만 여양은 괜히 심술이 나서 마트료나의 뒤로 바짝 다가가 촬영을 방해했다. 여양의 약간 통통한 체구가 마트료나를 완전히 화면에서 가려버렸다.

“와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우리의 마트료나양이 사라졌습니다. 이건 완전 CG 처리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네요 그래.”
“네, 뚱뚱한 제가 날씬한 마미를 가려서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여양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그리곤 마트료나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마미, 우리 저 사람들 따돌리고 도망칠까?”
“글쎄. 나도 솔직히 귀찮긴 하지만 일부러 그럴 것 까지는……”
“그런데 왜 마미라고 부르는 거니?”

어느새 승미가 바짝 따라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신문부원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한두 마디가 대서특필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본인의 의사와는 동떨어지는 의미로 왜곡되어서. 여양은 헛기침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은 후 답했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별명처럼 부르는 거죠.”
“아, 하긴 마트로나라는 이름은 좀 길고 발음하기도 힘들지.”
“마트료나인데요.”
“앗차, 이거 죄송.”

승미는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마트료나는 발음도 어렵고 해서 짧게 줄여서 부르려고 했으나 마트라고 부르면 그게 곧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본인이 싫어해서 새롭게 지어서 붙이려 했다.
지란과 함께 잠시 고민하다 나온 것이 앞뒤에서 따서 ‘마나’라고 부를까 하다가 전체 이름인 마트료나 미하일로브나 불가코프에서 첫 이름과 중간 이름의 앞자를 따서 ‘마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후에 지란은 애정을 담았다며 ‘마미마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단 본인도 마음에 들었는지 급우나 친해진 사람들에겐 자기를 마미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근데 한글 이름처럼 들려서 좋네, 마미라고 하니까. 마침 내 이름이 승미라서 그런지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럼 나도 앞으로 마미라고 불러도 되지?”
“네…….”

마트료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딱히 싫거나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승미와는 인터뷰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정도 있었던 사이라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교내에서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껄끄러운 상대였기에 흔쾌히 그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둘씩 짝을 지은 이 불편한 사인조 일행은 지금 북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용무도 없이 북도로 진입하는 것은 일단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교칙에 정해져 있다거나 벌칙을 받는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북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2차선 다리의 끝에는 차단막이 세워져 있고 교직원 수첩(학생수첩과 모양과 기능은 거의 같다)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인력을 배치하여 통제하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차단막은 자동차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엎드리거나 림보처럼 몸을 구부리면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CCTV로 촬영되고 있을 것이니 몰래 숨어들어간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섬과 섬 사이를 CCTV에 찍히지 않고 이동을 하려면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는 수밖에 없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 싶었다.

여양은 이미 두 차례나 북도에 와봤던 경험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지란과 체링과 함께 섬에 도착한 날. 아무것도 모르고 저녁식사 시간까지 섬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 당시는 봄방학 기간이고 교직원과 학생들 상당수가 섬에 없던 때라 그런지 차단막이 올라가 있어서 별 생각 없이 북도로 걸어 들어갔었다.
거기서 꽃과 나무가 풍성한 아름다원 화원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 물에 젖은 채로 정신을 잃은 미소녀를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여양의 곁에서 걷고 있는 마트료나였다.

두 번째는 학생회장 빈나련, 부회장 포효범, 마트료나와 함께 넷이서 하교후에 왔다.

“괜찮을까요? 나중에 학교 측에서 멋대로 들어왔다고 뭐라고 하면…….”

여양의 근심 섞인 질문에 나련은 명쾌하게 답했다.

“그럴 때 쓰라고 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거야. 자, 서두르자. 퇴근하는 선생님들 눈에 뜨이면 번거로워져.”

확실히 교직원 기숙사가 북도에 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북도에 있다가는 들키기 십상이었고, 그러니 학생회장의 권위가 필요할 것이다. 어느 선생님 혹은 직원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든가 하는 식으로 둘러대어도 통할 테니까.

