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나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쭈그리고 앉은 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금윤도 한참이나 거친 숨을 내쉬고 난 후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한 달이나 방에 갇혀 있었는데 갑자기 뜀박질을 하니까……”
“하니까?”
“……죽을 것 같아.”
“하하하. 그래도 덕분에 운동은 실컷 했잖아요? 그동안 밀린 운동 했다 생각하시고!”
여양의 농담에 둘은 마음놓고 큰 소리로 웃었다. 당분간 그 두 사람은 이곳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 믿고.
“하지만 내일부터 저 둘이 반으로 쳐들어올지 몰라요. 무슨 말을 할지는 선배의 자유지만, 이상하게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어요.”
“알았어. 기억해둘게.”
금윤은 그렇게 대답하곤 잠시 여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풀렸나 싶었던 어색한 냉기가 되살아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 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금윤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존댓말 써?”
“네? 그, 그거야 선배니까…….”
“뭘 이제와서 내가 선배 대접받을 게 있다고. 그때 한 말 거짓말은 아니지?”
그때의 말이라면 나이 이야기일 것이다. 여양은 긴장한 기색으로 얼른 마트료나의 눈치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주위에는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친구들이 어색해할까봐.”
“하긴, 그것도 그렇겠지. 그치만 난 상관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나도 이렇게 반말로 하고 있고. 나한테는 말을 놔도 돼.”
여양은 알았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안 된다고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마침 마트료나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쪽으로 다가오자 얼른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괜찮아, 마미? 미안해, 갑자기 뛰자고 해서.”
“아니, 난 괜찮아. 체력이 약한 내가 잘못이지.”
“마트료나.”
금윤이 돌연 정색을 하고 마트료나의 이름을 불렀다.
“반성실에서도 교내신문은 읽었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학교를 일주일이나 쉬었다면서.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이젠 다 잊었어요. 신문의 기사는 괜히 자극적으로 부풀려서 쓰고 그러는 걸요.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전 선배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요.”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마트료나의 얼굴이 있었다. 이국적이고 가련하며 청초하고 황홀한 아름다움. 월랑과는 또 다른 고귀함이 담긴 아름다움이었다.
“저 역시 초월랑이란 분을 만났고…… 그 분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까요…….”
분위기가 침울해지자 여양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화단 너머로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 한켠에 쥐가 갉아먹어 구멍이 뚫린 듯 쓰라렸다. 마미가 초월랑이며 빈나련에게 마음을 뺏기는 건 어째서일까. 그들이 여왕이며 학생회장이기 때문일까. 만약 자신이 여왕이고 학생회장이라면 마미는 온전히 자신만을 좋아해줄 수 있을까. 엉뚱한 망상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더 주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금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배가 고파서 이만, 밥 먹으러 갈게.”
여양도 서둘러 따라 일어나며 치마에 묻은 풀을 손으로 툭툭 털면서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 또 활어 선배랑 그 기자 선배가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별로 괜찮은데. 사실 할 말도 없고.”
“안 돼요. 활어 선배는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로 생방송으로 찍어댄다고요. 말실수라도 잘못 하면 전교에 책잡히는 거예요. 신문부는…… 잘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신문에 대한 불신감이 있어서, 분명히 자기들이 정해놓은 논조에 맞게 편집하고 왜곡할 게 틀림없어요.”
금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고등학교의 교내 신문에 대해까지 그런 기성 족벌 신문과 같은 비판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싶었다.
마트료나는 여양이 내밀어준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여양은 마트료나의 엉덩이며 등에 묻은 흙과 풀을 세심하게 털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금윤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어떤 감정을 잡아내었다. 저 아이는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넘쳐흐른다고 할까.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을 제삼자의 눈으로 알아본다는 건 흐뭇해지는 일이겠지만, 까닭모를 아쉬움도 묻어나왔다. 이건 설마, 질투라는 것일까.
금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생각하면 늘 밝은 햇살이 후광처럼 비춰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명석하며, 밝고,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그야말로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소녀들의 여왕님.
그런 여왕이란 존재는 평범한 금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말을 걸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그의 입술은, 마음은, 순결은 모두 그에게 바쳤다. 비록 그가 다른 여자애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고 해도, 이런 그의 마음이 더럽혀질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잊지 않기를,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주길 바랐다.
월랑님. 나의, 그리고 우리의 여왕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목 놓아 불러보고 싶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이 마트료나라는 소녀에게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 그는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숨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 증거라고는 오직 이 소녀의 말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믿고 싶었다.
“선배, 가요.”
여양의 목소리에 금윤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의 손은 자연스레 여양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여양은 왼손에 마트료나를, 오른손에 금윤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장난스레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자 금윤도 엉겁결에 손을 휘저으며 반쯤 끌려가듯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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