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낯선 별 아래


아침 일곱 시 반,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이 절로 떠졌다. 처음엔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만 같이 막막한 마음이었는데, 육체는 생각보다 빨리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였던 것은 처음 며칠의 일이었고, 학기가 시작되어 슬슬 교실과 수업, 급우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3월 중순에 이르자 꿈도 잘 안 꿀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가 알람이 울릴 무렵이면 자동으로 잠을 깰 정도로 몸이 익숙해져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하얗고 얇은 커튼 사이를 뚫고 나와 방 구석구석으로 뻗어 있었다. 살짝만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거친 바닷바람이 힘차게 커튼을 흔들며 손짓을 했다. 얼른 일어나 이쪽으로 오렴. 그 소리 없는 아우성에 이끌리듯 지란이 이불 속에서 애벌레처럼 슬슬 기어나오더니 반쯤 구르듯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으로 기어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차고 신선하며 조금은 짭짤한 바다의 냄새를 폐 안 가득히 넣으며, 연푸른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수평선을 구경했다. 마치 바다와 하나가 되는 듯한 신선하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뜨거운 몸이 찬바람을 들이마시니 잠기운이 달아나면서 몸 깊숙이에서부터 시원하고 짜릿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 좋았다.

방을 잘 고른 덕분에 여양과 지란의 방 창문에서는 수평선이 바로 보였다. 바로 아래에는 인공섬을 호위하듯 두른 방파제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동쪽엔 제주도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 절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을 것만 같다.
둘은 창문에 머리를 맞대고 가끔 날아가는 새나, 수면을 튀기는 물고기의 모습이며, 특이한 모양의 구름을 발견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영화궁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둘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흥분을 다 씻어내지 못한 듯 했다. 다만 평일 아침에는 오랫동안 이러고 있지 못함을 알 정도는 적응이 된 상태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씻을지를 가위바위보로 정하곤 했는데, 방은 둘이 쓰지만 화장실의 변기와 세면대는 당연한 듯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지란이 큰일을 본다며 세면대를 양보하고 변기에 앉았다. 둘의 사이는 겨우 샤워 커튼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을 뿐이라, 여양은 냄새가 지독하다며 불평을 했다. 하지만 이미 서로의 추한 모습을 많이 본 두 사람의 사이는 가족처럼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었기에 그저 가벼운 장난처럼 투덜거리는 정도였다.
둘이는 한 번의 다툼도 없이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정답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문득 다른 룸메이트들도 모두 자기들처럼 사이가 좋을까 궁금하기도 할 정도였다.

“너, 오늘 그 사람들 만난다고 했지?”

지란이 창가에 서서 머리를 말리며 물었다. 헤어드라이어가 없으니까 엄청 불편해, 아우 추워, 하고 연신 툴툴거리는 와중에 건넨 말이라 여양은 처음에 못 알아들어서 재차 물어봐야 했다. 침대에 앉아서 팬티스타킹을 입으며 대답했다.

“누구? 아, 길금윤?”

그만 여양 자신도 잊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한 달간 반성실에 갇혀 있던 길금윤이 나오는 날이다. 학생들끼리의 표현대로라면 징역 한 달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이라고 할까.

“근데 그게 뭐?”
“나도 가면 안 될까?”
“넌 아무 상관이 없잖아.”

여양의 무심한 말에 지란이 쪼르르 달려와 어깨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내가 왜! 왜 상관이 없어! 너랑 마미마미에 대한 일인데! 그러지 말고 응?”

갑자기 덤벼들자 둘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야, 놔! 블라우스 다 구겨지겠어! 네가 길금윤을 만나서 어쩌려는 거야?”
“아니, 그냥 난 호기심 때문이랄까.”
“그래서 너 신문부에 들어간다는 거야?”

선배들이 지나치게 친절한 표정을 짓고 쉬는 시간의 교실이나 하교길에 달라붙는 신입생의 학기 초. 이런저런 특별활동 클럽에 들어오라는 유혹들이 쏟아지는 3월. 지란은 처음에 수영부에 관심을 가졌다. 천장과 벽이 유리로 되어 있고 야자수가 주위를 둘러싼 호화로운 수영장의 모습에 반했던 것이다.

“아니, 사진부.”
“또 바뀌었냐?”

지란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며 여양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얘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냐. 정작 본인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는 태도였지만.
여양의 경우는 예술반에 연기 전공이라 당연한 듯이 연극부에 들어오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아직 고민하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신문부에선 사진기나 카메라를 별로 안 쓰더라고. 사진은 사진부에서, 카메라는 방송부에서 주로 쓰더라니까. 취재할 때도 부원끼리 협조해서 같이 다닌다든가 한다네. 사진부는 부원들에게 카메라를 하나씩 준다는 거 아니겠니? 그것도 DSLR로!”

지란은 양손을 들어 사진을 찍는 포즈를 취하며 여양의 몸 곳곳을 둘러보며 오른손 검지를 들썩이며 가공의 셔터를 눌러대었다. 아직 치마를 입지 않은 여양은 사진 찍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다는 듯 손을 휘둘러 지란의 시야를 어지럽히고는 침대에서 도망치듯 일어났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너무해! 그렇게 마미마미랑 단 둘이 있고 싶다는 거야?”

지란은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비극적인 포즈를 취했다. 저러다 연극부에 들어간다고 설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장된 동작이었다. 여양은 애써 무시하며 치마를 입고, 타이를 매고 등교할 준비를 마쳤다.
가방은 역시 학교에서 지급한, 매우 작고 가벼운 것이다. 교과서와 공책, 문제집 등은 전부 개인 캐비닛에 보관하고, 숙제나 예복습을 위해 몇 권만 방으로 들고 왔기 때문에 짐이 매우 가벼웠다. 이 홀가분한 해방감은 기숙사 생활의 최대 장점이었다. 자기 또래들은 지금쯤 등산이라도 하듯 무거운 책가방에 도시락에, 학교에 따라서는 체육복이나 신발주머니까지 싸들고 낑낑대며 학교에 가겠지.
더구나 무슨 학교들은 그렇게 산 위에 있는 것인지. 매일 등산을 하는 덕분에 다리는 쓸데없이 튼튼해지며 먹는 게 하체로 급강하하는지 자꾸만 굵어져 간다.
여고는 살아 움직이는 무,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장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오늘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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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09-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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