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대로 정원을 나가 북도의 출입구로 돌아갈 무렵 회색 양복을 입은 경비요원이 무전기를 들고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련은 그에게 물에 빠졌던 마트료나가 소중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학생회장인 자신이 인솔하여 찾으러 왔다고 둘러대었다. 그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직원도 더 캐묻지 않고 물러났다.
그들이 북도를 나와 서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해진 뒤였다. 그들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는 결과만 남기고 돌아온 셈이었다.
“미안해. 괜히 쓸데없는 일을 시킨 것 같아서.”
나련이 두 사람에게 깔끔하게 사과를 했다. 과연 학생회장. 원망이나 뒷다마를 들을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능숙한 뒤처리 솜씨였다.
“괜찮아요, 저녁 산보한 셈 치죠. 전 이렇게 바람 쐬면서 걸어 다니는 거 좋아해요.”
여양은 그렇게 답하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밤이 되자 낮과는 달리 꽤 추워지긴 했으나,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좋았다. 파도가 치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낮고 웅장한 바다의 소리가 조금은 무서웠다. 주위가 어두워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에 사방에서 울려대는 소리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에 대해 마트료나와 얘기를 나누자 나련이 덧붙였다.
“바다가 흐르는 소리라고 할까. 육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처럼 듣기 힘들지. 조그만 섬에서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이 독특한 환경에서만이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두는 게 좋아.”
여양은 나련의 조금은 톤이 낮아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람에 날리는 그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에게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해서 이곳에 왔다면, 저 사람과 같은 학년이 되었겠지. 어쩌면 같은 반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여양은 자신이 잃어버린 정상적인 미래, 자신이 놓친 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이 년을 늦게 온 덕분에 지란이나 마트료나 같은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아쉽고 서글프기만 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건 마음먹기 달렸지, 여양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복판에서 보는 밤하늘엔 별이 제법 많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것이 어느 별이고 무슨 성좌인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보던 하늘과 그렇게 다르진 않을 텐데, 강원도의 산 위에서 보던 하늘과는 왠지 빛깔도 별의 위치도 다른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도 낯선 환경에 놓여진 자신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림짐작을 해본다.
* * * * * * * * * *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양은 마트료나를 데리고, 방송부와 사진부 선배라는 불청객을 혹처럼 달고 다시 북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지된 곳에 간다는 흥분과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이번엔 북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차단막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방금 따돌리자고 했던 말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서도에서 북도로 가는 유일한 길은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승개교밖에 없으니까.
한창 걷고 있을 때 조그마한 골프 카트 한 대가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활인은 과장된 몸짓으로 반쯤 엎드리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어익후~! 국사 쌤이다! 다들 수그리!”
하지만 그는 뭔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슬쩍 돌아보았을 뿐 이내 가던 길로 계속 갔다. 어차피 다리는 2차선에 양쪽에 폭이 좁은 인도, 안전 때문인지 2미터는 넘을 듯한 높은 난간이 두르고 있어 몸을 숨길 장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활인의 목소리와 행동은 장난에 가까운 것이긴 했지만.
저 멀리에 출입구가 보였다. 차단봉 앞에서 멈춘 국사 선생님이 차를 탄 채로 교직원 수첩을 꺼내어 단말기에 대자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차단봉이 위로 올라갔고, 차가 지나가자 봉은 도로 내려갔다. 일반적인 주차장에서 볼 수 있는 장비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였다.
“저 선생님 우리 반에도 들어오는데. 별명이 뭐더라……?”
여양이 생각날 듯 말 듯한 그의 별명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자 뒤에서 활인이 멋지게 흉내를 내었다.
“좌, 여러뿌은, 그뤠서 답이 모죠? 모죠? 모죠? ……이거죠!”
다소 과장된 언행이었으나 인상적인 성대모사로써는 매우 훌륭했다. 입술을 비쭉 내밀면서 고음을 내는 것과 특히 ‘모죠?’라고 할 때마다 검지로 허공을 쿡 찌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활인의 흉내를 보자 모두들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여양은 배가 아파서 움켜쥐고 웃을 정도였다.
“맞아요, 그거예요. 생각났어, 하하하. 싸모님!”
“저 쌤 별명이 싸모님이지. 말투도 그렇고 꼭 드라마에 나오는 대기업 사모님처럼 생기셔서 말이야. 특히 며느리 괴롭히는 못된 시어머니에 딱 맞는다고나 할까? 흐흐. 이건 신입생들에게 말하기 뭐한데 몇몇 아이들은 싸모년이라고 불러. 앗, 그건 적지 마!”
옆에서 승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메모를 했다. 교사들의 특징과 별명 같은 걸 모아놓으면 언젠가 좋은 기사거리가 될지 누가 아랴.
“과연 신문부의 수석기자. 뭐 하나 놓치질 않고 다 메모를 하시는구만.”
반쯤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칭찬을 듣고 승미는 테가 가는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를 슬쩍 쓸어넘기며 짐짓 무심한 투로 반격했다.
“3학년이 되어서도 특활에 몰두하고 계신 활어 선배님께 비할 바는 아니죠.”
“하하, 난 그냥 공부가 하기 싫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수다를 떠는 동안 그들도 차단봉 바로 앞까지 왔다. 옆에는 작은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승미가 반쯤 장난으로 학생수첩을 단말기에 대보았다. 삑 하는 소리가 나자 설마 했으나 이내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가되지 않은 기기이거나 장비 이상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오른쪽의 노란색 버튼을 눌러 담당자에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오른쪽엔 노란색의 네모난 버튼이 있어 마치 엘리베이터 같았다. 여양은 학생수첩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에 나온다니까 이제 금방이에요. 한 이십 분 정도 남았는데 그냥 여기서 기다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