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술 더 떠서 못 말리는 불량학생 조지란은 아예 빈손이었다. 필수품인 학생수첩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이니 코트 주머니에 넣으면 그만이라 누가 봐도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모습 같지는 않았다.
학생수첩은 화폐, 출석부는 물론이고 방의 열쇠까지 겸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잠을 잘 때 외에는 거의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분실하면 일단 무조건 처벌을 받아야 하고(아마도 취급 부주의라는 죄목일 것이다), 만약에 남의 것을 훔치다가 붙잡히면 최소 징역 한 달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고 할 정도.
소문에 따르면 GPS가 내장되어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학교 측에서 원하면 언제든 감시할 수 있다는 뜻도 되어 기쁘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여양은 든 게 없어 헐렁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슬쩍 걸치고, 지란은 아무것도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일단 1층 로비 자판기 앞으로 가서 지란은 커피, 여양은 보리차를 뽑아 들고 후후 불면서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 로비와 입구는 친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아침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종의 사교장이었다. 소녀들의 입술은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화제 거리가 샘솟곤 했다. 최근의 주된 소재는 신입생은 특별활동, 2·3학년은 여왕 후보. 여왕 선발은 4월 한 달 동안 진행되어 5월 1일에 즉위식이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 후 여왕이 학생회 회장과 부회장을 지명하여 각급 반장을 포함한 학생회의 찬반 회의를 거쳐 선출이 된다. 따라서 대부분 여왕 후보들의 윤곽은 3월 안에 드러나게 되고 4월부터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사람은 바로 현 학생회장(학생회장의 임기는 신임이 선출될 때까지이므로 아직 현역이다) 빈나련. 부회장인 정효범이 러닝메이트로 뛰면서 강력하게 밀어주고 있음은 물론, 뛰어난 지도력으로 재학생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학생회장이 여왕의 직위를 이어받는 것이 회수적으로도 가장 많을 뿐더러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 때문에 학생회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당파(王黨派)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에 맞서는 라이벌은 총무부장인 메이브 I. 던세이니. 치어리딩부의 부장을 역임하며 아름다운 외모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인기가 높다. 그 자신이 만든 LXG(the League of eXtraordinary Girls)라는 그룹이 일종의 참모 역할을 하며 중핵을 이루고 있다. LXG는 그 자신이 직접 뽑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표방하고 있으며, 학업 혹은 외모가 출중한 유학생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듯 인기가 높은 3학년생 둘에 맞서서 분투하는 1학년생이 있으니 바로 태북그룹 3세 북도정. 이 학교를 거쳐간 자신의 언니들이 모두 여왕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과거가 있기에 막내인 자신이 반드시 여왕이 되어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학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2·3학년들의 반응은 미미하지만 1학년들의 인기는 상당히 높아 친위대라 불리는 지지세력을 구성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아직 아무런 활동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유난히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거론하자면 여왕님을 들 수밖에 없다. 본인이 신문부와의 인터뷰를 통해 여왕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나온 학교신문의 지지도 조사에서 후보로 등재되어 있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대화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1학년생이라는 ‘설정’은 세상과 격리되어 따분한 삶을 살고 있는 이곳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신선한 자극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빈나련과 메이브의 2파전으로 굳어지는 형세를 전임 학생회가 차기까지 점령하려는 권력투쟁으로 보고 식상함을 느낀 이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학생회 학예부장인 진영아가 학교신문의 기고문을 통해 나련과 메이브 양쪽 모두를 비판하며 여왕님이 후보로 나올 경우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고, 이 글이 화제를 모은 덕분에 본인의 고사로 잠깐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 했던 여왕님이 다시 유력한 후보로 학생들의 입에 오르게 된 것이다.
3월 중순의 지지도 순위를 보면(하교하는 학생 약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 오차범위 ±2%) 빈나련 37.3%, 메이브 21%, 여왕님 13%, 북도정 7.4%, 기타 및 무응답 21.3% 라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재학생의 수가 천 명이 못 되는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실제와 근접한 수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여왕 선거는 일반적인 선거와는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지지도가 곧 당선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여왕 선거는 두 번 치뤄지며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선투표, 소수의 선발자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치루는 결선투표(일명 콘클라베)로 이루어진다. 예선에서 득표수가 높은 후보 둘을 추린 후 결선에서 한 후보에게 만장일치로 표가 모일 때까지 계속 재투표를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따라서 학생들의 지지도가 높아서 예선에서 최다득표를 한다고 해도 결선에서 밀려서 떨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독특한 선발 방식은 개교와 동시에 이사회에서 제정하여 교칙으로 규정했다고 하며, 이는 국왕은 대통령 같은 선출직이 아니라 천명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이사회의 의지에 따른 결과라고 전해진다. 물론 학생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순수하게 자기들 손으로 뽑고 싶다며 불만을 가지기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런 특이한 선출방식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의외의 결과가 불러올 흥미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기도 한데, 이는 모두 TV와 연예인 등 보통의 학생들이 가진 화제 거리에서 어느 정도 차단된 영화궁 고등학교만의 문화에서 비롯된 분위기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이프 사건이라 불리는 일련에 소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비상했다. 특히 졸업식 직전에 행방불명되었던 전임 여왕을 만났다고 주장한 신입생에 대해서도 신문부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등 화제를 모았는데, 마트료나 본인은 인터뷰를 거절하고 누가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등 일체의 접촉을 거부해왔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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