동도에서 북도로 바로 가는 다리는 없기 때문에 서도를 우회해야 하는데, 동도와 서도를 잇는 승개교는 저녁 9시가 되면 가운데 부분이 올라가며 길이 차단된다. 만약 특별활동 등으로 9시 이후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경우엔 서도→남도→남동도→동도까지 빙 둘러서 가야만 했다.
더구나 이쪽으로 오는 다리의 끝, 즉 동도의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어서 경비 직원들에게 늦게 온 사유를 말해야 하고 교사의 허락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늦게 돌아다니다 발각될 경우 벌점을 받는 등 불이익을 당하게 되니 조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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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술 더 떠서 못 말리는 불량학생 조지란은 아예 빈손이었다. 필수품인 학생수첩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이니 코트 주머니에 넣으면 그만이라 누가 봐도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모습 같지는 않았다.
학생수첩은 화폐, 출석부는 물론이고 방의 열쇠까지 겸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잠을 잘 때 외에는 거의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분실하면 일단 무조건 처벌을 받아야 하고(아마도 취급 부주의라는 죄목일 것이다), 만약에 남의 것을 훔치다가 붙잡히면 최소 징역 한 달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고 할 정도.
소문에 따르면 GPS가 내장되어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학교 측에서 원하면 언제든 감시할 수 있다는 뜻도 되어 기쁘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여양은 든 게 없어 헐렁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슬쩍 걸치고, 지란은 아무것도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일단 1층 로비 자판기 앞으로 가서 지란은 커피, 여양은 보리차를 뽑아 들고 후후 불면서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 로비와 입구는 친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아침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종의 사교장이었다. 소녀들의 입술은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화제 거리가 샘솟곤 했다. 최근의 주된 소재는 신입생은 특별활동, 2·3학년은 여왕 후보. 여왕 선발은 4월 한 달 동안 진행되어 5월 1일에 즉위식이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 후 여왕이 학생회 회장과 부회장을 지명하여 각급 반장을 포함한 학생회의 찬반 회의를 거쳐 선출이 된다. 따라서 대부분 여왕 후보들의 윤곽은 3월 안에 드러나게 되고 4월부터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사람은 바로 현 학생회장(학생회장의 임기는 신임이 선출될 때까지이므로 아직 현역이다) 빈나련. 부회장인 정효범이 러닝메이트로 뛰면서 강력하게 밀어주고 있음은 물론, 뛰어난 지도력으로 재학생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학생회장이 여왕의 직위를 이어받는 것이 회수적으로도 가장 많을 뿐더러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 때문에 학생회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당파(王黨派)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에 맞서는 라이벌은 총무부장인 메이브 I. 던세이니. 치어리딩부의 부장을 역임하며 아름다운 외모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인기가 높다. 그 자신이 만든 LXG(the League of eXtraordinary Girls)라는 그룹이 일종의 참모 역할을 하며 중핵을 이루고 있다. LXG는 그 자신이 직접 뽑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표방하고 있으며, 학업 혹은 외모가 출중한 유학생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듯 인기가 높은 3학년생 둘에 맞서서 분투하는 1학년생이 있으니 바로 태북그룹 3세 북도정. 이 학교를 거쳐간 자신의 언니들이 모두 여왕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과거가 있기에 막내인 자신이 반드시 여왕이 되어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학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2·3학년들의 반응은 미미하지만 1학년들의 인기는 상당히 높아 친위대라 불리는 지지세력을 구성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아직 아무런 활동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유난히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거론하자면 여왕님을 들 수밖에 없다. 본인이 신문부와의 인터뷰를 통해 여왕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나온 학교신문의 지지도 조사에서 후보로 등재되어 있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대화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1학년생이라는 ‘설정’은 세상과 격리되어 따분한 삶을 살고 있는 이곳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신선한 자극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빈나련과 메이브의 2파전으로 굳어지는 형세를 전임 학생회가 차기까지 점령하려는 권력투쟁으로 보고 식상함을 느낀 이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학생회 학예부장인 진영아가 학교신문의 기고문을 통해 나련과 메이브 양쪽 모두를 비판하며 여왕님이 후보로 나올 경우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고, 이 글이 화제를 모은 덕분에 본인의 고사로 잠깐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 했던 여왕님이 다시 유력한 후보로 학생들의 입에 오르게 된 것이다.

