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을 어디에 쓰려는 거지?”
효범이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마트료나에게 물었다.
“무슬림들의 저녁 기도 시간이에요.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하는데, 방향을 알아야 하거든요. 대략 서경 260도 정도래요.”
그들이 생쥐처럼 속삭이는 동안 나즐리는 자신의 침대 옆에 선후 경건하게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이미 자신의 방 안에서는 메카의 방향을 파악한 상태라 나침반이 필요 없겠지만, 무슬림들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 있어도 방향을 알 수 있도록 나침반을 늘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몇 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섯 사람은 행여 방해가 될까 싶어서 얌전히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즐리는 기도를 마친 후 일행의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즐리, 입니다. 마트료나의 친구?”
모르는 얼굴이 둘 있었다. 더구나, 타이의 색깔을 보니 선배였다. 밝은 얼굴로 호기심을 보이기에 차마 무시할 수 없어서 그들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지만 상대가 한국어에 서툴기도 하고 굳이 퍼트릴 생각도 없기에 찾아온 용건은 생략했다. 효범은 다만 히잡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내가 TV에서 본 이슬람 여성들은 모두 검고 칙칙한 걸 쓰고 있던데. 거의 온몸을 덮고 말야. 하지만 이건 꽤 예쁜데? 여름이면 몰라도 지금 같은 계절엔 괜찮겠어.”
확실히 나즐리는 연분홍빛의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머리와 목만 감싸는 짧은 형태였다.
“여러 색깔을 갖고 있대요. 우리 1학년의 타이 색이 노란색이니까 거기에 맞췄다나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이런 밝은 색의 히잡을 쓴대요. 일종의 패션인 셈이죠.”
마트료나가 대신 대답을 해주자 나즐리가 싱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잠시 마트료나의 해설로 이슬람 유학생의 생활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율법에 정해진 대로 도살한 짐승의 고기가 아니면 먹을 수가 없어서 현재는 채식을 하고 있다든지, 이곳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엔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남들처럼 화장실 물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졌다든지 하는 에피소드들이었는데, 유학생의 이문화 체험담도 물론 소중하고 재미있는 일이긴 했으나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급한 목적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니까. 그래서 나련은 시계를 보고는 자신이 목적도 잊은 채로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시간을 많이 빼앗았지? 이만 일어날게.”
그러자 유능한 비서처럼 효범이 더 빨리 일어나 문 앞으로 이동했다. 나련은 시선을 마트료나에게로 고정한 채로 효범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되겠지?”
효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벌써 7시가 넘었으니까. 교직원들이 퇴근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확실히 교직원 기숙사가 북도에 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북도에 있다가는 괜히 한 소리 듣기 십상이었다. 아마도 학생회장의 권위와 그럴싸한 핑계를 동원한다면 임기응변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련과 효범만이라면 몰라도 신입생 두 명까지 데리고 근처를 어슬렁거린다는 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다.
나련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여왕님, 너에게 부탁을 해야겠어. 비록 오늘은 너무 늦었지만, 내일이라도 그 화원에 가보고 싶어. 안내해줄 수 있어?”
“저야 뭐, 아직 할 게 없는 신입생이니까요. 언제든지 상관 없어요.”
“나도 꼭 데리고 가야 해.”
마트료나가 강조하듯 서둘러 덧붙였고, 여양은 긍정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효범이 문을 열자, 나련이 천천히 그러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고, 효범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와작거리며 과자를 씹으며 지란이 말문을 열었다.
“완전히 회장님과 비서네. 저 사람들 둘.”
마트료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긴장해서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소문난 학생회장님 다웠어. 사람이 빈틈이 없어 보이고, 단단한 갑옷을 껴입은 것 같아.”
그가 간 후에야 이렇듯 마음 편하게 느낌을 털어놓을 수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란이 사온 과자를 먹고, 나즐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든 신경의 절반 정도는 나련을 향해 촉각처럼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할까.
“이제 너도 빈나련 팬클럽 다 된 모양이다?”
여양은 가볍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직도 감자칩 봉지를 기울여 남은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고 있는 지란의 무거운 엉덩이를 발끝으로 가볍게 치면서 가자 룸메이트,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룸메이트 사이인 것이다.
기숙사의 배치는 반드시 학년에 따라 나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한 번 배정받은 방을 삼 년 동안 계속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인데, 학교 측에서는 문화적인 차이로 오는 문제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는지 동향의 유학생들끼리 같은 방을 쓰도록 권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 전국에서 온 신입생들은 비어 있는 방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을 고를 수는 있다지만 2인 1실이기 때문에 혼자만 쓰고 싶다든지 하는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같은 날 온 신입생들끼리 룸메이트를 정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기에 여양은 당연한 듯 지란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특성화된 사립고라서 일반적인 고등학교가 2학년 때부터 나누는 것과 달리 1학년 때부터 이미 문과와 이과를 정하여 반편성을 하고 있는 체제였고 여양은 예술과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반이 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고, 그래서 방이라도 같이 쓰자며 의기투합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며 가볍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와 자기들의 방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는 내내 여양은 말도 없이 약간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아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긴 했지만 나련에게 혼을 빼앗긴 듯한 마트료나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이렇게 마트료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빈나련은 마트료나가 반하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기는 하다. 예쁘고 멋있으며 약간 도도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니까. 신입생들은 벌써 그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꺅꺅거린다. 그가 훤칠한 보디가드-효범-을 대동하고 등교를 하면 창가에 나와서 구경하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인기는 학년 전체에 고루 퍼져 있고 적어도 드러내놓고 반감과 미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여왕’이라는 낱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여왕, 여왕이라.
여양은 자기 이름의 일부가 아닌, 원래 의미 그대로의 그 낱말을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이 학교에 여왕이라는 독특한 직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입학실 날에야 알았다. 그때는 이미 전교생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난 후였고, 선배들이 1학년 반을 기웃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특히 점심시간과 하교 때, 멍하니 있다 보면 누군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재빨리 딴청을 부리는 모습들이 뻔히 보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가리키며 마음대로 떠들고 있었던 주제에. 그들은 때로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쟤가 여왕 자리를 노리는 건방진 신입생이라며?’ ‘말도 마. 전교에 대고 선언을 했다니까. 빈나련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고 뭐겠어.’ 여양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거든요! 여왕 자리엔 관심이 없거든요! 빈나련이랑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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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갑자기 광고를 보내드립니다.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단편집『커피잔을 들고 재채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유명 작가, 기라성 같은 분들 사이에 염치없이 저도 한 자리 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인터넷 등에 공개한 적이 없는 완전 신작입니다. 이제 저는 인터넷 작가니 하고 자칭할 수가 없게 되었군요.;;
배본은 다음주부터 시작된다기에 아직 저도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황금가지의 단편집은 디자인과 편집이 우수하기 때문에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이영도 씨의 단편이 실리기 때문에 많이 팔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주 쯤에 그동안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을 위해 책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 계획이오니 기대해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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