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따라오지 말라고 그랬죠.”
여양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오는 두 선배들은 능글맞게 웃고만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린 그냥 우리 갈 길 가고 있는 것뿐이니까.”
“맞아. 너희들이 우리 앞을 걷고 있는 거야. 길앞잡이처럼 말이지.”
이 선배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교내에서는 유명한 마당발들. HDV 카메라를 들고 있는 체육복 바지 차림이 방송부 부장 서활인이고 두꺼운 취재수첩을 들고 사진부 협조로 대여한 DSLR 카메라를 목에 건 쪽이 신문부에서 특파한 취재기자 제갈승미다.
“자, 카메라 돌아갑니다. 화면 좋고! 마트료나는 어쩜 이렇게 뒤태도 예쁠까. 다리가 호리호리한 게 바람에 톡! 하고 꺾일 것만 같네요.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인가 봅니다, 하하.”
활인이 어느새 촬영을 하면서 자체 해설을 넣고 있었다. 활어처럼 톡톡 튀는 말투도 여전했다. 하지만 여양은 괜히 심술이 나서 마트료나의 뒤로 바짝 다가가 촬영을 방해했다. 여양의 약간 통통한 체구가 마트료나를 완전히 화면에서 가려버렸다.
“와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우리의 마트료나양이 사라졌습니다. 이건 완전 CG 처리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네요 그래.”
“네, 뚱뚱한 제가 날씬한 마미를 가려서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여양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그리곤 마트료나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마미, 우리 저 사람들 따돌리고 도망칠까?”
“글쎄. 나도 솔직히 귀찮긴 하지만 일부러 그럴 것 까지는……”
“그런데 왜 마미라고 부르는 거니?”
어느새 승미가 바짝 따라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신문부원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한두 마디가 대서특필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본인의 의사와는 동떨어지는 의미로 왜곡되어서. 여양은 헛기침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은 후 답했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별명처럼 부르는 거죠.”
“아, 하긴 마트로나라는 이름은 좀 길고 발음하기도 힘들지.”
“마트료나인데요.”
“앗차, 이거 죄송.”
승미는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마트료나는 발음도 어렵고 해서 짧게 줄여서 부르려고 했으나 마트라고 부르면 그게 곧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본인이 싫어해서 새롭게 지어서 붙이려 했다.
지란과 함께 잠시 고민하다 나온 것이 앞뒤에서 따서 ‘마나’라고 부를까 하다가 전체 이름인 마트료나 미하일로브나 불가코프에서 첫 이름과 중간 이름의 앞자를 따서 ‘마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후에 지란은 애정을 담았다며 ‘마미마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단 본인도 마음에 들었는지 급우나 친해진 사람들에겐 자기를 마미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근데 한글 이름처럼 들려서 좋네, 마미라고 하니까. 마침 내 이름이 승미라서 그런지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럼 나도 앞으로 마미라고 불러도 되지?”
“네…….”
마트료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딱히 싫거나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승미와는 인터뷰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정도 있었던 사이라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교내에서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껄끄러운 상대였기에 흔쾌히 그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둘씩 짝을 지은 이 불편한 사인조 일행은 지금 북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용무도 없이 북도로 진입하는 것은 일단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교칙에 정해져 있다거나 벌칙을 받는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북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2차선 다리의 끝에는 차단막이 세워져 있고 교직원 수첩(학생수첩과 모양과 기능은 거의 같다)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인력을 배치하여 통제하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차단막은 자동차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엎드리거나 림보처럼 몸을 구부리면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CCTV로 촬영되고 있을 것이니 몰래 숨어들어간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섬과 섬 사이를 CCTV에 찍히지 않고 이동을 하려면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는 수밖에 없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 싶었다.
여양은 이미 두 차례나 북도에 와봤던 경험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지란과 체링과 함께 섬에 도착한 날. 아무것도 모르고 저녁식사 시간까지 섬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 당시는 봄방학 기간이고 교직원과 학생들 상당수가 섬에 없던 때라 그런지 차단막이 올라가 있어서 별 생각 없이 북도로 걸어 들어갔었다.
거기서 꽃과 나무가 풍성한 아름다원 화원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 물에 젖은 채로 정신을 잃은 미소녀를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여양의 곁에서 걷고 있는 마트료나였다.
두 번째는 학생회장 빈나련, 부회장 포효범, 마트료나와 함께 넷이서 하교후에 왔다.
“괜찮을까요? 나중에 학교 측에서 멋대로 들어왔다고 뭐라고 하면…….”
여양의 근심 섞인 질문에 나련은 명쾌하게 답했다.
“그럴 때 쓰라고 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거야. 자, 서두르자. 퇴근하는 선생님들 눈에 뜨이면 번거로워져.”
확실히 교직원 기숙사가 북도에 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북도에 있다가는 들키기 십상이었고, 그러니 학생회장의 권위가 필요할 것이다. 어느 선생님 혹은 직원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든가 하는 식으로 둘러대어도 통할 테니까.
동도에서 북도로 바로 가는 다리는 없기 때문에 서도를 우회해야 하는데, 동도와 서도를 잇는 승개교는 저녁 9시가 되면 가운데 부분이 올라가며 길이 차단된다. 만약 특별활동 등으로 9시 이후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경우엔 서도→남도→남동도→동도까지 빙 둘러서 가야만 했다.
더구나 이쪽으로 오는 다리의 끝, 즉 동도의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어서 경비 직원들에게 늦게 온 사유를 말해야 하고 교사의 허락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늦게 돌아다니다 발각될 경우 벌점을 받는 등 불이익을 당하게 되니 조심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