3월 중순의 지지도 순위를 보면(하교하는 학생 약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 오차범위 ±2%) 빈나련 37.3%, 메이브 21%, 여왕님 13%, 북도정 7.4%, 기타 및 무응답 21.3% 라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재학생의 수가 천 명이 못 되는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실제와 근접한 수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여왕 선거는 일반적인 선거와는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지지도가 곧 당선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여왕 선거는 두 번 치뤄지며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선투표, 소수의 선발자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치루는 결선투표(일명 콘클라베)로 이루어진다. 예선에서 득표수가 높은 후보 둘을 추린 후 결선에서 한 후보에게 만장일치로 표가 모일 때까지 계속 재투표를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따라서 학생들의 지지도가 높아서 예선에서 최다득표를 한다고 해도 결선에서 밀려서 떨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독특한 선발 방식은 개교와 동시에 이사회에서 제정하여 교칙으로 규정했다고 하며, 이는 국왕은 대통령 같은 선출직이 아니라 천명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이사회의 의지에 따른 결과라고 전해진다. 물론 학생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순수하게 자기들 손으로 뽑고 싶다며 불만을 가지기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런 특이한 선출방식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의외의 결과가 불러올 흥미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기도 한데, 이는 모두 TV와 연예인 등 보통의 학생들이 가진 화제 거리에서 어느 정도 차단된 영화궁 고등학교만의 문화에서 비롯된 분위기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이프 사건이라 불리는 일련에 소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비상했다. 특히 졸업식 직전에 행방불명되었던 전임 여왕을 만났다고 주장한 신입생에 대해서도 신문부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등 화제를 모았는데, 마트료나 본인은 인터뷰를 거절하고 누가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등 일체의 접촉을 거부해왔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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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낯선 별 아래


아침 일곱 시 반,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이 절로 떠졌다. 처음엔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만 같이 막막한 마음이었는데, 육체는 생각보다 빨리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였던 것은 처음 며칠의 일이었고, 학기가 시작되어 슬슬 교실과 수업, 급우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3월 중순에 이르자 꿈도 잘 안 꿀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가 알람이 울릴 무렵이면 자동으로 잠을 깰 정도로 몸이 익숙해져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하얗고 얇은 커튼 사이를 뚫고 나와 방 구석구석으로 뻗어 있었다. 살짝만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거친 바닷바람이 힘차게 커튼을 흔들며 손짓을 했다. 얼른 일어나 이쪽으로 오렴. 그 소리 없는 아우성에 이끌리듯 지란이 이불 속에서 애벌레처럼 슬슬 기어나오더니 반쯤 구르듯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으로 기어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차고 신선하며 조금은 짭짤한 바다의 냄새를 폐 안 가득히 넣으며, 연푸른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수평선을 구경했다. 마치 바다와 하나가 되는 듯한 신선하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뜨거운 몸이 찬바람을 들이마시니 잠기운이 달아나면서 몸 깊숙이에서부터 시원하고 짜릿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 좋았다.

방을 잘 고른 덕분에 여양과 지란의 방 창문에서는 수평선이 바로 보였다. 바로 아래에는 인공섬을 호위하듯 두른 방파제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동쪽엔 제주도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 절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을 것만 같다.
둘은 창문에 머리를 맞대고 가끔 날아가는 새나, 수면을 튀기는 물고기의 모습이며, 특이한 모양의 구름을 발견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영화궁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둘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흥분을 다 씻어내지 못한 듯 했다. 다만 평일 아침에는 오랫동안 이러고 있지 못함을 알 정도는 적응이 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씻을지를 가위바위보로 정하곤 했는데, 방은 둘이 쓰지만 화장실의 변기와 세면대는 당연한 듯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지란이 큰일을 본다며 세면대를 양보하고 변기에 앉았다. 둘의 사이는 겨우 샤워 커튼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을 뿐이라, 여양은 냄새가 지독하다며 불평을 했다. 하지만 이미 서로의 추한 모습을 많이 본 두 사람의 사이는 가족처럼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었기에 그저 가벼운 장난처럼 투덜거리는 정도였다.
둘이는 한 번의 다툼도 없이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정답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문득 다른 룸메이트들도 모두 자기들처럼 사이가 좋을까 궁금하기도 할 정도였다.

“너, 오늘 그 사람들 만난다고 했지?”

