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은 어땠어요?”
“우리 기숙사 방의 절반 정도 크기야. 화장실도 따로 있어서 지내기에 나쁘진 않지만 역시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으니…… 경비 직원들이 주는 책과 신문을 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어. TV도 라디오도 없으니까. 밥도 그 사람들이 갖다 주었고.”

여양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정말로 감옥살이나 똑같은 대접 아닌가. 겨우 고등학생에게 이런 가혹한 처벌이라니, 인권 침해 아닌가? 하지만 여양은 자신의 이런 심정과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금윤이 인터뷰를 통해 그가 겪은 현실을 드러낸다면 이에 분노한 학생과 교사가 이사회에 불만을 제기하여 이런 잘못된 제도가 없어지도록 만들 수도 있겠다, 라는.

잠시 말없이 세 사람은 식판을 들고 저녁으로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배식대로 들어갔다. 식당은 늘 뷔페식으로 원하는 음식을 덜어서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패스트푸드 점의 트레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식판을 하나씩 들고 배식대로 가면 밥, 국, 반찬 같은 한식만이 아니라 국수, 우동 등의 분식에 빵, 피자, 샐러드 등의 양식도 각각 원하는 양을 접시에 담을 수 있도록 해놓았고 물만이 아니라 차와 과일 주스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도록 했지만 식당 안에 음료수 자판기는 없었다.
여양은 녹차와 물을 반씩 섞어서 컵에 담으며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음료수 자판기를 없앴다’는 안내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차피 매점에 가면 자판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식당에서 이런 성의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자리에 앉고 보니 우연처럼 메뉴가 제각각이었다. 여양은 밥과 김치, 미역국에 계란부침이라는 전형적인 한식인데 마트료나는 우동과 샌드위치와 샐러드, 금윤은 피자 한 쪽과 카레 소스를 얹은 닭튀김에 스파게티와 샐러드라는 푸짐한 차림이었다.

“징벌방에선 맨날 밥이랑 국만 줘서 피자가 그리웠어.”

금윤은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포크로 피자를 찢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여양은 수첩을 꺼내어 지란과 체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밥 안 먹었으면 여기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학생 수첩은 메일이나 휴대폰 문자를 보내는 것과 비슷하게 특정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학년과 반, 이름만 알면 보낼 수가 있으나 보내는 이의 이름도 표시되므로 익명 메시지는 불가능했다. 또한 학급이나 학생회, 특활부를 위한 별도의 게시판이 존재하여 그곳에 글을 올리고 답글을 달 수도 있으며 특정인끼리만 볼 수 있는 게시판도 만들 수가 있다(가령 학급 게시판은 그 반 학생과 담임교사만 접근 및 열람이 가능).

금윤도 입을 우물거리며 자신의 룸메이트와 반 친구에게 귀환을 알렸다. 메시지함에 신규 메시지가 잔뜩 들어 있어 열어보니 친구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응원의 글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기다려준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왔다.

“금윤아!”

아아아아, 하고 뒤를 길게 빼면서 노래하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통통하지만 귀여운 2학년생이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를 본 순간 금윤의 얼굴이 확 밝아지며 화색이 돌았다.

“나영아!”
“금윤아아~! 잘 지냈어?”

둘은 두 손을 마주잡고 흔들면서 꺄꺄 소리내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잠시 후에야 조금 진정된 듯한 금윤이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자신의 룸메이트를 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원나영이야. 몸만 크지 아직 애라니까.”
“아이~, 나도 이제 2학년인데 뭘.”
“저녁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마침 친구들이랑 저녁 먹으러 온 참이었어. 내가 불러올게, 다같이 먹자아~.”

나영은 즐거워서 못 참겠다는 듯 연신 방긋거리며 말했다. 여양은 그저 지켜보면서 참 밝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같이 있기만 해도 지루하지 않은 그런 상대랄까. 입에선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이 흘러나왔고, 손은 늘 박수를 치거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빨간 플라스틱 테를 두른 안경이 눈에 띄었고, 머리는 파마를 했는지 자글자글 볶았고 조그만 헤어핀을 여러 개 달았는데, 액세서리도 그렇고 몸동작도 그렇고 덩치만 커진 초등학생을 보는 것만 같이 귀여웠다.

