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뭘 넋 놓고 있어? 목욕이나 하러 가자. 빨리 속옷 챙겨.”

지란이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여양은 그 작은 충격을 계기로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속옷이며 칫솔을 작은 비닐 가방에 넣었다. 전부 학교측에서 지급한 물건이다. 이런 걸 다 공짜로 쓰다니 장학생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지란은 그의 팔짱을 끼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여양아,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빈나련 때문이지?”

여양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허튼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하며 살아왔는데.

“저런 사람이랑 여왕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하지만 걱정 마. 난 끝까지 네 편 들어줄 테니.”
“글쎄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제발 너만은 내 말 믿어줘.”

“알아, 알아. 네가 카메라에 대놓고 본인을 여왕님이라고 말했을 때 너나 나나 이 학교에 여왕님이란 자리가 있는지는 알지도 못했지. 근데 난 이게 뭔가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막 드는 거 있지? 네가 그 이름을 갖고 이 학교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말야.”
“시끄러. 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목욕이나 가자. 바람이 차.”
“그래, 그래.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다 지랄이지.”

둘이는 서로 팔짱을 끼고 이인삼각을 하듯 몸을 밀착시킨 채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은 기숙사와 가까운 건물 지하에 있는데, 1층엔 식당과 매점, 2층엔 미용실과 세탁소, 옷을 수선하는 재봉틀과 같은 도구가 놓여 있는 셀프 수선 코너가 있다. 미용실과 달리 목욕탕은 무료이지만, 어째서인지 수첩을 입구에 있는 단말기에 찍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지란은 목욕을 지나치게 많이 하거나 안 하는 학생을 골라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서 여양의 얼굴을 겁에 질리게 만들어놓고선, 자기도 그냥 주워들은 풍문이라며 웃어 넘겼다.

내부로 들어가니 여고생들만이 모여 있는 목욕탕은 대중탕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학여행을 온 것 같다고 할까, 재잘대는 하이톤의 목소리와 매끄러운 나신들이 하얀 수증기 속에서 끓어 넘치는 냄비처럼 들썩거렸다.

처음에 여양은 지란처럼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예쁜 몸뚱이들을 감상하며 시시덕거렸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이내 주눅 든 것처럼 말없이 탕 안에 들어가 몸을 감추듯 깊숙이 담그고 있었다. 젊고 날씬한 몸에서 나오는 신선한 기운에 눌려서 위축되는 것만 같은 느낌. 동년배를 보며 젊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10대 소녀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연령과 성별에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양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지만 못생겼거나 뚱뚱한 쪽도 아니라고 여겨왔다. 굳이 말하자면 무난한 평균, 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이 일종의 자기위안일 수도 있으나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니, 특히 학교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예술반 교실에서는 자신이 학들 사이에 길을 잃고 머무른 닭처럼 여겨짐을 떨칠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여학생들은 왜 이렇게 쭉쭉빵빵한 것일까. 여자가 많다는 제주도의 바람이 어떤 힘을 작용한 걸까.
한쪽 볼을 부풀리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저 질시와 선망의 비뚤어진 토로일 뿐. 괜히 뜨거운 탕 속에서 현기증이 날 때까지 버팀으로써 자신의 몸에게 심술을 부려본다.


그런 학 중에서도 이쪽은 외국에서 온 칠면조라고 해야 할까. 유쾌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한 무리의 백인 여학생들은, 여대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뽐내고 있었다. 서양인의 성숙이 동양인에 비해 빠르며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역시 가까이에서 보니 무색무취의 파장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감히 접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들이 자꾸 이쪽을 흘깃 거리며 웃는 것처럼 보여서 부끄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물론 그건 얼굴만 크고 허리도 굵고 허벅지도 두꺼운 한 여고생의 자격지심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이유로 여양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그 이유로.

“저 애야? 그 소문이 자자한 신입생이.”

한 소녀가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영어였기에 조금도 거침이 없었고 약간의 비속어도 섞여 있었다. 2학년과 3학년이 섞여 있지만 영어 대화이니만큼 존댓말은 따로 없었다.

“아하, 여왕이 되겠다고 선언한 신입생 말이지?”

몸에 비누칠을 하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답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그만 백인 소녀가 짓궂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생각보다 생긴 것도 별로고,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한국 빈대떡 같아. 철판에 눌러놓은 것처럼 납작하잖아, 하하하.”
“얼굴 말이야? 아니면 가슴?”
“물론 둘 다지.”

처음 말을 꺼냈던 금발 소녀 카밀리아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깔보는 시선을 되돌려 보내며 핀잔을 주었다.

“초등학생 몸매인 네가 말하니까 왠지 웃기는데.”