지란이 창가에 서서 머리를 말리며 물었다. 헤어드라이어가 없으니까 엄청 불편해, 아우 추워, 하고 연신 툴툴거리는 와중에 건넨 말이라 여양은 처음에 못 알아들어서 재차 물어봐야 했다. 침대에 앉아서 팬티스타킹을 입으며 대답했다.

“누구? 아, 길금윤?”

그만 여양 자신도 잊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한 달간 반성실에 갇혀 있던 길금윤이 나오는 날이다. 학생들끼리의 표현대로라면 징역 한 달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이라고 할까.

“근데 그게 뭐?”
“나도 가면 안 될까?”
“넌 아무 상관이 없잖아.”

여양의 무심한 말에 지란이 쪼르르 달려와 어깨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내가 왜! 왜 상관이 없어! 너랑 마미마미에 대한 일인데! 그러지 말고 응?”

갑자기 덤벼들자 둘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야, 놔! 블라우스 다 구겨지겠어! 네가 길금윤을 만나서 어쩌려는 거야?”
“아니, 그냥 난 호기심 때문이랄까.”
“그래서 너 신문부에 들어간다는 거야?”

선배들이 지나치게 친절한 표정을 짓고 쉬는 시간의 교실이나 하교길에 달라붙는 신입생의 학기 초. 이런저런 특별활동 클럽에 들어오라는 유혹들이 쏟아지는 3월. 지란은 처음에 수영부에 관심을 가졌다. 천장과 벽이 유리로 되어 있고 야자수가 주위를 둘러싼 호화로운 수영장의 모습에 반했던 것이다.

“아니, 사진부.”
“또 바뀌었냐?”

지란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며 여양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얘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냐. 정작 본인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는 태도였지만.
여양의 경우는 예술반에 연기 전공이라 당연한 듯이 연극부에 들어오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아직 고민하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신문부에선 사진기나 카메라를 별로 안 쓰더라고. 사진은 사진부에서, 카메라는 방송부에서 주로 쓰더라니까. 취재할 때도 부원끼리 협조해서 같이 다닌다든가 한다네. 사진부는 부원들에게 카메라를 하나씩 준다는 거 아니겠니? 그것도 DSLR로!”

지란은 양손을 들어 사진을 찍는 포즈를 취하며 여양의 몸 곳곳을 둘러보며 오른손 검지를 들썩이며 가공의 셔터를 눌러대었다. 아직 치마를 입지 않은 여양은 사진 찍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다는 듯 손을 휘둘러 지란의 시야를 어지럽히고는 침대에서 도망치듯 일어났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너무해! 그렇게 마미마미랑 단 둘이 있고 싶다는 거야?”

지란은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비극적인 포즈를 취했다. 저러다 연극부에 들어간다고 설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장된 동작이었다. 여양은 애써 무시하며 치마를 입고, 타이를 매고 등교할 준비를 마쳤다.
가방은 역시 학교에서 지급한, 매우 작고 가벼운 것이다. 교과서와 공책, 문제집 등은 전부 개인 캐비닛에 보관하고, 숙제나 예복습을 위해 몇 권만 방으로 들고 왔기 때문에 짐이 매우 가벼웠다. 이 홀가분한 해방감은 기숙사 생활의 최대 장점이었다. 자기 또래들은 지금쯤 등산이라도 하듯 무거운 책가방에 도시락에, 학교에 따라서는 체육복이나 신발주머니까지 싸들고 낑낑대며 학교에 가겠지.
더구나 무슨 학교들은 그렇게 산 위에 있는 것인지. 매일 등산을 하는 덕분에 다리는 쓸데없이 튼튼해지며 먹는 게 하체로 급강하하는지 자꾸만 굵어져 간다.
여고는 살아 움직이는 무,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장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오늘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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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09-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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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뭘 넋 놓고 있어? 목욕이나 하러 가자. 빨리 속옷 챙겨.”

지란이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여양은 그 작은 충격을 계기로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속옷이며 칫솔을 작은 비닐 가방에 넣었다. 전부 학교측에서 지급한 물건이다. 이런 걸 다 공짜로 쓰다니 장학생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지란은 그의 팔짱을 끼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여양아,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빈나련 때문이지?”