어느새 나영이 몰고 온 반 친구들로 금윤은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 여양과 마트료나는 말없이 식사만 했다. 군중 속의 소외랄까, 심심해진 여양은 괜히 다른 사람들이 밥 먹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거나 하면서 밥을 먹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노란 머리 혹은 짙은 피부의 유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구석엔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얼굴에서 입밖에 보이지 않는 소녀도 있었다. 얼핏 보는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일순 심장이 멈추고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짧은 충격이 지나고 나자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TV를 뚫고 나오는 사다코와도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야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얌전히 앉아서 국수를 먹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좀 코믹해 보였다. 시커먼 머리카락의 커튼 사이로 하얀 국수가닥이 한 줄기 빨려 올라가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저 아이, 1학년인데, 듣기로는 얼굴에 흉터가 있대. 화상인가, 교통사고던가? 둘 중의 하나일 걸.”

갑자기 오른쪽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신문부의 제갈승미가 옆에 앉아 있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난 그냥 너희들 찾다가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왔을 뿐이니까.”

승미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올리곤 식판에 담아온 닭튀김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다시 보니 얼굴이나 손목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보여서 다친 게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흘깃거리는 것도 실례인 듯 하여 승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음식을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할 생각은 없지만, 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일에 대해선 알려주는 것이 우리 신문부의 일이니까, 금윤의 인터뷰는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할 생각이야. 여기엔 이의 없지?”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겠지만 교내 신문은 월요일 발간이니까 이번 주 토요일 안에는 인터뷰를 할 생각이야.”
“아까 잠깐 들었는데, 진짜 감옥과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학생에게 이렇게 심한 처벌을 가해도 되는지, 신문에서 꼭 다뤄주셨으면 하네요.”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기숙사 제도 학교라고 해도 학생에게 정학 처분을 내릴 때 별도의 방에 가두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학교는 최소한 우리나라에는 더 없을 거야.”
“그렇죠. 중국이나 중동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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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나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쭈그리고 앉은 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금윤도 한참이나 거친 숨을 내쉬고 난 후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한 달이나 방에 갇혀 있었는데 갑자기 뜀박질을 하니까……”
“하니까?”
“……죽을 것 같아.”
“하하하. 그래도 덕분에 운동은 실컷 했잖아요? 그동안 밀린 운동 했다 생각하시고!”

여양의 농담에 둘은 마음놓고 큰 소리로 웃었다. 당분간 그 두 사람은 이곳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 믿고.

“하지만 내일부터 저 둘이 반으로 쳐들어올지 몰라요. 무슨 말을 할지는 선배의 자유지만, 이상하게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어요.”
“알았어. 기억해둘게.”

금윤은 그렇게 대답하곤 잠시 여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풀렸나 싶었던 어색한 냉기가 되살아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 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금윤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존댓말 써?”
“네? 그, 그거야 선배니까…….”
“뭘 이제와서 내가 선배 대접받을 게 있다고. 그때 한 말 거짓말은 아니지?”

그때의 말이라면 나이 이야기일 것이다. 여양은 긴장한 기색으로 얼른 마트료나의 눈치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주위에는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친구들이 어색해할까봐.”
“하긴, 그것도 그렇겠지. 그치만 난 상관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나도 이렇게 반말로 하고 있고. 나한테는 말을 놔도 돼.”

여양은 알았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안 된다고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마침 마트료나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쪽으로 다가오자 얼른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괜찮아, 마미? 미안해, 갑자기 뛰자고 해서.”
“아니, 난 괜찮아. 체력이 약한 내가 잘못이지.”
“마트료나.”

금윤이 돌연 정색을 하고 마트료나의 이름을 불렀다.

“반성실에서도 교내신문은 읽었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학교를 일주일이나 쉬었다면서.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이젠 다 잊었어요. 신문의 기사는 괜히 자극적으로 부풀려서 쓰고 그러는 걸요.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전 선배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요.”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마트료나의 얼굴이 있었다. 이국적이고 가련하며 청초하고 황홀한 아름다움. 월랑과는 또 다른 고귀함이 담긴 아름다움이었다.

