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할 수 없다는 듯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거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어 대었다. 마트료나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양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자신의 코트 자락을 벌렸다.
“자, 마미, 내 곁으로 오렴.”
여양의 장난섞인 느끼한 목소리에 마트료나는 약간 부끄러워 하면서도 순순히 들어왔다. 옆에 있던 활인이 어느새 카메라를 꺼내어 들고 접근했다.
“이거 뭔가 훈훈한 장면 같은데, 한번 찍어볼까?”
하지만 이내 여양의 날카로운 눈빛이 독침처럼 날아와 꽂혔다.
“절대 찍지 말아요. 사생활 침해야!”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어제도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만났으면서. 서로 가슴 크기 비교하자며 만져보기도 했잖아. 흐흐흐.”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표정을 짓고는 손가락을 산낙지처럼 꼼지락거린다. 서로 웃으며 즐긴 사이이긴 하지만, 하필 마트료나의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만다.
“그, 그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그게 도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선배, 목욕탕에서도 촬영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사실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지만……”
옆에서 승미가 굴뚝 같겠죠, 하고 정정해 주었다. 활인은 혼자 치마가 아닌 체육복 바지 차림인지라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앉아서 반쯤 뒹굴었다.
“에라! 언젠가는 찍어봐야지. 영화궁 고등학교 목욕탕 실황 중계! 적나라한 여고생들의 누드 퍼레이드! 미소녀들의 속살을 남김없이 공개!”
“그 무슨 야동 광고스러운 말씀입니까.”
옆에서 승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이후 한두 대의 차가 더 북도로 들어간 후,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이프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받은 바로 그 길금윤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만난 사이라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았으나 하얀색 헤어밴드가 인상에 깊게 새겨져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당시 광기에 휩싸여 불꽃을 튀기던 눈빛은 수그러들고 없었다.
옆에는 낯이 익은 직원이 대동하고 있었는데, 금윤보다 키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가 인상적인 손선지였다. 선지 역시 여양을 알아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단봉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잠시 마주보며 서있었다. 어색함이라는 도랑이 그들 사이를 도도하게 흘렀만, 금윤은 약간 숙였던 고개를 들고 마트료나를 바라보았다. 용기와 의지가 담긴 눈, 부끄러움이 섞인 어색한 미소로 살짝 구부러진 입꼬리.
“오늘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어요.”
간신히 말문을 연 여양의 목소리도 꽤나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서로 죽일 듯 노려보며 거친 말을 내뱉었던 사이다. 양쪽 모두 그때의 앙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거리감만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선지가 수첩을 단말기에 대자 차단봉이 올라갔다. 그가 금윤에게 말을 붙였다.
“원래 기숙사까지 동행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왔으니까 제가 없어도 되겠죠?”
‘친구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시선이 자연스레 여양의 얼굴로 향했다. 여양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선지도 수긍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학생 수첩을 하나 꺼내어 금윤에게 내밀었다. 금윤이 말없이 받아들자 선지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길금윤 학생은 본교의 학생으로서 가진 권리를 되찾은 셈이에요. 자, 그럼 잘 돌아가세요.”
선지는 몸을 돌려 이사회 건물쪽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학생수첩은 기숙사 방의 열쇠, 화폐, 수업의 출석부 등 영화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갖가지 기능을 모두 담고 있는 필수품이었다. 이걸 압수당한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삶 자체를 거부당한 것과 같은 중벌에 다름 아니었다.
금윤은 PDA를 둘러싼 벗겨지고 색이 바랜 가죽 커버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고는 주머니에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금윤이 지나가고 몇 초 지나자 차단봉은 도로 닫혔다.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정하지 못하고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 떠올리는 대로 말하자고 정한 사람처럼 두서없이 말했다.
“저기, 찾아와줘서 고마워. 나 같은 건 보기도 싫을 줄 알았는데……. 상처는 나지 않았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거든. 배고프다……. 식당에서 먹는 밥이 그리웠어.”
마트료나는 온유한 목소리로 아무런 상처도 없고 괜찮다고 답했다. 잠시 훈훈하고 풋풋한 순간이 연출되나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사반나에 뒹구는 짐승 시체라도 본 듯 금윤을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이 끼어들었다.
“난 신문부의 제갈승미라고 해. 같은 2학년이지.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
“자, 테입 돌아갑니다! 여기는 영비에~스! 여전히 썰렁 썰렁~! 흐흐. 근데 실은 이 카메라, 하드디스크 방식이라 실제로 테입은 안 돌아가요. 그치만 일종의 방송 용어랄까? 아무튼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나이프 사건의 장본인 길금윤 학우의 출소 장면을 생방송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잠깐 선배, 출소라니 너무 자극적인 표현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먼저 인터뷰해야 하거든요?”
“뭐시라, 이 제기랄 기자가!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뭐가 어때! 인터뷰도 그렇지, 같이 하기로 해놓고 이게 무슨 적반하장?”
“이번 인터뷰는 방송에 나가기 곤란한 내용도 있을 수 있거든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모르세요? 오프 더 레코드!”
“오프 더 월(off the wall)은 아는데. 닌자처럼 벽타고 점프하는 거 아냐? 아무튼 이거 지금 생방송이야, 생방송!”
“생방송은 무슨! 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교내 방송 따위가! 저희 교내신문은 선생님들도 다 보시고 기사도 주시고 그러거든요?”
예기치도 않게 특종거리를 눈앞에 두고 두 세력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여양은 그 틈을 놓칠세라 금윤의 손목을 낚아쥐고 소리쳤다.
“자, 바로 이때다! 마미도 뛰어!”
“으, 응? 잠깐만! 같이 가!”
그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고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린 기자와 카메라 걸도 이내 뒤를 쫓았다. 외나무 다리의 열띤 추격전은 서도로 들어가면서 끝나는 듯 했다.
하교중인 학생들 사이를 제치고 들어가 수풀이 무성한 도서관 옆 화단으로 뛰어 들어가자 추격자들은 목표를 놓치고 허둥대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다니, 내 이름이 운다, 울어!”
“선배는 저쪽으로! 전 이쪽으로 갈게요!”
“좋아! 먼저 찾은 쪽이 인터뷰도 먼저 하는 거다! 대신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해!”
“두 말 하면 잔소리죠!”
다시 처음처럼 한 패거리가 된 두 사람은 양쪽으로 흩어졌다. 화단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여양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갔어, 이제 안심해. 휴~.”