여양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허튼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하며 살아왔는데.

“저런 사람이랑 여왕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하지만 걱정 마. 난 끝까지 네 편 들어줄 테니.”
“글쎄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제발 너만은 내 말 믿어줘.”

“알아, 알아. 네가 카메라에 대놓고 본인을 여왕님이라고 말했을 때 너나 나나 이 학교에 여왕님이란 자리가 있는지는 알지도 못했지. 근데 난 이게 뭔가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막 드는 거 있지? 네가 그 이름을 갖고 이 학교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말야.”
“시끄러. 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목욕이나 가자. 바람이 차.”
“그래, 그래.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다 지랄이지.”

둘이는 서로 팔짱을 끼고 이인삼각을 하듯 몸을 밀착시킨 채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은 기숙사와 가까운 건물 지하에 있는데, 1층엔 식당과 매점, 2층엔 미용실과 세탁소, 옷을 수선하는 재봉틀과 같은 도구가 놓여 있는 셀프 수선 코너가 있다. 미용실과 달리 목욕탕은 무료이지만, 어째서인지 수첩을 입구에 있는 단말기에 찍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지란은 목욕을 지나치게 많이 하거나 안 하는 학생을 골라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서 여양의 얼굴을 겁에 질리게 만들어놓고선, 자기도 그냥 주워들은 풍문이라며 웃어 넘겼다.

내부로 들어가니 여고생들만이 모여 있는 목욕탕은 대중탕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학여행을 온 것 같다고 할까, 재잘대는 하이톤의 목소리와 매끄러운 나신들이 하얀 수증기 속에서 끓어 넘치는 냄비처럼 들썩거렸다.

처음에 여양은 지란처럼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예쁜 몸뚱이들을 감상하며 시시덕거렸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이내 주눅 든 것처럼 말없이 탕 안에 들어가 몸을 감추듯 깊숙이 담그고 있었다. 젊고 날씬한 몸에서 나오는 신선한 기운에 눌려서 위축되는 것만 같은 느낌. 동년배를 보며 젊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10대 소녀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연령과 성별에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양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지만 못생겼거나 뚱뚱한 쪽도 아니라고 여겨왔다. 굳이 말하자면 무난한 평균, 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이 일종의 자기위안일 수도 있으나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니, 특히 학교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예술반 교실에서는 자신이 학들 사이에 길을 잃고 머무른 닭처럼 여겨짐을 떨칠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여학생들은 왜 이렇게 쭉쭉빵빵한 것일까. 여자가 많다는 제주도의 바람이 어떤 힘을 작용한 걸까.
한쪽 볼을 부풀리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저 질시와 선망의 비뚤어진 토로일 뿐. 괜히 뜨거운 탕 속에서 현기증이 날 때까지 버팀으로써 자신의 몸에게 심술을 부려본다.


그런 학 중에서도 이쪽은 외국에서 온 칠면조라고 해야 할까. 유쾌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한 무리의 백인 여학생들은, 여대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뽐내고 있었다. 서양인의 성숙이 동양인에 비해 빠르며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역시 가까이에서 보니 무색무취의 파장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감히 접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들이 자꾸 이쪽을 흘깃 거리며 웃는 것처럼 보여서 부끄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물론 그건 얼굴만 크고 허리도 굵고 허벅지도 두꺼운 한 여고생의 자격지심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이유로 여양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그 이유로.

“저 애야? 그 소문이 자자한 신입생이.”

한 소녀가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영어였기에 조금도 거침이 없었고 약간의 비속어도 섞여 있었다. 2학년과 3학년이 섞여 있지만 영어 대화이니만큼 존댓말은 따로 없었다.

“아하, 여왕이 되겠다고 선언한 신입생 말이지?”

몸에 비누칠을 하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답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그만 백인 소녀가 짓궂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생각보다 생긴 것도 별로고,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한국 빈대떡 같아. 철판에 눌러놓은 것처럼 납작하잖아, 하하하.”
“얼굴 말이야? 아니면 가슴?”
“물론 둘 다지.”

처음 말을 꺼냈던 금발 소녀 카밀리아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깔보는 시선을 되돌려 보내며 핀잔을 주었다.

“초등학생 몸매인 네가 말하니까 왠지 웃기는데.”