“저 역시 초월랑이란 분을 만났고…… 그 분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까요…….”

분위기가 침울해지자 여양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화단 너머로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 한켠에 쥐가 갉아먹어 구멍이 뚫린 듯 쓰라렸다. 마미가 초월랑이며 빈나련에게 마음을 뺏기는 건 어째서일까. 그들이 여왕이며 학생회장이기 때문일까. 만약 자신이 여왕이고 학생회장이라면 마미는 온전히 자신만을 좋아해줄 수 있을까. 엉뚱한 망상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더 주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금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배가 고파서 이만, 밥 먹으러 갈게.”

여양도 서둘러 따라 일어나며 치마에 묻은 풀을 손으로 툭툭 털면서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 또 활어 선배랑 그 기자 선배가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별로 괜찮은데. 사실 할 말도 없고.”
“안 돼요. 활어 선배는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로 생방송으로 찍어댄다고요. 말실수라도 잘못 하면 전교에 책잡히는 거예요. 신문부는…… 잘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신문에 대한 불신감이 있어서, 분명히 자기들이 정해놓은 논조에 맞게 편집하고 왜곡할 게 틀림없어요.”

금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고등학교의 교내 신문에 대해까지 그런 기성 족벌 신문과 같은 비판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싶었다.

마트료나는 여양이 내밀어준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여양은 마트료나의 엉덩이며 등에 묻은 흙과 풀을 세심하게 털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금윤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어떤 감정을 잡아내었다. 저 아이는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넘쳐흐른다고 할까.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을 제삼자의 눈으로 알아본다는 건 흐뭇해지는 일이겠지만, 까닭모를 아쉬움도 묻어나왔다. 이건 설마, 질투라는 것일까.

금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생각하면 늘 밝은 햇살이 후광처럼 비춰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명석하며, 밝고,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그야말로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소녀들의 여왕님.
그런 여왕이란 존재는 평범한 금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말을 걸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그의 입술은, 마음은, 순결은 모두 그에게 바쳤다. 비록 그가 다른 여자애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고 해도, 이런 그의 마음이 더럽혀질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잊지 않기를,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주길 바랐다.

월랑님. 나의, 그리고 우리의 여왕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목 놓아 불러보고 싶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이 마트료나라는 소녀에게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 그는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숨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 증거라고는 오직 이 소녀의 말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믿고 싶었다.

“선배, 가요.”

여양의 목소리에 금윤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의 손은 자연스레 여양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여양은 왼손에 마트료나를, 오른손에 금윤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장난스레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자 금윤도 엉겁결에 손을 휘저으며 반쯤 끌려가듯 걸었다.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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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할 수 없다는 듯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거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어 대었다. 마트료나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양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자신의 코트 자락을 벌렸다.

“자, 마미, 내 곁으로 오렴.”

여양의 장난섞인 느끼한 목소리에 마트료나는 약간 부끄러워 하면서도 순순히 들어왔다. 옆에 있던 활인이 어느새 카메라를 꺼내어 들고 접근했다.

“이거 뭔가 훈훈한 장면 같은데, 한번 찍어볼까?”

하지만 이내 여양의 날카로운 눈빛이 독침처럼 날아와 꽂혔다.

“절대 찍지 말아요. 사생활 침해야!”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어제도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만났으면서. 서로 가슴 크기 비교하자며 만져보기도 했잖아. 흐흐흐.”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표정을 짓고는 손가락을 산낙지처럼 꼼지락거린다. 서로 웃으며 즐긴 사이이긴 하지만, 하필 마트료나의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만다.

“그, 그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그게 도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선배, 목욕탕에서도 촬영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사실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지만……”

옆에서 승미가 굴뚝 같겠죠, 하고 정정해 주었다. 활인은 혼자 치마가 아닌 체육복 바지 차림인지라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앉아서 반쯤 뒹굴었다.

“에라! 언젠가는 찍어봐야지. 영화궁 고등학교 목욕탕 실황 중계! 적나라한 여고생들의 누드 퍼레이드! 미소녀들의 속살을 남김없이 공개!”
“그 무슨 야동 광고스러운 말씀입니까.”