키도 작고 가슴도 작은 돌로리스로서는 기분이 나빠지는 언급이 아닐 수 없었다. 백인은 덩치도 크고 발육도 빠르다면서?…… 같은 소리를 한국인들한테서 들었지만 전부 놀리는 소리로밖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연 돌로리스는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닥쳐, 카밀리아! 내 인기를 몰라서 그래? 일본에서 내 인기는 최고였어.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Jap(일본놈)들은 너 같은 애를 좋아하지. 눈이 크고 아기 같은 얼굴에, 허리는 가늘고 팔다리는 길쭉하고……”
“쉿! 저쪽에 있는 애들 일본애들인 모양이야.”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3학년생 메이브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눈짓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얼핏 보기엔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동양인 소녀들 속에 바짝 붙어 있어 사이좋아 보이는 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의 몸에 비누칠을 해주며 장난을 치던 둘은 인상이 굳어지며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상태다. 일본인을 비하할 때 부르는 Jap이라는 낱말이 그들 귀에 들린 모양이었다.

“흥! 들으라지. 쫄 거 없어. 둘 다 신입생이야. 전에 있던 그 년은 졸업했잖아.”

돌로리스는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영어로 거침없이 떠들었다. 카밀리아는 조금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금년도 유학생 입학시험 최고득점자가 일본인이라고 들었어.”
“쳇. 그게 무슨 상관이람. 한 명은 완전 꼬맹이인데, 다른 하나는 제법 체격이 다부지고, 가슴도 제법 탱탱한 걸. 꼬맹이가 공부를 잘해 보이는군. 쟤가 최고 득점자일까?”
“글쎄 네가 남 보고 꼬맹이니 뭐니 하는 건 완전 개그라니까. 셰임 온 유(Shame on you).”

두 사람이 다시 자기들끼리의 만담에 몰입하자 메이브가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조용히 해봐. 그보다 말야, 인질로 잡혔던 그 백인 아이, 걔도 신입생이라고 들었어. 러시아에서 왔다는데.”
“와우, 한국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러시아 미녀인가?”

돌로리스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카밀리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눈썹과 입끝을 늘어뜨린 표정을 지었다. 메이브가 반쯤 비꼬는 말투로 칭찬을 했다.

“넌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듣고 아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봐서 알겠지만 그 정도 외모라면 우리 클럽에 넣어줄 만 하지 않을까?”
“흠, 좋아. 난 찬성.”

카밀리아는 한 손을 들며 찬성 표시를 했으나 돌로리스는 손바닥을 펴서 흔들어 보였다.

“잠깐만, 난 반대야. 내가 듣기로 그 애는 혼혈이래. 부모 중 하나가 한국인이라던데.”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나도 아버지 쪽으로 올라가면 내 할아버지는 유대인이야. 2차대전 때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미국인인 할머니와 결혼했지. 따지고 보면 미국에 있는 백인들은 다 영국에서 온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같은 백인이잖아. 그 애는 백인과 황인의 혼혈이라고.”

돌로리스의 말을 듣고 메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고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쯧쯧쯧.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직 애들인 거야. 그 아이에게서 느꼈던 신비로움이 바로 그 때문이란 말야. 너희들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혼혈인은 아름답고 강인하지. 왜냐하면 우성이거든. 순수한 혈통 어쩌고 하지만, 혈통을 지킨답시고 남매끼리 결혼했던 이집트 왕족들은 오래 못가고 멸망했지. 어느 문화권에서든 근친혼을 금지하는 건 도덕적 이유도 있지만 태어난 아이가 열성인자를 물려받아 허약하고 능력도 떨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생물학적 이유에서도 비롯되었거든.”
“아우, 난 선배의 장광설은 못 당해주겠어. 똑똑한 거 인정해줄 테니 이제 때 좀 밀게 해주시지?”

돌로리스가 투덜거리며 이태리 타올을 꺼내들었다. 카밀리아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타올을 빼앗듯 낚아채어 손에 쥐고는 덤벼들었다.

“오케이, 내가 한국식으로 너의 등짝 껍질이 벗겨지도록 등을 밀어주지. (한국어로)때밀어~!”
“아, 아야! 아파! 난 한국의 때밀기와 이열치열은 절대 이해 못하겠어! 야만적인 문화야!”
“우리 아버지는 모든 나라의 풍습은 긴 역사와 경험에서 취사선택된 문화적 산물이니 배우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쳐줬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이브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과연 주한대사의 따님. 외교관 지망생의 말씀다운데.”

세 백인 학생들이 한국식 때밀기 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동안 두 일본인 학생은 서둘러 몸을 씻고 탕을 나갔다. 그들과 잠시라도 함께 있기 싫다는 듯한 티를 역력히 내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한국인 학생은 몸이 벌겋게 되도록 탕에서 몸을 지지고 난 후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이빨을 닦고 탕을 나왔다.

탕을 나서니 목욕을 하고 난 후라 차가운 밤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잠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여양은 뽀송뽀송한 이불의 감촉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오늘 하루도 속이 상하고 안타깝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지만 뜨거운 탕 안에 때와 함께 녹여내고 나온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방에 돌아와 지급받은 파자마를 입고 침대 위로 몸을 던져본다. 너 벌써 자냐? 지란이 물었지만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어차피 방 안엔 TV도 라디오도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학기 초부터 공부를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빌려야 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일단 꿈나라에나 놀라갈까, 라는 생각과 함께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


여양 자신을 비롯하여 그들 모두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로써 극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무대에 오른 셈이었다. 이제 화려한 막이 오르고, 만개한 화원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극이 펼쳐질 시간만 남은 셈이었다.



(제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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