키도 작고 가슴도 작은 돌로리스로서는 기분이 나빠지는 언급이 아닐 수 없었다. 백인은 덩치도 크고 발육도 빠르다면서?…… 같은 소리를 한국인들한테서 들었지만 전부 놀리는 소리로밖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연 돌로리스는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닥쳐, 카밀리아! 내 인기를 몰라서 그래? 일본에서 내 인기는 최고였어.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Jap(일본놈)들은 너 같은 애를 좋아하지. 눈이 크고 아기 같은 얼굴에, 허리는 가늘고 팔다리는 길쭉하고……”
“쉿! 저쪽에 있는 애들 일본애들인 모양이야.”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3학년생 메이브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눈짓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얼핏 보기엔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동양인 소녀들 속에 바짝 붙어 있어 사이좋아 보이는 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의 몸에 비누칠을 해주며 장난을 치던 둘은 인상이 굳어지며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상태다. 일본인을 비하할 때 부르는 Jap이라는 낱말이 그들 귀에 들린 모양이었다.

“흥! 들으라지. 쫄 거 없어. 둘 다 신입생이야. 전에 있던 그 년은 졸업했잖아.”

돌로리스는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영어로 거침없이 떠들었다. 카밀리아는 조금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금년도 유학생 입학시험 최고득점자가 일본인이라고 들었어.”
“쳇. 그게 무슨 상관이람. 한 명은 완전 꼬맹이인데, 다른 하나는 제법 체격이 다부지고, 가슴도 제법 탱탱한 걸. 꼬맹이가 공부를 잘해 보이는군. 쟤가 최고 득점자일까?”
“글쎄 네가 남 보고 꼬맹이니 뭐니 하는 건 완전 개그라니까. 셰임 온 유(Shame on you).”

두 사람이 다시 자기들끼리의 만담에 몰입하자 메이브가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조용히 해봐. 그보다 말야, 인질로 잡혔던 그 백인 아이, 걔도 신입생이라고 들었어. 러시아에서 왔다는데.”
“와우, 한국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러시아 미녀인가?”

돌로리스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카밀리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눈썹과 입끝을 늘어뜨린 표정을 지었다. 메이브가 반쯤 비꼬는 말투로 칭찬을 했다.

“넌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듣고 아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봐서 알겠지만 그 정도 외모라면 우리 클럽에 넣어줄 만 하지 않을까?”
“흠, 좋아. 난 찬성.”

카밀리아는 한 손을 들며 찬성 표시를 했으나 돌로리스는 손바닥을 펴서 흔들어 보였다.

“잠깐만, 난 반대야. 내가 듣기로 그 애는 혼혈이래. 부모 중 하나가 한국인이라던데.”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나도 아버지 쪽으로 올라가면 내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야. 2차대전 때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미국인인 할머니와 결혼했지. 따지고 보면 미국에 있는 백인들은 다 영국에서 온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같은 백인이잖아. 그 애는 백인과 황인의 혼혈이라고.”

돌로리스의 말을 듣고 메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고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쯧쯧쯧.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직 애들인 거야. 그 아이에게서 느꼈던 신비로움이 바로 그 때문이란 말야. 너희들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혼혈인은 아름답고 강인하지. 왜냐하면 우성이거든. 순수한 혈통 어쩌고 하지만, 혈통을 지킨답시고 남매끼리 결혼했던 이집트 왕족들은 오래 못가고 멸망했지. 어느 문화권에서든 근친혼을 금지하는 건 도덕적 이유도 있지만 태어난 아이가 열성인자를 물려받아 허약하고 능력도 떨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생물학적 이유에서도 비롯되었거든.”
“아우, 난 선배의 장광설은 못 당해주겠어. 똑똑한 거 인정해줄 테니 이제 때 좀 밀게 해주시지?”

돌로리스가 투덜거리며 이태리 타올을 꺼내들었다. 카밀리아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타올을 빼앗듯 낚아채어 손에 쥐고는 덤벼들었다.