옆에서 승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이후 한두 대의 차가 더 북도로 들어간 후,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이프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받은 바로 그 길금윤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만난 사이라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았으나 하얀색 헤어밴드가 인상에 깊게 새겨져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당시 광기에 휩싸여 불꽃을 튀기던 눈빛은 수그러들고 없었다.

옆에는 낯이 익은 직원이 대동하고 있었는데, 금윤보다 키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가 인상적인 손선지였다. 선지 역시 여양을 알아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단봉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잠시 마주보며 서있었다. 어색함이라는 도랑이 그들 사이를 도도하게 흘렀만, 금윤은 약간 숙였던 고개를 들고 마트료나를 바라보았다. 용기와 의지가 담긴 눈, 부끄러움이 섞인 어색한 미소로 살짝 구부러진 입꼬리.

“오늘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어요.”

간신히 말문을 연 여양의 목소리도 꽤나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서로 죽일 듯 노려보며 거친 말을 내뱉었던 사이다. 양쪽 모두 그때의 앙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거리감만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선지가 수첩을 단말기에 대자 차단봉이 올라갔다. 그가 금윤에게 말을 붙였다.

“원래 기숙사까지 동행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왔으니까 제가 없어도 되겠죠?”

‘친구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시선이 자연스레 여양의 얼굴로 향했다. 여양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선지도 수긍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학생 수첩을 하나 꺼내어 금윤에게 내밀었다. 금윤이 말없이 받아들자 선지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길금윤 학생은 본교의 학생으로서 가진 권리를 되찾은 셈이에요. 자, 그럼 잘 돌아가세요.”

선지는 몸을 돌려 이사회 건물쪽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학생수첩은 기숙사 방의 열쇠, 화폐, 수업의 출석부 등 영화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갖가지 기능을 모두 담고 있는 필수품이었다. 이걸 압수당한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삶 자체를 거부당한 것과 같은 중벌에 다름 아니었다.
금윤은 PDA를 둘러싼 벗겨지고 색이 바랜 가죽 커버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고는 주머니에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금윤이 지나가고 몇 초 지나자 차단봉은 도로 닫혔다.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정하지 못하고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 떠올리는 대로 말하자고 정한 사람처럼 두서없이 말했다.

“저기, 찾아와줘서 고마워. 나 같은 건 보기도 싫을 줄 알았는데……. 상처는 나지 않았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거든. 배고프다……. 식당에서 먹는 밥이 그리웠어.”

마트료나는 온유한 목소리로 아무런 상처도 없고 괜찮다고 답했다. 잠시 훈훈하고 풋풋한 순간이 연출되나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사반나에 뒹구는 짐승 시체라도 본 듯 금윤을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이 끼어들었다.

“난 신문부의 제갈승미라고 해. 같은 2학년이지.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
“자, 테입 돌아갑니다! 여기는 영비에~스! 여전히 썰렁 썰렁~! 흐흐. 근데 실은 이 카메라, 하드디스크 방식이라 실제로 테입은 안 돌아가요. 그치만 일종의 방송 용어랄까? 아무튼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나이프 사건의 장본인 길금윤 학우의 출소 장면을 생방송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잠깐 선배, 출소라니 너무 자극적인 표현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먼저 인터뷰해야 하거든요?”
“뭐시라, 이 제기랄 기자가!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뭐가 어때! 인터뷰도 그렇지, 같이 하기로 해놓고 이게 무슨 적반하장?”

“이번 인터뷰는 방송에 나가기 곤란한 내용도 있을 수 있거든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모르세요? 오프 더 레코드!”
“오프 더 월(off the wall)은 아는데. 닌자처럼 벽타고 점프하는 거 아냐? 아무튼 이거 지금 생방송이야, 생방송!”
“생방송은 무슨! 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교내 방송 따위가! 저희 교내신문은 선생님들도 다 보시고 기사도 주시고 그러거든요?”

예기치도 않게 특종거리를 눈앞에 두고 두 세력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여양은 그 틈을 놓칠세라 금윤의 손목을 낚아쥐고 소리쳤다.