“오케이, 내가 한국식으로 너의 등짝 껍질이 벗겨지도록 등을 밀어주지. (한국어로)때밀어~!”
“아, 아야! 아파! 난 한국의 때밀기와 이열치열은 절대 이해 못하겠어! 야만적인 문화야!”
“우리 아버지는 모든 나라의 풍습은 긴 역사와 경험에서 취사선택된 문화적 산물이니 배우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쳐줬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이브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과연 주한대사의 따님. 외교관 지망생의 말씀다운데.”

세 백인 학생들이 한국식 때밀기 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동안 두 일본인 학생은 서둘러 몸을 씻고 탕을 나갔다. 그들과 잠시라도 함께 있기 싫다는 듯한 티를 역력히 내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한국인 학생은 몸이 벌겋게 되도록 탕에서 몸을 지지고 난 후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이빨을 닦고 탕을 나왔다.

탕을 나서니 목욕을 하고 난 후라 차가운 밤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잠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여양은 뽀송뽀송한 이불의 감촉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오늘 하루도 속이 상하고 안타깝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지만 뜨거운 탕 안에 때와 함께 녹여내고 나온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방에 돌아와 지급받은 파자마를 입고 침대 위로 몸을 던져본다. 너 벌써 자냐? 지란이 물었지만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어차피 방 안엔 TV도 라디오도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학기 초부터 공부를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빌려야 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일단 꿈나라에나 놀라갈까, 라는 생각과 함께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


여양 자신을 비롯하여 그들 모두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로써 극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무대에 오른 셈이었다. 이제 화려한 막이 오르고, 만개한 화원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극이 펼쳐질 시간만 남은 셈이었다.



(제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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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을 어디에 쓰려는 거지?”

효범이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마트료나에게 물었다.

“무슬림들의 저녁 기도 시간이에요.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하는데, 방향을 알아야 하거든요. 대략 서경 260도 정도래요.”

그들이 생쥐처럼 속삭이는 동안 나즐리는 자신의 침대 옆에 선후 경건하게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이미 자신의 방 안에서는 메카의 방향을 파악한 상태라 나침반이 필요 없겠지만, 무슬림들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 있어도 방향을 알 수 있도록 나침반을 늘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몇 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섯 사람은 행여 방해가 될까 싶어서 얌전히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즐리는 기도를 마친 후 일행의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즐리, 입니다. 마트료나의 친구?”

모르는 얼굴이 둘 있었다. 더구나, 타이의 색깔을 보니 선배였다. 밝은 얼굴로 호기심을 보이기에 차마 무시할 수 없어서 그들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지만 상대가 한국어에 서툴기도 하고 굳이 퍼트릴 생각도 없기에 찾아온 용건은 생략했다. 효범은 다만 히잡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내가 TV에서 본 이슬람 여성들은 모두 검고 칙칙한 걸 쓰고 있던데. 거의 온몸을 덮고 말야. 하지만 이건 꽤 예쁜데? 여름이면 몰라도 지금 같은 계절엔 괜찮겠어.”

확실히 나즐리는 연분홍빛의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머리와 목만 감싸는 짧은 형태였다.

“여러 색깔을 갖고 있대요. 우리 1학년의 타이 색이 노란색이니까 거기에 맞췄다나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이런 밝은 색의 히잡을 쓴대요. 일종의 패션인 셈이죠.”

마트료나가 대신 대답을 해주자 나즐리가 싱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잠시 마트료나의 해설로 이슬람 유학생의 생활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율법에 정해진 대로 도살한 짐승의 고기가 아니면 먹을 수가 없어서 현재는 채식을 하고 있다든지, 이곳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엔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남들처럼 화장실 물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졌다든지 하는 에피소드들이었는데, 유학생의 이문화 체험담도 물론 소중하고 재미있는 일이긴 했으나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급한 목적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니까. 그래서 나련은 시계를 보고는 자신이 목적도 잊은 채로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시간을 많이 빼앗았지? 이만 일어날게.”

그러자 유능한 비서처럼 효범이 더 빨리 일어나 문 앞으로 이동했다. 나련은 시선을 마트료나에게로 고정한 채로 효범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되겠지?”

효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벌써 7시가 넘었으니까. 교직원들이 퇴근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확실히 교직원 기숙사가 북도에 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북도에 있다가는 괜히 한 소리 듣기 십상이었다. 아마도 학생회장의 권위와 그럴싸한 핑계를 동원한다면 임기응변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련과 효범만이라면 몰라도 신입생 두 명까지 데리고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는 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다.

나련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여왕님, 너에게 부탁을 해야겠어. 비록 오늘은 너무 늦었지만, 내일이라도 그 화원에 가보고 싶어. 안내해줄 수 있어?”
“저야 뭐, 아직 할 게 없는 신입생이니까요. 언제든지 상관 없어요.”
“나도 꼭 데리고 가야 해.”

마트료나가 강조하듯 서둘러 덧붙였고, 여양은 긍정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효범이 문을 열자, 나련이 천천히 그러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고, 효범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와작거리며 과자를 씹으며 지란이 말문을 열었다.

“완전히 회장님과 비서네. 저 사람들 둘.”

마트료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긴장해서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소문난 학생회장님 다웠어. 사람이 빈틈이 없어 보이고, 단단한 갑옷을 껴입은 것 같아.”

그가 간 후에야 이렇듯 마음 편하게 느낌을 털어놓을 수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란이 사온 과자를 먹고, 나즐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든 신경의 절반 정도는 나련을 향해 촉각처럼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할까.

“이제 너도 빈나련 팬클럽 다 된 모양이다?”

여양은 가볍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직도 감자칩 봉지를 기울여 남은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고 있는 지란의 무거운 엉덩이를 발끝으로 가볍게 치면서 가자 룸메이트,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룸메이트 사이인 것이다.
기숙사의 배치는 반드시 학년에 따라 나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한 번 배정받은 방을 삼 년 동안 계속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인데, 학교 측에서는 문화적인 차이로 오는 문제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는지 동향의 유학생들끼리 같은 방을 쓰도록 권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 전국에서 온 신입생들은 비어 있는 방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을 고를 수는 있다지만 2인 1실이기 때문에 혼자만 쓰고 싶다든지 하는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같은 날 온 신입생들끼리 룸메이트를 정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기에 여양은 당연한 듯 지란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특성화된 사립고라서 일반적인 고등학교가 2학년 때부터 나누는 것과 달리 1학년 때부터 이미 문과와 이과를 정하여 반편성을 하고 있는 체제였고 여양은 예술과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반이 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고, 그래서 방이라도 같이 쓰자며 의기투합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며 가볍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와 자기들의 방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는 내내 여양은 말도 없이 약간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긴 했지만 나련에게 혼을 빼앗긴 듯한 마트료나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이렇게 마트료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빈나련은 마트료나가 반하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기는 하다. 예쁘고 멋있으며 약간 도도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니까. 신입생들은 벌써 그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꺅꺅거린다. 그가 훤칠한 보디가드-효범-을 대동하고 등교를 하면 창가에 나와서 구경하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인기는 학년 전체에 고루 퍼져 있고 적어도 드러내놓고 반감과 미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여왕’이라는 낱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여왕, 여왕이라.
여양은 자기 이름의 일부가 아닌, 원래 의미 그대로의 그 낱말을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이 학교에 여왕이라는 독특한 직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입학실 날에야 알았다. 그때는 이미 전교생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난 후였고, 선배들이 1학년 반을 기웃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특히 점심시간과 하교 때, 멍하니 있다 보면 누군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재빨리 딴청을 부리는 모습들이 뻔히 보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가리키며 마음대로 떠들고 있었던 주제에. 그들은 때로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쟤가 여왕 자리를 노리는 건방진 신입생이라며?’ ‘말도 마. 전교에 대고 선언을 했다니까. 빈나련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고 뭐겠어.’ 여양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거든요! 여왕 자리엔 관심이 없거든요! 빈나련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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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갑자기 광고를 보내드립니다.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단편집『커피잔을 들고 재채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유명 작가, 기라성 같은 분들 사이에 염치없이 저도 한 자리 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인터넷 등에 공개한 적이 없는 완전 신작입니다. 이제 저는 인터넷 작가니 하고 자칭할 수가 없게 되었군요.;;
배본은 다음주부터 시작된다기에 아직 저도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황금가지의 단편집은 디자인과 편집이 우수하기 때문에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이영도 씨의 단편이 실리기 때문에 많이 팔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주 쯤에 그동안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을 위해 책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 계획이오니 기대해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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