“자, 바로 이때다! 마미도 뛰어!”
“으, 응? 잠깐만! 같이 가!”

그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고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린 기자와 카메라 걸도 이내 뒤를 쫓았다. 외나무 다리의 열띤 추격전은 서도로 들어가면서 끝나는 듯 했다.
하교중인 학생들 사이를 제치고 들어가 수풀이 무성한 도서관 옆 화단으로 뛰어 들어가자 추격자들은 목표를 놓치고 허둥대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다니, 내 이름이 운다, 울어!”
“선배는 저쪽으로! 전 이쪽으로 갈게요!”
“좋아! 먼저 찾은 쪽이 인터뷰도 먼저 하는 거다! 대신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해!”
“두 말 하면 잔소리죠!”

다시 처음처럼 한 패거리가 된 두 사람은 양쪽으로 흩어졌다. 화단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여양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갔어, 이제 안심해.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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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정원을 나가 북도의 출입구로 돌아갈 무렵 회색 양복을 입은 경비요원이 무전기를 들고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련은 그에게 물에 빠졌던 마트료나가 소중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학생회장인 자신이 인솔하여 찾으러 왔다고 둘러대었다. 그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직원도 더 캐묻지 않고 물러났다.

그들이 북도를 나와 서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해진 뒤였다. 그들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는 결과만 남기고 돌아온 셈이었다.

“미안해. 괜히 쓸데없는 일을 시킨 것 같아서.”

나련이 두 사람에게 깔끔하게 사과를 했다. 과연 학생회장. 원망이나 뒷다마를 들을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능숙한 뒤처리 솜씨였다.

“괜찮아요, 저녁 산보한 셈 치죠. 전 이렇게 바람 쐬면서 걸어 다니는 거 좋아해요.”

여양은 그렇게 답하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밤이 되자 낮과는 달리 꽤 추워지긴 했으나,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좋았다. 파도가 치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낮고 웅장한 바다의 소리가 조금은 무서웠다. 주위가 어두워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에 사방에서 울려대는 소리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에 대해 마트료나와 얘기를 나누자 나련이 덧붙였다.

“바다가 흐르는 소리라고 할까. 육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처럼 듣기 힘들지. 조그만 섬에서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이 독특한 환경에서만이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두는 게 좋아.”

여양은 나련의 조금은 톤이 낮아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람에 날리는 그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에게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해서 이곳에 왔다면, 저 사람과 같은 학년이 되었겠지. 어쩌면 같은 반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여양은 자신이 잃어버린 정상적인 미래, 자신이 놓친 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이 년을 늦게 온 덕분에 지란이나 마트료나 같은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아쉽고 서글프기만 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건 마음먹기 달렸지, 여양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복판에서 보는 밤하늘엔 별이 제법 많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것이 어느 별이고 무슨 성좌인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보던 하늘과 그렇게 다르진 않을 텐데, 강원도의 산 위에서 보던 하늘과는 왠지 빛깔도 별의 위치도 다른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도 낯선 환경에 놓여진 자신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림짐작을 해본다.


* * * * * * * * * *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양은 마트료나를 데리고, 방송부와 사진부 선배라는 불청객을 혹처럼 달고 다시 북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지된 곳에 간다는 흥분과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이번엔 북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차단막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방금 따돌리자고 했던 말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서도에서 북도로 가는 유일한 길은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승개교밖에 없으니까.

한창 걷고 있을 때 조그마한 골프 카트 한 대가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활인은 과장된 몸짓으로 반쯤 엎드리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어익후~! 국사 쌤이다! 다들 수그리!”

하지만 그는 뭔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슬쩍 돌아보았을 뿐 이내 가던 길로 계속 갔다. 어차피 다리는 2차선에 양쪽에 폭이 좁은 인도, 안전 때문인지 2미터는 넘을 듯한 높은 난간이 두르고 있어 몸을 숨길 장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활인의 목소리와 행동은 장난에 가까운 것이긴 했지만.

저 멀리에 출입구가 보였다. 차단봉 앞에서 멈춘 국사 선생님이 차를 탄 채로 교직원 수첩을 꺼내어 단말기에 대자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차단봉이 위로 올라갔고, 차가 지나가자 봉은 도로 내려갔다. 일반적인 주차장에서 볼 수 있는 장비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였다.

“저 선생님 우리 반에도 들어오는데. 별명이 뭐더라……?”

여양이 생각날 듯 말 듯한 그의 별명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자 뒤에서 활인이 멋지게 흉내를 내었다.

“좌, 여러뿌은, 그뤠서 답이 모죠? 모죠? 모죠? ……이거죠!”

다소 과장된 언행이었으나 인상적인 성대모사로써는 매우 훌륭했다. 입술을 비쭉 내밀면서 고음을 내는 것과 특히 ‘모죠?’라고 할 때마다 검지로 허공을 쿡 찌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활인의 흉내를 보자 모두들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여양은 배가 아파서 움켜쥐고 웃을 정도였다.

“맞아요, 그거예요. 생각났어, 하하하. 싸모님!”
“저 쌤 별명이 싸모님이지. 말투도 그렇고 꼭 드라마에 나오는 대기업 사모님처럼 생기셔서 말이야. 특히 며느리 괴롭히는 못된 시어머니에 딱 맞는다고나 할까? 흐흐. 이건 신입생들에게 말하기 뭐한데 몇몇 아이들은 싸모년이라고 불러. 앗, 그건 적지 마!”

옆에서 승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메모를 했다. 교사들의 특징과 별명 같은 걸 모아놓으면 언젠가 좋은 기사거리가 될지 누가 아랴.

“과연 신문부의 수석기자. 뭐 하나 놓치질 않고 다 메모를 하시는구만.”

반쯤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칭찬을 듣고 승미는 테가 가는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를 슬쩍 쓸어넘기며 짐짓 무심한 투로 반격했다.

“3학년이 되어서도 특활에 몰두하고 계신 활어 선배님께 비할 바는 아니죠.”
“하하, 난 그냥 공부가 하기 싫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수다를 떠는 동안 그들도 차단봉 바로 앞까지 왔다. 옆에는 작은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미가 반쯤 장난으로 학생수첩을 단말기에 대보았다. 삑 하는 소리가 나자 설마 했으나 이내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가되지 않은 기기이거나 장비 이상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오른쪽의 노란색 버튼을 눌러 담당자에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오른쪽엔 노란색의 네모난 버튼이 있어 마치 엘리베이터 같았다. 여양은 학생수첩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에 나온다니까 이제 금방이에요. 한 이십 분 정도 남았는데 그냥 여기서 기다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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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까지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가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화원의 외곽은 그만큼 높은 수벽(樹壁)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땐 이 문이 열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안으로 들어갔었으니까.”

여양은 희미해지고 뒤엉킨 기억의 더미를 들쑤셔서 남아 있는 선명한 단편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커다란 문은 기억이 난다. 둥글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철문……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고 이상하다는 느낌도 없이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바로크식으로 질서정연하게 가꾸어진 화원으로, 한겨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무는 푸르고 꽃은 만발했다. 곳곳에 수벽과 토피어리로 장식된 보스케(수목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방)가 있고 그 사이사이는 수벽으로 만든 미로로 이어져 있다. 중앙의 큰 분수를 기점으로 폭이 좁은 운하가 외곽을 빙 두르고 있다. 이런 정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분명히 호화로운 카페트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어딘가 들어갈 만한 틈이 있을 거란 생각에 화원의 외곽을 천천히 걸었다. 문에 가까운 쪽은 높은 담벽이 있었으나 거리가 먼 쪽은 수벽으로, 더 먼 가장자리는 침엽수를 세워 놓았기 때문에 나무 사이를 통해 얼마든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좌우대칭의 엄격함 때문에 되레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비슷해 보이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양도 마트료나도 정확한 장소를 짚어내지 못했다.

다만 하나의 실마리는 마트료나가 증언한, 운하의 마지막 부분이다. 북도의 끝, 바다로 이어지는 정원의 끝. 물소리가 들렸음을 여양이 기억해 내었고, 마트료나가 분수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마침내 그 장소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아무런 특이한 점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화원 그 자체가 주는 특별하고 신비로운 느낌 때문에 다른 모든 감정이 무뎌지는 듯 했다. 강렬한 향수가 주위의 냄새에 대한 코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붉은 화살표 - 마트료나가 들어온 곳
*붉은 가위표 - 두 사람이 만난 곳
*보라색 화살표 - 월랑이 곤돌라를 타고 이동한 방향


“이제 생각났어. 재학생 중에서 이 화원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여왕과 그의 동행자 한 명 뿐이야. 교직원이라 해도 정원사 등 관리하는 사람 이외에는 교사라 해도 멋대로 들어올 수는 없어.”

나련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효범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눈으로 봐도 별다른 것이 없어. 운하의 끝은 삼각형으로 둘러싸인 수벽이 양 옆에 있어서 다른 곳으로 갈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사람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데 하물며 곤돌라를 타고 증발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럴까? 네 생각은 어때?”

나련은 여양에게 물었다. 여양도 딱히 발견한 것이 없기로는 효범과 마찬가지였기에,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곤돌라를 엄청 빠르게 몰고 바다 멀리로 나가서 마트료나의 눈에 안 보였다…… 는 건 어떨까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느꼈는지 대꾸하는 사람도 없이 잠시동안 침묵의 장막이 그들을 감쌌다. 수벽을 손으로 쓸어보던 효범이 장막을 걷어내고 입을 열었다.

“곤돌라가 커브를 돌아서 시야에서 안 보이게 된 순간 이 수벽을 기어 올라갔을지도 몰라. 가지도 튼튼하고, 손과 발을 짚을 곳은 충분히 많으니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다만 그렇게 빨리 올라갈 수 있는지…… 어휴!”

효범은 직접 시범을 보이려는 듯 나뭇가지를 붙잡고 힘껏 도약하며 올라가봤지만 사다리의 세 단 정도 높이도 올라가지 못하고 도로 땅으로 내려와야 했다. 나뭇가지는 너무 연약하고 나뭇잎들이 방해를 해서 암벽을 타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는 옷에 뭍은 나뭇잎을 떨어내며 멋적게 웃었다.

“안 되겠네. 그냥 서툰 추리를 해보았을 뿐이야. 역시 아닌가?”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어. 이 아이가 본 것은 단지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나련의 단정적인 말투에 마트료나가 기겁하듯 놀라며 대꾸했다.

“저,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아니. 난 너의 말을 믿어. 믿으니까 여기까지 왔지. 내 말의 뜻은 너의 의도와는 달리 네 말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너는 이곳에 처음 와서 무척 놀랐다고 했어. 기절했다가 깨어난 후엔 그때의 일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고. 이 장소를 혼자서 찾아내지도 못했잖아?
분명 너는 신비로운 주위 경관과 겨울에 맡기 힘든 풀과 꽃의 냄새에 취해서 환각 상태와 비슷한 몽롱한 기분이었을 거야. 그래서 월랑님은 그저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따라 바다로 간 후 외곽에 배를 대고 내렸겠지만, 넌 그저 꿈 속에서 애타게 뒤를 쫓아갔을 거야. 어쩌면 정말로 몇 걸음 내딛었을 수도 있지. 그러다가 차가운 물에 빠졌을 테고. 간신히 기어 올라왔지만 춥고 지쳐서 그대로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야.”

마트료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련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인지도 모른다. 불투명한 기억, 안개가 낀 듯 몽롱한 풍경, 환각처럼 어렴풋한 만남과 이별까지…… 모두 그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초월랑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효범의 질문에 나련은 말없이 분수의 물줄기를 눈으로 좇으며 대답했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여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북도니까, 월랑님은 저 이사회 건물에 계시지 않을까 싶어. 왜 졸업도 하지 않고 모습을 감추었는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살아 계시다면, 여기 이곳에 계시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겠지.”

나련의 총명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효범은 그의 눈가에 맺히는 작은 물방울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나련은 신입생 두 명을 앞에 두고 눈물을 보일만큼 연약하지 않으니까. 얼른 하품하는 척을 하며 기지개를 켠 나련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누군가가 우릴 찾으러 올 거야. 그 전에 우리 발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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